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몹시 어둔하여 서당의 스승조차 포기하려 했던 윤봉구
윤봉구(1681~1767)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서응,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아버지 명운은 벼슬이 사재감청점에 이르렀다. 두번 상처하고 세번째 마음씨 고운 완산 이씨에게 장가 들었다. 어느 날 이씨의 꿈에, 한 여자가 사당으로부터 와서 말하였다.
"나는 곧 가옹(집주인, 남편)의 전실이다. 전번의 계실(두번째 들어온 아내)이 내 아이를 매우 박하게 대우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성의가 없으므로 내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대는 아름다운 덕이 저승에까지 미쳐 감동을 주어 반드시 귀한 자식 두 사람을 낳을 것이니 잘 가르치도록 하라."
그 뒤에 과연 아들 둘을 낳았다. 맏이는 봉구인데, 유일(학문과 덕망이 높으면서 숨어 있는 사람)로 벼슬은 판서에 이르고 시호는 문헌이며, 둘째는 봉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에 이르렀다.
윤봉구가 어려서 서당에 입학하였는데 말이 둔하여 구두를 잘 떼지 못하니, 서당의 스승이 떠나가려 하였다. 이에 윤봉구가 그만 눈물을 흘리며 잠을 자지 않으니, 스승이 그 뜻에 감동하여 다시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윤봉구 또한 열심히 노력하여 마침내는 학업에 성공하게 되었다. 장성하고 나서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계속 공부를 하여 학문 또한 일가를 이루었다.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화분을 받고 출세한 이재
이재(1680~1746)의 본관은 우봉이고 자는 희경, 호는 도암 또는 한천이다. 숙종 28년(1702)에 문과에 급제하고, 33년(1707)에 중시에 급제하여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내고 시호는 문정이다. 이재가 지은 "삼관기"에 이렇게 씌어 있다.
"내가 알성시에 급제하여 급제자의 이름을 부르던 날 어전에 이르니 한 노인이 먼저 와서 옆에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는 바로 임방 공이었다. 대개 태어나던 해에 임공은 41세가 된 사람으로 나와 동방급제가 되었으니,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는가. 뒤에 들은 이야기이다. 임방이 숙종 6년(1680)에 장차 정시에 응시하려 할 적에 그날 밤 꿈에, 하늘로부터 난초 화문 두 개가 내려와서 하나는 어떤 사람이 그의 집에 와서 전하고, 화분 하나는 이미 아현이 감사댁에 전해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 선인(이재의 아버지, 곧 이만창임)이 문장의 명성이 매우 성대하여 사람들이 멀지 않아 급제할 것이라 여겼으므로 임방의 생각으로는 혹 이만창과 동방급제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그해 새로 태어난 아이(이재)를 지루하게 기다려 23년 뒤에 동방급제하게 할 줄이야 누가 생각하였는가. 과거시험 제목도 또 의란조였으니 그 또한 기이 하도다."
이 때 서덕수의 집이 혹독한 화를 입어 문호가 탕패하고 아이들과 과부들이 외지를 떠돌아다녔다. 이 때 화의 기색이 하늘에까지 덮어 이글거리고 사람과 물자의 모든 내왕이 끊여져 살아 있는 사람도 굶어 죽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홀연히 밥과 국 등 먹을 것을 사지고 와서 문밖께 두고 고하지도 않고 가는 자가 있으므로 그 집에서 두려워서 감히 나가서 응하지 못하다가 오랜 뒤에 가져다가 먹었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여러 차례여서 그 덕택에 겨우 연명하게 되었다. 뒤에 그 음식을 가지고 온 자의 뒤를 밟으니 바로 도암의 행적이었다.
숙질이 변란에 항거하여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이봉상
이봉상(1676~1754)의 자는 숙의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5세손으로서 큰 키에 수염이 아름답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숙종 18년(1692)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총융사 형조참판, 금위대장, 훈련대장을 지냈다. 영조 3년(1727) 김일경의 당이 뜻을 얻어 집권하데 되자, 충청병사로 내쫓기게 되었다. 역적 필명 등이 그 당이 집권 등과 몰래 결탁하여 안팎으로 내통하여 불궤한 일을 도모하니, 중외(서울과 외방)의 인심이 들끓고 있어서 염려스러움과 두려움이 매우 컸다. 이러한 위구스러움을 걱정하면서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떠나왔다.
무신년 곧 영조 4년(1728) 3월 15일에 이인좌 등이 변란을 일으켜 송장을 가장하고 병기를 상거 속에 몰래 숨겨 두어 어둠을 이용하여 충주성에 들어왔다. 밤 4고에 하늘에서는 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이들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병영에 다가오니, 병영의 비장 양덕부가 적의 유혹을 받고 성문을 열어 끌어들여 곧바로 이봉상의 침소에 들어왔다. 이봉상이 창졸에 칼을 뽑아 들고 나가서 그들과 서로 맞부딪쳐 싸우다가 손에 큰 상처를 입었으나 더욱 분발하였다. 적에게 포박당하게 되어서는 적이 횃불로 그 입을 지지고 목에 칼을 대며 말하였다.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다. 만일 나를 따르면 부귀를 함께 누릴 것이다."
이봉상이 꾸짖어 말하였다.
"우리집은 대대로 충의를 지켜왔는데, 어찌 너희 역적들의 반란에 따르겠느냐."
적을 계속 꾸짖다가 죽었다. 이봉상의 계부 홍무도 병영 안에 있다가 적에게 잡히게 되자 적이 위협하여 끓어 앉게 하니, 홍무가 이에 대항하여 꾸짖었다.
"내 조카가 이미 나라를 위해 죽었다.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너 같은 자에게 무릎을 끓겠느냐."
적이 병부를 찾으니, 홍무는 말하였다.
"본지 알지 못하고, 알아도 말하지 않으리라."
적이 이름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니 적이 크게 성내어 몽둥이와 칼로 교대로 위협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수금된 지 6일 만에 마침내 죽었다. 이봉상의 어머니 정씨가 이봉상의 죽음에도 울지 않고 말하였다.
"내 아이가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그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한스럽게 여기랴."
이봉상이 순국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좌찬성을 증직하고 충민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려문을 세웠다. 영장 남연년과 비장 홍림이 아울러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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