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시를 보고 작자의 미래를 점친 남용익
남용익(1628~1692)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운경, 호는 호곡이다. 어릴 때부터 시명을 날렸다. 언젠가 어떤 노장이 누에를 시제로 하여 시를 지어 보라고 하자 남용익은 즉석에서 다음과 같이 함련(한시의 앞의 연)과 미련(한시의 끝 연)을 지었다.
오릴 적엔 검은 입술로 푸른 잎을 먹더니 늘그막엔 누런 배로 푸른 사다리를 오르네
본래의 몸을 벗고 나비가 되었으니 장자의 꿈속에 들어가 그를 헷갈리게 한 것은 아닌지
시를 본 노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통 시재가 아니다. 하지만 장래에 이 아이는 초년에 요직을 거쳐 늘그막엔 대관이 되겠지만 이 시의 끝구를 보면 말년에 부귀를 보존하지 못할 상이다."
남용익의 일생을 보면 이 노장의 시참이 들어맞은 세이다. 그는 21세(1648)에 대과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1656년 문과 중시에 장원,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명천 배소에서 죽었다. 남용익이 정언으로 있을 때 몹시 앓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꿈속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배소에서 외롭게 죽은 남용익의 말년 운을 말해 주는 듯하여 역시 시참을 생각하게 한다.
변방에 행인의 발길은 드문데 나그네 사름 얼굴에 가득하네 쓸쓸한 비는 십리길에 부슬부슬 내리는데 밤이 되어 귀문관을 건넌다네
귀양가면 그곳에 술이 있느냐고 물은 오도일
오도일(1645~1703)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관지, 호는 서파다. 현종 14년(1673)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을 하였다. 시문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 사람들로부터 동이 삼학사의 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였다. 언제가 숙종은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오도일은 술을 너무 좋아하여 고질병이 되었는데 도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다. 예로부터 전해 오는 계주시(술조심을 깨우치는 시)를 소개한다."
성군의 은총이 지극하여 급제의 영광을 받았고 어머니의 자애가 깊어 오래오래 수하시네
임금의 은혜와 어머니의 사랑을 어느 한쪽도 갚지 못하였는데 만약 술 때문에 병이 난다면 뉘우친들 돌이킬 수 있으랴
계속하여 숙종이 하교하였다. "이 계주시를 늘 읽고 정신을 차린다면 어찌 술에 실수할 일이 있겠느냐?" 이러한 전교를 받은 오도일은 깊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끊겠다는 결심을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고질이 된 술버릇을 지금까지 끊지 못하고 무릎 끊고 전교를 읽으니 눈물만 흐른다네
뼈에 맺힌 깊은 은혜 무엇으로 갚을까 죽기 전에 오로지 지은 죄나 반성해야지
숙종 28년(17020 민언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귀양 가던 날도 오도일은 만취가 되어서 자신을 호송하려 온 의금부 나졸들에게 말했다.
"장성에 가면 소주가 있느냐?" "소주야 어디에 간들 없겠습니까." 나졸들이 대답하자 오도일이 말했다. "그래? 그래! 소주만 있으면 됐다." 천안역을 지날 때 천안 군수가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니, 오도일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작별의 정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달랠 길 없었는데 마침 이곳 천안 군수가 술병을 갖고 왔네
나는 술이 좋아 이날까지 평생을 마셨지만 오늘 마시는 이 술은 영원히 못 잊겠네
오도일은 장성까지 가는 동안 음식은 먹지 않고 오직 술만 먹었다. 정작 귀양지에 도착한 그는 며칠 못 가서 죽었다. 시인 유도삼이 다음과 같은 만시를 썼다.
대사마1)가 가셨으니 그 시혼은 어디에 노니실까 멱라수2)로 머리를 돌리니 맑은 바람이 잇달아 불어오네
1) 대사마 : 병조 판서, 즉 병조 판서를 지낸 오도일을 일컬음. 2) 멱라수 : 중국 호남성 북쪽에 있는 강. 초나라 삼려대부인 굴원이 혼탁한 세상을 비관하여 물에 빠져 죽은 곳으로 유명함. 여기서는 오도일을 굴원에 비유함.
유도삼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던 어느 날 밤에 낙산사에서 시를 짓고 노는데 갑자기 절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시를 잘한다는 감사의 시솜씨가 가소롭구나!"
이상하게 여긴 유 감사가 속으로 놀라면서도 억지로 태연한 척하고 이어서 시를 읊조리자 또 같은 소리가 들려 왔다. 다시 놀란 유 감사는 즉시 하인을 보내어 찾아보게 하였더니 하인은 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다른 사람은 없고 웬 소금 장수가 돌멩이를 베고 누워 잡니다."
유 감사는 즉시 소금 장수를 데려오게 한 뒤에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나를 비웃느냐?" "예 사또께서 좋은 시를 짓지 못하시고 끙끙대기만 하기기에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어째? 좋다! 그러면 네가 한번 좋은 시를 지어 보아라. 만약 당장 좋은 시를 짓지 못한다면 관장을 비웃은 죄로 곤장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유 감사의 말 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금 장수는 한 구절을 지었다.
큰바다는 동남쪽으로 하늘에 떠 있고 일만 이천 기이한 봉우리는 대지 위에 꽂혔네
그의 시솜씨에 깜짝 놀란 유 감사는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말했다.
"과연 기재로다. 성명이 무엇이오?" "천인의 성명을 알릴 필요야 없지요. 제 성은 오가입니다."
오도일의 혼이 소금 장수로 나타났음을 은근히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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