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숙종15년 서인과 남인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에서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정호 문제를 계기로 중전 민씨가 폐위되었으며,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유배, 사사되고 서인이 대거 축출되어 남인 정권이 등장하였다. 경종 취임직후인 신축년과 임인년에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을 보호하는 소론과 연잉군(뒤의 영조)의 왕세제 책봉 및 추대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노론의 당인들이 정권을 획득하여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파를 축출하여 당쟁이 국에 달하였다.
일본 땅에서 제주 귤을 먹은 신유한
신유한(1681~?)의 본관은 영해이고 자는 주백, 호는 청천이다. 숙종 39년(17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제술관으로서 통신사 홍치중을 따라 1719년에 일본에 갔다. 신유한은 일본의 접빈관인 아메노모리 호슈(일본의 대학자로서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조손 사신의 접대를 전담했음)와 마주 앉아 귤을 먹으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나라도 남쪽 해안지방에서 귤이 나지요. 특히 제주에서 많이 생산되는데 맛은 이 귤만 못합니다. 귤에도 좋고 나쁜 종류가 있나 보지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맛이 좋고 나쁜 것은 그 나라 토질에 따라 다른 것이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옛날 우리나라 남도에 조선 선박이 표류하여 떠내려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배에 탔던 사람과 물건은 거의 침몰되고 거의 침몰되고 귤 한 상자와 문서 하나가 갑판 한쪽에 남아 있어 그 귤이 바로 제주 목사가 대궐로 보내는 공물임을 알았지요. 그 섬사람들은 그 귤이 외국산이라고 귀하게 여겨 그 씨를 받아 퍼뜨리고 제주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귤이 바로 그 제주귤이랍니다."
이처럼 신유한은 이웃 일본과의 교유와 문물에 밝았으며 시문에도 능하였다. 신유한이 지은 촉석루 시에 다음과 같이 시구가 전한다.
천지는 임금을 위해 삼장사를 보내었고 강산은 나그네를 위해 여기 촉석루를 남기었네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배나무를 안고 통곡한 유혁연
유혁연(?~?)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회보, 호는 야당이다. 어릴 적부터 출중하여 뒤에 장인이 된 당시 병마절도사 남이흥의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에 해미에 살 때였다. 동네 앞에 큰 나무가 있고 나무 아래 제단이 있었는데 항상 그 제단 위에 올라앉아 마치 대장처럼 아이들을 지휘하곤 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대자의 명을 어겼다고 군령을 집행한다며 그 아이를 낫으로 혼내 주려는 것을 본 아버지가 깜짝 놀라 그 낫을 빼앗았다. 유혁연은 독서도 좋아하여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와 "악무목전"(송의 충신인 악비의 전기)을 읽을 때는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 또한 남달라 큰 베개를 만들어 함께 사용하였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 유효걸이 안주에서 전사하자 형제가 함께 출전하여 싸웠으며, 남한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집에 돌아와 집 뒤에 있는 배나무를 안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니 마을 사람들이 그 배나무를 '유혁연 나무'라고 불렀다. 이듬해 세자가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가자 유혁연은 모화관(조선조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운 집)에 들어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남겼는데, 사람들은 이 시를 읊조리며 눈물을 삼켰다고 한다.
서쪽 강에 내리는 부슬비는 군신간의 눈물이요 대궐 위에 모여 있는 구름은 부자간의 정일세
인조 22년(1644)에 무과에 급제, 덕산 현감을 거쳐 선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유혁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사나운 북풍이 눈을 몰고 새벽에 닥치니 살을 저미는 추위가 앓아 누운 이불 밑으로 스며드네 아침에 기를 쓰고 일어나 활을 잡고 앉았으니 적병을 모조리 잡는 사냥 오직 그 마음뿐이라네
삼도수군통제사, 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대거 축출될 때 영해로 유배되고, 이어서 대정으로 옮겨 위리 안치되었다가 곧 사사되었다.
상복 차림으로 밭을 간 최신
최신(1642~1708)의 본관은 회령이고 자는 자경 호는 학암이다. 민정중이 함경도 감사로 있을 때 육진을 순회하다가 상복 차림으로 들에서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를 불러서 이야기해 본 뒤에 그를 발탁하였다. 최신은 민정중의 주선으로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 더욱 학문을 익혔으며 그 인연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중국의 곽임종과 모계위의 관계에 비유했다. 최신은 시골 출신으로 부모상을 맞아 성심껏 예를 지킨 연유로 민정중에게 발탁되어 인재로 성장했으니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일이다. 최신은 현감으로 있을 적에 윤휴의 작용에 의해 유필명과 더불어 의금부에 하옥되어 형신을 받고 사천에 유배되었으며,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제거되자 풀려 나와 제릉 참봉, 사옹원 직장, 광흥창 주부를 역임했다. 숙종 15년91689)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제기되자 윤휴의 당 김몽양에 의해 송시열의 심복으로 단죄되어 광양에 유배되었다. 숙종 20년(1694)에 석방되었는데 이 때 최신은 고향 회령을 떠나 남쪽으로 아예 집을 옮겨왔다.
숙종 31년(1705) 송시열의 문인 유필명의 말을 듣고 남에게 변무하는 글을 의뢰하였는데 그 사람이 변무문에 중국의 고사인 태정과 태갑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준 것을 그대로 유필명에게 준 일이 있었다. 유필명이 이 변무문으로 말미암아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는 도중에 최신을 끌어들인 때문에 최신은 변무문 사건에 연루되어 가혹한 추국을 받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유필명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광주에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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