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1. 예론이 당쟁으로
시재가 뛰어나 까다로운 운자에 강한 홍석기
홍석기(1606~1680)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원구, 호는 만주다. 인동 부사, 남원 부사 등 외직을 지낸 뒤 사직하고 청주에 살면서 화양에 있는 송시열과 교우하며 학문을 닦았다. 본시 시재가 뛰어나 강운(시를 짓기에 까다로운 운자)으로 시를 짓는 데 매우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어느 날 친구와 동행하다가 소나무에서 까마귀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친구는 침, 금, 심 3자의 강운을 주고 시를 짓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홍석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서 그 친구를 놀라게 했다.
시어머님 화좀 참으소 바느질하기 정말 싫소 꿈도 많고 시름도 많아 이불 안고 뒹군다네 누가 정말 시어머니 모진 마음 이해한다면 골방 속에 며느리 속마음 쪽집게로 집어내리
전서에 동방 일인자 허목
허목(1595~1682)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화보, 호는 미수 또는 대령노인이다. 현감 허교의 아들이며 오리 이원익이 그 사람됨을 기이하게 여겨 손녀 사위로 삼았다. 처음에 제자백가서를 공부하다가 다시 경서에 전심했으며 예학에 깊고 특히 전서에 동방 일인자라는 평을 들었다.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은일(속세를 떠나 숨어 살다가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내린 선비)로 천거되어 크게 등용되기 시작, 81세에 우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이다. 허목은 태어날 때 손과 발에 특이한 손금도 발금이 있었는데, 손바닥에는 '글 문'자, 발바닥에는 '우물 정'자 모양의 금이 뚜렷하였고, 눈썹이 길어 눈을 덮었다. 아홉 살 때부터 글을 배웠는데 그 날 배운 글을 백 번을 읽고도 외지 못하였다. 그래서 허목은 자봉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수십 년 동안 독서에 몰두하였다.
인조 4년(1626) 박지계(1573~1635)가 원종(인조의 아버지)을 왕으로 추승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인조가 기뻐하였으나 허목은 이를 반대, '임금으로 하여금 예를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맹렬히 반대 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얻어 정거(일정 기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법)를 받았다. 효종 원년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뒤에 지평, 장령이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현종 원년(1669)에 효종의 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론이 일어나자 송시열 등이 주장하여 채택한 기년설(만 1년)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하다가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로써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과 정권다툼이 치열하였다. 동해에 해일이 있을 땐 수해가 있어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는데 허묵이 동해를 찬미하는 비석(일명 동해척조비라고 부름)을 세운 뒤로부터 해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숙종 1년(1675) 왕명으로 연천에 집을 지어 살게 하자 허묵은 그 집에 은거당이란 편액을 달았다. 전서체는 신우비를 본으로 삼았는데 필력이 매우 굳세다는 평을 들었다. 어느 날 판서 이정영이 허목에게 전서체를 그만 쓰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 말을 들은 허목은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침해가 동상에 떠오르니 연기와 노을이 창문에서 모락모락 저 창문 바깥일은 알 수가 없고 갈필로 과두문자만 쓴 다오.
허목이 죽기 2, 3일 전 밤에 이상한 짐승이 내려와 지붕에 누워 있었는데 그 짐승이 눈에서 나오는 불빛이 멀리까지 비추었으므로 이를 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허목이 죽던 날 어떤 사람이 그를 조려에서 만났는데, 초립을 쓴 시종이 따른 것은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지만 허목이 이상한 짐승을 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날이 바로 허목이 죽은 날임을 그 뒤에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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