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1. 예론이 당쟁으로
순가의 재치로 평안 병사까지 한 이무
이무(?~?)의 본 관은 성주다. 대사헌 이의의 증손으로서 무과에 급제한 뒤 태안 방어사가 되어 임지로 내려가던 중 마침 한양으로 올라오는 우암 송시열과 같은 주막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방어사의 관노와 우암의 노복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생겨 서로 티격태격하는 중에 관노가 우암을 알아보고 이무에게 알려주었다. 비로소 그가 우암임을 눈치 챈 이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출세를 한번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다. 이무는 방으로 들어가 우암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누구시오?" "예, 나는 송시열인데 왜 그러시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도덕과 문장이 당대에 으뜸인 우암 선생을 철모르는 아이들까지도 다 알아서 아무도 그 어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거늘, 하물며 당신 같은 시골 선비 따위가 감히 우암 선생을 사칭하다니! 애이! 내가 이런 자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도 창피한 노릇이다."
그는 짐짓 화난 얼굴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우암은 '그놈 꽤 쓸만한 놈이구나' 하고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뒤 이무는 평안 병사에까지 특진되는 행운을 얻었다.
병사의 청을 군명으로 들어주지 않은 조석윤
조석윤(?~?)의 본관은 배천이고 자는 윤지, 호는 낙정이다. 인조 4년(1626)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파방(취소)되었고, 인조 6년(1628) 별시문과에 다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방(같은 종이에 기록된 합격자 발표)에 급제한 자들로부터 하례 인사를 받게 되었는데 머리털이 하얗게 센 한 급제자와 인사를 나눌 차례가 되었다. 인사를 치르고 난 노인 급제자는 얼굴을 들어 빤히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며 혼잣말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아하! 이제야 내 의문이 풀렸구나. 그러면 그렇지! 이런 장원급제 한 사람을 길러내고 난 뒤에야 내 차례가 돌아왔으니 내가 그 동안 번번이 낙제할 수밖에."
영문을 모르는 조석윤이 그 사연을 묻자 그 노인 급제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호남 사람인데 과거 보는 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이오.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올 때 진위 갈원에 이르면, 그날 밤 꿈에 한 아이를 보게 되고 그 해 과거는 영락없이 낙방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그 아이를 만나지 않으려고 숙소를 옮겨도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 미운 아이는 에누리 없이 나타났고 과거는 영락없이 낙방이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이번에 급제하게 되어 불행중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원을 만나고 보니 그 동안에 쌓였던 의문들이 한꺼번에 풀리게 되어 실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번번이 꿈속에 나타나던 그 아이가 바로 오늘의 장원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이 힘만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그저 묵묵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답니다."
조석윤이 진주 목사로 있을 때였다. 목사는 경상좌병사의 하관도 되므로 조석윤은 날마다 새벽이면 병사에게 안부 인사를 갔다. 새벽 문안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루어지니 도무지 귀찮은 점은 고사하고라도 매일매일 하는 접대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관의 귀찮은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느 날 병사가 이제 새벽 문안을 그만두라는 간청에 조석윤은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병사를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며 군명을 존중하기 때문이니 아무리 상관의 명이라 하더라도 들을 수 없습니다."
조석윤의 집은 금천 우파리에 있었으므로 노량진을 거쳐야 서울을 오가게 되어 있었다. 어느 해 여름날 이웃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급히 비보를 전하였다.
"지금 한강에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몰살하였는데 그 배에 대감의 자제가 탄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속히 사람을 시켜 시신을 찾아야 합니다."
조석윤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아이가 돌아올 날짜가 오늘인데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은 되네마는, 우리 아이는 풍랑으로 전복될 위험한 배에는 아마도 타지 않았을 것일세. 틀림없이 자네가 우리 아이를 잘못 본 것일 걸세."
그날 밤에 조석윤의 아들은 돌아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살아 돌아온 내력을 설명하였다.
"배를 막상 타고 보니 그 배엔 소가 많이 실려 있는데 바람은 세차게 불어 배가 흔들렸으므로 안전하게 갈지 의문이 들어 다시 내려서 배를 타고 오느라 이렇게 늦었습니다."
이 남다른 부자간의 믿음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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