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1. 예론이 당쟁으로
금관자 대신 쇠뿔로 된 관자를 한 재상 송시열
송시열(1607~1689)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 호는 우암이다.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꿈에,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소자를 성뢰라 하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사사하여 율곡의 학문을 간접적으로 전수받았으며, 또 주자의 저서를 많이 읽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청과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성을 나왔다. 지평 벼슬에 두번째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 진선, 집의, 승지, 찬선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며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효종과의 사이는 특별히 긴밀하여 모두들 한소열과 제갈량의 관계에 비유하였는데 불행하게도 효종이 죽자 효종과 의논하던 긴밀한 뜻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숙종 15년(1689)에 제주도로 귀양가는 도중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으니 이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그가 죽기 전날 밤에 백색의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또 그날 밤에 규성(이 별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함)이 땅에 떨어졌으며 붉은 기운이 지붕 위에까지 뻗쳤다고 그 고을 사람들이 전한다.
우암이 생전에 겪은 일인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양양 물치란 마을을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정립이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보니 그 집 기둥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씌어 있었다.
시장에 호랑이 나왔다는 거짓말도 세번째는 사람들이 믿기 마련 벌떼에 쏘일까 치마 걷어 쓴 것인데 지아비는 정조를 의심한다네
세상 공명이란 모두가 나무 기러기처럼 하찮은 것 웃고 떠드는 좌석에서도 항상 입조심은 해야 한다네
그런데 이 시의 윗구는 바로 썼는데 아래구는 거꾸로 붙여 있었다. 누구의 시냐고 주인에게 물으니, 이 시를 쓴 사람이 떠날 때 한 말이, 내년에 이 날이 돌아오면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어느 외서(유가: 경전 이외의 책)에 나타난 입조심의 출처는 이렇다.
어떤 해동 사람이 신비한 거북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거북이 하는 말이, 이 세상 나무를 다 불태워서 물을 끓인다 해도 나를 삶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한 도인이, '마른 뽕나무로 불을 때도 네가 죽지 않는단 말이냐'고 다그치자 거북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시인했다고 한다. 오늘 이 좌중에서 담소하는 여러분들도 이 거북 이야기에서 입조심하는 경계심을 배워야 한다.
화양동 초당에 매화나무가 많았는데 숙종 15년(1689) 봄에 다 말라죽었다가 1694년 봄에 다시 살아나 잎이 나고 꽃도 피었다고 한다. 우암은 재상을 지낸 신분인데도 금관자를 달지 않고 쇠뿔로 만든 관자를 달고 있었다. 문인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초야에 있으니 초야에 맞는 복색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문인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벼슬할 때는 왜 그리 하셨습니까?" 우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는 나의 위아래 옷이 맞지 않은 때문이었지. 그 때 나는 명주를 살 돈이 없어서 면포로써 관복을 만들었으니 면포에 금관자가 맞을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금관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하사하신 금관자를 받는 일은 예에 속한 일이므로 공손하게 받아서 망건에 달아 두었다가 사례가 끝난 뒤엔 즉시 떼어 낸 것이다." 우암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쇠뿔 관자를 쓰고 있더라. 언젠가 동월이 우리나라 풍속을 기록한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관자로써 신분을 구분하는 우리의 풍습을 비웃는 내용이었지."
그제야 문인들은 우암이 금관자를 쓰지 않고 쇠뿔 관자를 쓰는 까닭이 바로 중국의 제도를 옳게 본뜬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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