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1. 예론이 당쟁으로
늦팔자가 좋은 조계원
조계원(1592~1670)의 본관은 양주이고 자는 자장, 호는 약천이다. 인조 6년(1628)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 정언을 거쳐 1636년에 형조 정량이 되었는데,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의 명으로 소현세자가 명나라 정벌에 참전하게 되자 보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였다. 이 때 조계원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명하여 가죽주머니와 베주머니 하나씩을 빠짐없이 각자 준비하도록 하였다. 도대체 그 용도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지만 조계원은 무조건 시행하게 하였다. 세자 일행이 면과 청이 싸우는 접전지에 도착하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몸을 둘 만한 곳이 없어 모두들 당황해 할 뿐 대책이 없어 막연하였다. 그 때 조계원이 모든 베주머니에 흙을 담아 쌓게 하고 가죽 주머니로 물을 운반하여 그 위에 붓게 하니 물이 얼어붙어 훌륭한 성이 되었다. 덕분에 세자 일행은 화살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조계원은 집이 몹시도 가난하여 상툰 신흠의 사위가 된 뒤에 처가살이를 하면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처가에서 얻어먹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 천덕꾸러기가 되어 처갓집 노비들로부터 '돼지 조 생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온갖 수모를 받았다. 돼지처럼 많이 먹고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그러나 조계원만큼 늦팔자가 좋은 사람도 흔치 않다. 남보다 늦게 과거하여 벼슬이 정경의 지위에 올랐으며 70세를 넘게 살았다. 또 아들 5형제가 모두 출세하여 장남 진석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을 뿐 아니라 필법으로 이름을 얻었고, 차남 귀석은 감사를 지냈고 삼남 희석은 음보 (과거에 의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하는 벼슬)로 첨지중추부사를 하였고 사남 사석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오남 가석은 이조 참의를 하였다. 명문거족의 연안 이씨 신랑감을 마다하고 하필 가난한 서생 조계원을 사윗감으로 고집하여 선택한 신흠의 안목에 사람들을 탄복하였다. 연안 이씨도 문장과 절의로 이름을 얻었지만 50세를 념기지 못하고 일직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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