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학은 박노(1584~1643)의 종이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 심양에 갈 때 세자빈객으로 간주인 박노를 따라가 봉림대군의 시중을 많이 들었는데, 그 때 논학의 영리함이 봉림대군에게 인정되어 사랑을 받았다. 봉림대군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봉림은 논학을 시켜 아기의 사주를 보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점을 보고 돌아온 논학이 평소와는 달리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진 봉림대군이 몸이 달아서 점을 본 내용을 다그쳐 묻자 논학은 봉림을 귀를 빌려 귓속말로 보고하였다.
"아기가 앞으로 임금이 된답니다."
이 말에 깜짝 놀란 봉림이 논학에게 점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 것을 신신 당부하였음은 물론이다.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에 세자 소현이 죽자 자연 봉림이 세자에 오르고 왕위를 잇게 되어 결국 점괘대로 그 때의 아기는 뒤에 현종이 된다. 봉림이 등극하여 임금(효종)이 되자 지난날의 정을 잊지 않고 논학을 불러 무슨 벼슬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논학은 아무 벼슬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효종은 그에게 담비 가죽을 하사하였다. 논학은 술먹는 일로 낙을 삼았다. 돈이 떨어지면 하사 받은 담비 가죽을 잡히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을 마신 후엔 그것이 왕의 하사품임을 밝혀서 도로 찾곤 하였다.
심양에 있을 때의 일이다. 청나라에 귀순하여 부귀를 누리고 있는 정명수, 김돌의 처벌을 청나라에 강력히 요구하다가 도리어 청나라에서 사형된 정뇌경(1608~1639)을 구명하지 못한 책임을 주인 박노에게 돌려 비난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이번엔 의주 부윤 황일호(1588~1641)가 명과 청의 싸움에서 명나라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 청에 알려져 또 사형을 받게 되었다. 이날 박노의 무능함을 욕하던 관원들이 속수 무책으로 있자 논학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대신들의 앞에 나가 지난날 주인이 받은 수모를 앙갚음하였다.
"지난번에 우리 영감님이 필선(세자시강원의 정4품 벼슬. 정뇌경을 일컬음)을 구하지 못한다고 그렇게들 탓하더니 어찌하여 이 많은 나으리들께서 의주 부윤의 목숨 하나를 못 구한다지요?"
효종 2년(1651)에 청나라의 강요로 금안군의 딸을 공주로 속여 청나라 왕실로 시집 보내게 되었다. 이 때 논학이 배행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통역 정명수의 횡포가 심하였다. 이를 보고 참지 못한 논학은 공주의 가마 앞에 서서 공주의 명을 받아 정명수를 치니 정명수는 꼼짝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매를 맞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