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요망한 중 보우를 죽인 변협
변협(1528-1590)의 본관은 원주이고, 자는 화중, 호는 남호이며 명종 3년(1548)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파주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율곡 선생을 찾아가 '주역'과 '계몽'을 강론 받고 오묘한 진리를 홀로 터득한 것이 많았으며, 천문, 지리, 수학, 산학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매우 깊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의 10여 군을 순찰할 때에 눈에 한번 거치면 산천의 도리와 형세를 모두 알아 구도를 살피면서 지시를 하는데 돌 하나 개울 하나도 분명하여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또 일찍이 병영의 군부를 열람하는데 한번 보고서 그 이름을 죄다 기억을 하니 사람들이 신통하게 여겼다.
선조 17년 무렵에 천문을 관찰하며 태을을 추산해 보고는 자질에게 말하였다.
"10년을 못 가서 국가가 또 병란의 괴로움을 겪겠다" 이 말은 뒤에 모두 징험이 되었다.
변협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요망한 중 보우가 제주에 귀양오자 변협은 다른 사건을 가지고 곤장을 쳐서 죽이니 유림들이 통쾌하게 여겨 간혹 편지를 보내어 칭하하면 그때마다 말하였다.
"백성들 모두가 그를 처벌한 것이지 내가 처벌한 것이 아니다"
선조 25년에 왜적이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침입하였다. 선조가 신립을 보내어 막게 하였다. 떠나는 날 선조가 신립을 불러 보고 적이 어떠냐고 물으니 신립이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그러자 선조가 이르렀다.
"변협은 항상 왜적을 대적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였는데 경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
신립이 나간 뒤에 선조는 변협을 그리며 말하였다.
"변협은 참으로 훌륭한 장수였기에 내가 항상 잊지를 못한다. 그 사람이 있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왜적을 걱정하겠는가"
선조는 한탄하고 애석해 하기를 마지않았다. 열흘이 채 못 되어 신립이 패배하여 죽었는데 변협이 죽은 지 겨우 3년 만이었다. 이보다 앞서 을묘왜변 때에 변협이 해남군수로 있었는데 왜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여러 진과 각 고을이 잇달아 함락되어 호남이 크게 놀랐다. 변협은 혼자서 고을을 여유 있게 보전하면서 수비를 하는데 조금도 동요되는 기색이 없었고 여러 번 기묘한 전략을 세워 적을 막았다. 마침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요격하여 한 번의 교전에서 죽이고 사로잡은 왜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조선 개국 이래로 없었던 쾌거였다. 그리고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명나라 사람들을 귀국시키니 천자가 가상히 여겨 은과 비단을 상으로 주면서 칭찬하였다.
"현감 변협이 외로운 성을 지켜 홀로 보전하였다"
이때 변협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여섯 살 때에 달려가다가 깊은 우물 속에 떨어졌는데 우물 안의 돌을 부여잡고 물에 빠지지 않고 있다가 새벽에 이르러 이웃 사람이 물을 길러 온 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였다.
"나는 아무 집의 아이인데 큰 새끼줄을 가지고 오시오"
온 집안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변협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었다. 벼슬이 공조 판서에 이르렀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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