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고집쟁이 선비 최영경
최영경(1529-1590)의 본관은 화순이고,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이다. 처음 남명에게 배우기를 청할 적에 당시 국상중이었으므로 죽순을 예물로 바치고 와서 제자가 되었는데, 남명이 한번 보고 그를 특이하게 여겨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라고 마음을 허락하였다. 최영경은 청렴하고 깨끗함이 세상에서 제일이었다. 그는 의로운 일이 아니면 털끝만큼도 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가산을 기울여서 장례를 지냈으므로 마침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의 집이 성중에 있었으나 남과 교제하기를 일삼지 않아 그를 아는 자가 별로 없었고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쟁이 선비'라고 하였다. 안민학이 처음으로 방문하였다가 그 말을 듣고 그에게 특이한 점이 있음을 알고 성혼에게 말하였다.
"우리 마을에 특이한 인물이 있었는데도 몰랐다가 지금에야 서로 알았으니 어떻게 가서 보지 아니하겠소"
성혼이 성중에 들어와서 일부러 찾아가 문을 두들기니 한참만에 맨발의 어린 여종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뜰에는 방초가 가득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최영경이 나오는데 베옷에다 떨어진 신을 신은 궁색한 차림이기는 하지만 그 얼굴은 위엄이 있어 보이고 정중하여 남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기상이 있었다.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한 점의 속된 티가 없었으므로 성혼이 매우 좋아 하였다. 그가 물러 나와서 백인걸에게 말하였다.
"내가 아무개를 보고 돌아올 적에 홀연히 맑은 바람이 소매에 가득함을 깨달았다"
백인걸도 크게 놀라고 특이하게 여겼으며, 이때부터 그의 명성이 사림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러다가 선조 6년(1573)에 뛰어난 행실로 추천되어 6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 8년 뒤에 지평으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던 차 동왕 22년에일어난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조금 있다가 풀려났는데, 대간의 계달로 재차 체포되어 국문을 받다가 이듬해에 옥중에서 죽었다. 뒤에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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