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은 상진
상진(1493-1565)의 본관은 목천이고, 자는 기부, 호는 범허정이다.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년 뒤 문과에 급제하였다. 검열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농부가두 마리의 소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두 마리 중 어느 놈이 일을 더 잘 합니까?" 그 농부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고 상진의 귀에다 입을 바짝 대고 나직하게 말하였다. "저 짐승의 마음도 사람과 마찬가지여서 평가하는 말을 듣게 될 경우 잘한다고 하면 좋아하고 못한다고 하면 화를 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은 놈이 낫습니다" "귀하는 숨은 군자입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상진은 농부에게 사죄하고 이때부터 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한쪽 다리가 짧아 절뚝거리자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절뚝발이라고 하였지만 상진은 다르게 말했다. "그 사람의 짧은 다리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지만 한쪽 다리가 길어서 그렇다" 이와 같이 그는 평생토록 남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그가 젊었을 적에 점을 잘 치는 홍계관에게 점을 친 일이 있었다. 홍계관이 그때 그의 일생 동안의 길흉화복과 죽는 연월까지 알려 주었는데, 상진이 지나간 세월 속에 벌어졌던 일들이 홍계관의 말과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홍계관이 죽는다고 말한 그 해에 이르러 미리 수의를 준비하고 죽기를 기다렸지만 한 해가 지나도 죽지 않고 아무런 탈이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홍계관이 매우 이상히 여겨 상진을 찾아 뵙고 인사를 하니, 상진이 물었다.
"내가 자네의 점을 믿고 스스로 금년에 명이 다할 줄 알았는데 맞지 않는 것은 무슨 조화요?" "예전 사람이 남모르게 적선한 탓으로 수명을 연장한 이가 더러 있었는데 대감께서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겠는가마는 내가 수찬으로 있을 적에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바닥에 붉은 보자기가 하나 있기에 주워 보니 순금으로 된 술잔 한 쌍이었네. 그래서 그 보자기를 가만히 보관해 두고 방을 붙여 주인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주인에게 돌려준일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대전의 수랏간 별감이 마침 자질의 혼인이 있어 몰래 대궐 주방에 있는 금잔을 빌려 내왔다가 공교롭게도 길에서 잃어버린 것으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수없이 사죄하고 간 일이 있었네" "대감의 수면이 연장된 것은 바로 그런 일들 때문입니다"
상진은 15년 뒤에 죽었는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성안이다. 그는 타고난 기품이 넓고 커서 남의 장점과 단점을 말하지 않았다. 판서 오상이 시를 지었다.
복희와 황제의 음악과 풍속 이제 쓴 듯이 없어지고 단지 봄바람만 술잔 사이에 있도다
상진이 그 글을 보고서 어찌 말을 이렇게 각박하게 할까 하며 다시 고쳐 지었다.
복희와 황제의 음악과 풍속 아직도 남아 있으니 봄바람을 술잔 사이에서 얻어 볼 수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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