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정미사화를 빚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정언각
정언각(1498-1556)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근부이다. 진사 정희검의 아들이고 허암 정희량의 조카이다. 중종 11년(151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년 뒤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명종 2년(1547)에 정언각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그의 딸이 제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돌아가는데 전송하러 양재역을 지나다가 벽에 붙어 있는 불온물을 보니 이름은 숨긴 채 붉은 글씨로 씌어 있었다.
여자 임금(문정왕후를 가리킴)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은 밑에서 권력을 농락하니 국가가 망할 것은 서서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정언각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매우 즐거워하며 벽에 붙어 있은 글을 그대로 오려 가지고 대궐로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며 그것을 봉하여 올렸다.
"이것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임금을 원망하는 자들이 한 짓이다"
명종이 명을 내려 세 정승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삼정승인 윤인경, 이기, 정순봉이 아뢰었다.
"이 글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한 짓이 아닙니다. 지금 이 벽에 붙었던 글을 가지고 증거를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 올바르지 못한 논의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을사사화 때에 당연히 처벌받았어야 할 대상 인물들의 죄의 경중을 순서대로 적어 올렸다.
"지금 적어서 올리는 것은 이번 양재역의 벽에 붙어 있던 글을 보고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죄를 결정할 때에 가볍게 처벌하여 형률대로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논의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화근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입니다. 그러니 다시 죄를 정한다는 뜻을 교서로 만들어 중앙과 지방에 유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답을 내렸다.
"봉성군 원, 송인수, 이약빙은 사형에 처하고, 이언적, 정자, 이염은 먼 변방에 가두어 두며, 임형수, 노수신, 정황, 유희춘, 김난상은 먼 섬에다 가두어 두고, 권응정, 권응창, 정유침, 이천계, 권물, 이담, 한수, 안경우는 먼 지방에 부처하며, 권벌, 송희규, 백인걸, 이언침, 민기문,황박, 이홍남, 김진종, 윤강원, 조박, 안세형, 안함, 윤충원은 중도부 처하라"
그러자 정언각이 또 혼자서 아뢰었다.
"임형수는 윤임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의 심복으로 수족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윤원형을 죽여야 된다고 떠들어댔으니, 그가 윤임과 마음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단지 귀양만 보내는 것은 너무 가벼운 듯합니다" "양재역의 벽에 붙어 있는 글을 본 사람이 한 사람뿐만이 아닐 터인데 그대가 혼자 와서 아뢰었으니 신하로서의 도리에 당연하도다. 임형수는 죄는 같이 짓고 벌을 달리 가볍게 받았으므로 내가 매우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문정대비가 그를 칭찬하고 임형수에게 사약을 내려 자진하게 하였다. 향윤온이 윤임에 연좌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무렵 정언각이 전라 감사가 되어 양윤온이 죄인의 신분으로 관사에 드나든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잡아다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양윤온이 매를 못 이겨 죽었다. 뒤에 정언각이 경기 감사가 되어 말에서 떨어졌는데, 한쪽 발이 등자에 걸려 벗겨지지 않은 채 말이 마구 달렸으므로 머리통이 박살이 난데다 뼈가 부서지고 짓이겨져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통쾌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하늘이 무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정척이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가 되었으나 소인의 자식이라 하여 버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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