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소인이란 비난을 면치 못한 주초위왕의 주인공 남곤
남곤(1471-1527)의 본관은 의령이고, 자는 사화, 호는 지정이다. 고려 말엽에 참지문하를 지낸 남을진의 증손이다. 김종직에게 글을 배워 시문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크게 떨쳐 박은, 이행, 홍언충 등과 더불어 명망이 높았다. 금남 최보는 그를 인재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눈은 생김새가 특이하여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있고, 용모와 거동은 단정하고 아담하였다. 성종 25년(149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부제학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평안도 변방으로 귀양갔다. 중종 2년(1507)에 남곤이 상중에 있으면서 박경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죽게 하였으며, 그 공로로 이조 참판에 승진되고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정광필이 크게 기용할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여 그를 불러다 대사헌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조정과 재야에서 오래도록 분하게 여겼던 공론에 따라 현덕왕비의 위호를 회복시키는 내용의 글을 올려 왕의 윤허를 받기는 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여 대제학의 자리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당이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옛날부터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남곤의 문장은 버릴 수 없다"
마침내 남곤이 신용개를 대신하여 대제학이 되었다. 남곤은 한편으론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유감을 품었다. 그 무렵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남곤과 같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게 되었는데, 남곤이 조정의 의논을 회피하기 위해 능헌관이 되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일로 조광조가 그를 가볍게 보았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서울과 지방에 큰 지진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걱정이 되고 두려워하여 심기가 편치 않았다. 남곤이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태로운 말로 불안해하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여 몰래 사람을 시켜 대궐 동산에 있는 나뭇잎에다 꿀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네 글자를 쓰게하였는데, 동산의 벌레들이 꿀물이 묻은 부분을 갉아먹어 '주초위왕'이란 글자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큰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중종 14년(1519) 11월 15일에 이장곤, 홍경주, 고형산을 꾀어 초저녁에 대궐의 북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가 왕에게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비밀리에 아뢰어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모두 남곤이 주장한 것이었다. 그 뒤 중종은 정광필을 갈아치우고 남곤을 승진시켜 좌의정으로 삼고, 김전을 영의정으로, 이유청을 우의정으로 삼아 세 정승의 자리를 채웠다. 2년 뒤에 송사련의 옥사가 이루어지자 스스로 소장을 짓는데, 일부러 죄인을 다스리는 행정이 엄중하지 못한 것과 조정의 기강이 풀렸다는 몇 가지 조목을 거론하며 당인들을 얽어 모함하고 교묘하게 꾸며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반역에 동조하였다고 지목하여 되도록 엄중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적용하도록 힘을 써서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변론하거나 구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18년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5, 6년 사이에 그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이 서로 잇달아 죽게 되자 인심은 속이기 어려운 터라 공론이 저절로 과격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읽고 있던 남곤은 항상 불안하여 진나라 은호처럼 허공에 글씨를 쓰면서 근심을 품고즐거운 빛이 없었다.
"남들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냐?" 그가 친족들에게 묻자, 그들이 입을 모아 대답하였다. "반드시 소인이라는 비난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곤이 마침내 집안 사람을 시켜 자신이 평생 동안 쓴 문고를 가져다 모두 태워 버리게 하였는데 '유자광전'만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중종 22년 57세로 죽었는데, 시호는 문경이다. 선조 초에 그의 벼슬을 깎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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