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조정과 저자를 숙연하게 한 대사헌 최숙생
최숙생(1457-152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자진, 호는 고재이다. 성종 23년(14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중종 14년(1519)에 벼슬과 품계를 빼앗기고 관원의 명부에서 삭제되었으며 이듬해에 죽었다. 최숙생이 사헌부 대사헌이었을 적에 서울 사대문 안의 무당들을 모두 내쫓아 동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와 서활인서(도성의 의료기관)에 모이도록 명령을 내리고, 성남에 있는 비구니들이 사는 건물을 철거시켰으며, 불상을 헐어 버리고 중들이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집 가운데 규정을 위반하고 멋대로 지은 칸살은 철저히 수색하여 죄를 다스리는 동시에 위반한 칸살은 여지없이 철거시키는 등 무너진 기강을 다시 일으키는데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자 조정과 저자가 숙연해져 범법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그 무렵 이세정이 경서의 뜻을 연구하는 학문에는 정통하고 능숙하였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실패하였다.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힘써 이장곤, 성몽정, 김세필, 김안국, 김정국 등이 모두 그에게 배웠다. 이세정은 성품이 치밀하지 못하고 산만하며 옹졸하고 우직하여 재간이 없었으나, 같은 시기에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힘을 모아 조정에 추천하여 청양헌감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최숙생이 새로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이세정의 여러 제자들이 남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청양헌감에 대하여 넌지시 부탁하였다.
"우리 스승에게는 학문과 깨끗한 지조가 있으니 조심스럽게 대하고 고과를 함부로 깎아 내리지 마시오" "그렇게 하겠소"
최숙생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러나 최숙생이 충청 감영에 도착하자마자 청양현감을 근무평점을 꼴지로 매겨 파직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뒤 최숙생이 갈려서 중앙으로 돌아오자 김정국 등 세 사람이 최숙생을 찾아가 따졌다.
"충청도 한 도 안에 교활한 관리로 주민을 해롭게 하는 자가 그렇게도 없어서 하필이면 조세징수 실적이 부진한 자의 고과에 꼴지를 매겼단 말이오. 당신의 성적 고과가 잘못된 것 아니오?" "다른 고을 수령의 경우는 비록 교활하다 하더라도 도적은 제 하나 뿐에 불과하므로 주민들이 오히려 견뎌 낼 수 있소. 청양현감 자신은 비록 깨끗하긴 하지만 통제불능의 큰 도적인 고을의 여섯 아전이 그 밑에 있으니 주민들이 견딜 수가 없소. 그리고 또 뱃속이 텅빈 사람이 어떻게 한 고을을 다스리겠소?" "스승님의 뱃속에는 육경이 꽉 차 있는데 어찌하여 텅비었다고 말하시오?"
김정국이 묻자 최숙생이 대답하였다.
"당신들이 스승 뱃속의 육경을 모두 가져다 나누어 자신들의 창자와 뱃속에다 가득 채워 가지고 그것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출세를 하였으니, 당신 스승의 배가 아무리 크더라도 거기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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