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일컬어진 김구
김구(1488-1534)의 본관은 광주이고, 자는 대유, 호는 자암이다. 예조 판서 김예몽의 증손이다. 16세에 한성시에 장원하고, 중종 2년(1507)에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동왕 8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 때에 부제학으로서 개령으로 귀양갔다가 남해로 옮겨 섬 속에서 13년을 지내는 동안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중종 26년에 임피로 옮겼다가 동왕 28년에 석방되자, 예산으로 달려가서 부모의 분묘에서 곡하고 추모의 정을 펴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분묘에 올라 눈물을 흘리니, 그 자리에 있던 풀과 나무가 다 말라 버렸다. 그로 인해 병이 들어 1년 만에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김안국이 소싯적에 생원, 진사의 회시에 모두 장원이 되었는데, 방을 발표할 때에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여 진사는 2등이 되니, 평생 그것을 한으로 여겼다. 김안국이 시관이었을 때 김구가 생원, 진사시에 모두 장원이 되자, 모든 시관이 "한 사람이 두 장원이 될 수 없다" 하였지만, 김안국이 분연히 말하였다. "왕희지의 글씨와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김구는 드디어 두 장원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그 이듬해인 중종 15년(1520) 봄에 김구의 부인이 말 한 필에 짐 한 바리를 싣고 종 5, 6명을 데리고 김구의 적소를 따라갔다. 그때 김식이 도망 중이어서 현상을 걸고 그를 체포하는 영이 매우 엄하여, 갈림길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지키며 여행자는 모두 수색 검문한 뒤에야 보냈다. 경상감사 반석평이 노상에서 한 부인의 행차가 붙잡혀서 가지 못하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양곡을 주고 또 감영의 소속 아전을 시켜 그 일행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김구는 마침내 죽림에 집을 짓고 살았다. 김구는 문장이 기이하고 필력이 굳세어서, 위의 종유와 진의 왕희지의 필법을 사모하여 본받았다. 중국 사람이 자기 글씨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들은 뒤로 글씨를 쓰지 않아서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김구의 필법을 '인수체'라 했으니, 이것은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다.
김구가 한번은 옥당에 당직하고 있을 때이다. 달밤에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나가 보았더니, 임금이 걸어서 옥당까지 오고 별감이 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김구가 종종 걸음으로 나가 엎드리자 임금이 말했다.
"달이 이처럼 밝으므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내가 이곳에 이르렀다. 어찌 임금과 신하의 예로 대하랴. 마땅히 벗으로 서로 대해야 한다"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문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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