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평생 김종직을 미워하며 옛 원한을 앙갚음한 유자광
유자광(1441-1468)의 본관은 영광이고, 자는 우복이다. 부윤 유규의 서자이다. 날쌔고 힘이 세며 어려서부터 무뢰한 행동을 잘 하여 유규가 그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근본이 미천한데다가 방종하고 패악스러웠다. 애초부터 갑사 무리에 속해 있었는데, 임금에게 상소를 하여 스스로를 천거하자 세조가 그 기개를 장하게 여겨 그를 발탁하여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세조 14년(1468)에 문과에 장원하고, 또 남이가 역모한다고 고발한 공으로 훈작을 받아 무령군에 봉해져서 1품에 뛰어올랐다. 천성이 음흉하고 잔악하였다. 한명회의 왕성한 활약을 시기하고, 또 성종이 간언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소를 올려 한명회가 권세를 휘두르는 정상을 고자질하였는데, 성종이 그것을 죄주지 않았다. 뒤에 임사홍, 박효원 등과 현석규를 모함하려다가 모의가 실패하여 동래로 귀양갔다.
한번은 함양에 놀러 갔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판에 새겨 걸어 두었다. 그 뒤 김종직이 이 고을의 군수로 와서는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 시를 판에 새겨 건단 말인가" 하고는 화를 내며 떼내어 불태워 버리니 유자광이 분히 여기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감종직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융숭하던 때라 도리어 교분을 맺었고, 그가 죽자 만사를 지어 애도하면서 당나라 한유와 수나라 왕통에 견주었다. 김일손이 김종직에게 수업했는데, 소를 올려 이극돈을 논박하였다. 사국(사관이 사초를 꾸미는 곳)을 열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이 되어 김일손의 사초를 발견하고는 유자광과 함께 노사신, 윤필상을 찾아가 밀고를 기약하고 밤낮으로 죄안을 짜내어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무릇 김종직의 글을 간직한 사람은 모두 자수하게 하여 빈청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각 도의 관청에 걸려 있는 현판을 모두 뜯어버리게 함으로써 함양 관청의 옛 원한을 보복하였다. 중종반정 후, 유자광이 훈적에 기록되었다. 얼마 못 가 대간이 번갈아 소를 올려 탄핵하니 드디어 귀양을 갔는데, 두 눈이 전부 어두워진 지 수년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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