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연산군의 청혼을 거절하여 죽은 홍귀달
홍귀달(1438-1504)의 본관은 부계이고, 자는 겸선이며 호는 허백당이다. 대대로 함창에 살았다. 세조 8년(1462)에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호당(독서당)의 벼슬과 이조 판서.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가 일어나던 해에 10여 조목의 상소를 올렸는데, 모두 궁궐의 비밀스런 일이었다. 반복하여 넌지시 풍자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 연산군은 마음이 편치 않아 그의 벼슬을 빼앗고 경원으로 유배하였다.
"나는 본시 함창의 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 모든 것이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성공해도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실패해도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다만 옛날로 돌아왔을 뿐이다. 다시 무엇을 한탄하랴"
홍귀달은 가족과 헤어질 때 담담히 말하고 길을 떠났다. 얼마 뒤에 체포 명령이 내려져 의금부로 압송되어 오던 중 단천에 이르렀는데, 왕명을 받은 관리가 달려와서 책 한 권을 주었다. 홍귀달이 펴 보고 재배하며 말하였다.
"주상이 신에게 죽으라고 명하신다"
그는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조용히 목매어 죽었다. 중종이 반정한 뒤에 문광이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언필, 현감 언승, 문과 박사 언방, 교리 언충, 참봉 언국이다. 언방에게는 얼굴이 예쁜 딸이 있었는데, 연산군이 왕자빈을 간택할 적에 위협하여 빈으로 들이려 하였다. 홍귀달이 그 말을 따르지 않자 마침내 유배하여 사사하였고, 아들 언방도 배소에서 죽었다. 언충이 갑자사화를 당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 들것에 들려 감옥 담안에서 조금 쉬고 있는데, 그의 벗이 옷에 흥건히 묻은 피를 보고는 "너무 참혹하구나" 하며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홍문관의 물에 젖은 것이다" 언충은 유유히 이렇게 대답했다. 홍문관의 홍자는 붉을 홍의 홍자와 음이 같고, 핏빛이 붉기 때문에 그렇게 운운한 것이었다. 진보에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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