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기건(?-1460)의 본관은 행주이고, 집이 청파동 만리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청파라 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보니 백성들은 전복을 따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언덕이나 구릉에 갖다 버렸다. 이를 본 기건은 고을 사람들에게 관을 짜고 장례 치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제주도 사람이 부모 장례를 치를 줄 알게 된 것은 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기건이 꿈을 꾸었는데,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 앞에 와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뼈다귀를 거두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금년에 공은 반드시 어진 자손을 둘 것입니다"
과연 그 해에 손자를 낳았으며,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가 되었다. 그 뒤로 기씨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그 꿈이 맞은 것이다. 그의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단종조에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람을 일체 사절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나 기건은 자기의 눈이 청맹과니라고 핑계하였다. 세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침을 들고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끝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 나라 풍습에 부인들이 외출할 적에 너울을 쓰지 않았는데 기건이 처음으로 너울을 만들어서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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