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군자는 때에 따라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소한 조상치
조상치의 본관은 창녕, 자는 자경, 호는 정재, 또는 단고이다. 세종 원년(1419)에 생원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하여 부제학이 되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하여 들어가서 축하 인사를 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바로 군자가 경계할 일입니다"
세조는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허락하였다. 세조는 그를 예조 참의에 승진시켜 벼슬을 내렸지만 그가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입궐하여 인사하지 않고 곧바로 동대문 밖으로 나갔다. 박팽년이 그에게 "가신 길 바라보니 우뚝하여 따를 수 없네"라는 편지를 썼다. 성삼문이 그에게 편지하기를 "영천의 맑은 바람이 동방의 기수 영수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 선생의 죄인이다" 하였다. 영천으로 돌아온 조상치는 서쪽을 향하여 앉는 일이 없었으며, 단종의 '자규사'를 보고 동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는 시를 썼다.
소쩍소쩍 달 뜨는 저녁 산속에서 무엇을 호소하나 뻐꾹뻐꾹 파잠을 바라보고 날아서 건너고 싶어라 다른 새들 옹기종기 둥지에 모였는데 너 홀로 꽃가지를 향해 피를 토하고 있구나 쓸쓸한 얼굴에 초췌한 모습 즐겨 숭배하지 않고 누구를 돌아보는가 아! 인간의 원한이 어찌 나뿐이랴 충신과 의사의 가슴속의 불평이 손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단종이 죽자 사람 만나기를 일체 사절하여 식구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그는 밤마다 홀로 앉아 잠도 자지 않고 슬피 울었다. 그는 못난 돌을 구해다가 면을 다듬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면에다 "노산군 조정 부제학 도망자 조상치의 무덤"이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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