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한 성삼문
성삼문(1418-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 호는 매죽당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으로부터 아기를 낳았느냐는 물음이 세 번 이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29년(1447) 중시에 장원하였다. 문종이 동궁 시절에 학문에 힘써서 매달 달 밝은 밤이면 손에 책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가서 글을 물었으므로 성삼문은 의관을 벗지 못하고 지냈다. 어느 날 밤중에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발 소리가 들려 와서 나가 보니 문종이었다.
을해년(1455)에 단종이 선위하였을 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세조 2년에 중국 사신을 맞는 잔칫날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거사 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성삼문은 운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낌새를 챈 김질이 밀고하여 사건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삼문을 불러서 세 번 심문하니 웃으면서 그 말이 다 맞다고 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나를 배반하느냐?"
세조가 물으니 삼문이 소리를 질러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을 복위하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배반이오?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소?" "너는 나의 녹을 먹으면서 나를 배신하였으니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상왕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하로 여깁니까? 나는 녹을 먹지 않았으니 우리 집을 몰수하여 계산하시오"
단근질을 당하였으나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신숙주를 돌아보면서 질책하였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적에 세종 임금이 원손을 안고 뜰을 산보 하시면서 우리들을 돌아보시고 '천추만세 후에 경들은 이 아이를 잘 보호하라'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는 잊었단 말이냐?" 신숙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희안을 신문하였으나 불복하자 세조가 다시 삼문에게 물었다.
"강희안도 함께 모의하였느냐?" 삼문이 대답하였다. "그는 우리의 모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름 있는 선비를 다 죽이지 말고 남겨 두고 쓰십시오"
이 때문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였다. 삼문은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자네들은 어진 임금을 잘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살게나. 나는 지하에 들어가 우리 임금을 만나겠네"
죽은 뒤에 그 집을 몰수하고 보니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받은 봉록을 한 방에 고스란히 모아 놓고 각각 어느 달 봉록이라고 써 놓았다. 집에 변변한 살림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침실에 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이 남긴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북소리는 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해는 뉘엿뉘엿 지려고 하네 황천에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 저녁엔 뉘 집에서 잘꼬
성삼문이 중국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가리개에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그림을 보지 않고 먼저 두 구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 수묵도였다.
눈같이 흰 옷에 옥 같은 발뒤꿈치 연못 속 물고기를 얼마나 엿보았느냐 우연히 날아서 산음현을 지나다가 왕희지의 벼루 씻는 연못에 추락하였나
시를 본 그 사람은 매우 감탄하였다.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이 성삼문의 시체를 수습하여 노량진 아차현 남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성삼문이 언젠가 중국에 들어가서 백이, 숙제의 묘 옆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붙였는데, 비석에서 땀이 흘렀다고 한다.
말고삐 잡고 감히 잘못을 간했으니 그 충의 당당하여 햇빛처럼 빛나네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 먹고 자랐거늘 수양산 고사리는 어느 나라 고사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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