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8장 화려항 명성, 처참한 최후
운명이 바뀐 피의 일요일 - 니콜라이 2세 / 레닌
로마노프왕조의 최후와 니콜라이 2세
니콜라이 로마노프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가 죽자 스물 여섯 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1894년 11월 1일 오후 2시 30분.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자 절대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기뻐하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내게 어떤 일이 닥쳐올까요. 러시아는 장차 어떻게 될까요. 나는 황제가 될 준비를 하지 못했어요. 나는 황제가 되길 원하지 않았어요. 나는 통치하는 일을 전혀 몰라요. 그는 국장을 치른 뒤 일 주일이 지나서 알릭스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알릭스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며, 독일의 공주였다. 결혼식에 앞서 루터파 신자인 공주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였고 러시아의 세례명도 받았다. 공주도 어떤 불행을 예감한 듯 이날의 일을 일기에 이렇게 써 두었다. 내게는 우리의 결혼식이 마치 장례미사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검은 드레스가 아니라 흰 드레스를 입었다는 것 뿐이었다. 황제의 대관식 축하행사는 굉장하였다. 모스크바 호딘카 연병장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음식과 맥주가 배급되었다. 약 50만 명 정도가 새벽까지 흥겹게 놀았다. 그러다가 이른 아침 음식이 부족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중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줄을 쳐놓고 음식을 나누어 주는 가건물을 습격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밟혀 죽었다. 불길한 예고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영토확장을 위해 페르시아, 터키 등과 전쟁을 치뤄 기존의 거대한 국토에다 새로운 영토를 더했다. 1880년대에는 러시아의 국토가 지구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였고 러시아 제국의 인구는 1억 2천5백만 명이 넘었다. 이렇게 방대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니콜라이에게 벅찬 일이었다. 그는 결단력이 부족한 통치자였다. 니콜라이는 러시아가 겉보기와는 달리 그 기반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산업이 꾸준히 발전되고 있다는 관리들의 거짓 보고에 그저 만족하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톨스토이로부터 그는 편지를 받는다. 러시아 사람들은 가혹한 학정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과 황제의 대신들은 위기를 맞은 통치자를 돕는데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만약 황제가 백성들의 바램을 계속 외면하고 부호들에 의해 독점된 토지를 재분배하지 않으면 혁명이 불가피하게 될 것 이라는 것도 경고했다. 1905년 1월 22일 아침 3만 명의 군중들이 동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페테스부르크의 노동자들은 공정한 대우를 위해 황제에게 탄원하려고 무기도 들지 않고 일요일이라 좋은 옷을 입고 성상과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를 들고 동궁으로 향하는데, 군인들은 즉각 발포를 시작했다.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200명의 노동자가 죽었으며 800명이 부상 당하는 이 참사를 역사는 피의 일요일 이라 부른다. 니콜라이의 동궁은 바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계속되는 파업, 농민들의 봉기, 군인들의 반란에 직면해서도 니콜라이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일부는 때늦은 대책이었을 뿐이라고 한다.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하여 일어난 대규모의 총파업이 온 나라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가 소비에트(노동자 농민평의회) 를 구성했다. 트로츠키는 황제를 의지도 없고, 목적도 없고, 상상력도 없는 이 마법사는 고대와 현대 역사의 어느 폭군보다 더 지독하다 고 혹평했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는 러시아말로 다수 를 뜻하는데 이 정당의 명칭은 레닌이 득표에서 많은 표를 획득했을 때 붙여졌다. 레닌은 이 정당을 통해서 황제의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사상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1905년 정치적 위기에 놓인 니콜라이는 할 수 없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한다는 내용의 10월 선언 을 발표했다.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 뒤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자 영국이 분노했고, 독일이 중립국 선박을 공격하자 미국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편을 들기 위해 참전했다. 이로써 유럽 국가간의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독일군은 수송과 통신면에서 모두 우수했다. 러시아는 25만 명의 병사를 전사 또는 부상으로 잃었다. 한편 왕실에서는 알렉산드라가 네 명의 딸을 낳은 뒤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황태자는 혈우병을 갖고 태어났다. 알렉산드라는 황제가 될 아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가짜 성자인 라스푸틴에게도 매달렸다. 그는 왕실을 믿고 권력을 남용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계속 실패하고 있는 동안 라스푸틴은 1년에 국방대신, 농무대신을 7명이나 갈아치우는 등 국가의 내정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에 분노한 보수파 당원이 그를 암살해 버렸다. 황제는 혁명세력의 수중에 놓여지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양위하기로 했다. 3월 15일, 그는 담담하게 사무적으로 퇴위성명에 서명했다. 이로써 304년간의 로마노프 왕조는 갑작스럽게 끝장이 나버렸다. 그의 가족들은 극비리에 어느 조용한 곳으로 옮겨졌다. 1918년 4월,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저택으로 이송된다. 우랄지역 소비에트의 감시하에 놓여 있는 그들 황족에게는 사생활이 허용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공산당은 적러시아, 황제 지지파는 백러시아라 불렸는데, 백러시아 군대가 황족을 구출하려고 한다는 보고를 받은 레닌은 비밀경찰 지역 책임자인 유로프스키에게 황족과 하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유로프스키는 7월 18일 새벽 2시에 황족을 깨웠다. 전진해 오는 백러시아 군대를 피해 철수해야 하니 어서 옷을 입으라고 서둘렀다. 황족과 하인은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1층의 작은 방안에 모여 있었다. 유로프스키는 트럭 엔진소리를 효과음으로 틀어놓고 병사들을 데리고 그 방으로 들어가서, 겁먹은 니콜라이에게 다가가 지역 소비에트이 명령으로 그와 가족은 총살한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가 벌떡 일어나 뭐냐? 하고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로프스키는 권총으로 황제의 머리를 쏘았다. 그의 부하들은 나머지 가족과 하인들에게 발포했다. 약 20분 동안 총탄을 난사하였다. 어찌나 빈틈없이 총을 발사했는지 공주들이 입고 있던 코르셋에 박힌 보석들이 산산조각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십자가를 그리며 죽어갔다. 병사들은 시체를 트럭에 싣고 광산으로 가져갔다. 시체를 토막낸 뒤 거기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런 다음 타고 남은 유골 위에 다시 황산을 부었다. 로마노프 황족과 하인들의 유해라고도 할 수 없는 나머지를 광산 갱 아래로 쳐넣어 버렸다. 일주일 뒤, 황족을 구출하려는 군대가 에카테린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는 굶어서 죽어가는 알렉세이의 개 한 마리만 발견되었을 뿐. 이것이 로마노프 왕조의 최후였다.
불꽃 같이 산 혁명가 레닌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죽은 날은 1918년 7월 18일이었고, 레닌이 권좌에 앉은 날은 1918년 7월 10일이었다. 그는 원수가 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초대 헌법을 공포하였다. 여기까지 오기에는 28년이란 세월의 노고가 뒤따랐다. 이제 정점에 막 도달했는데 레닌의 몸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창백한 안색과 움푹패인 눈 둘레, 뇌 전체가 동맥경화에 침범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1870년 4월 22일 심비리스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형 알렉산드르가 러시아 전제군주를 암살하려다가 들켜서 처형당한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형이 읽던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그도 읽기 시작했다. 1891년에는 페테스브르크대학 법학과에서 전과목 우등생으로 졸업한다. 이 시기에 레닌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혁명을 주도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그는 <이스크라(불꽃이라는 뜻)>라는 지하 신문을 만들었다. 그 뒤 1905년 러시아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레닌은 숨어서 글만 쓰고 있었다. 10월 중순 당이 무장봉기하여 카렌스키 정부를 무너뜨리자 드디어 레닌이 새 정부의 의장이 된다. 1921년 말부터 레닌은 뇌동맥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1918년 카플란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후유증도 있었다. 1922년 4월 외과의들은 레닌의 몸 속에 박혀 있는 두 개의 탄환중 하나밖에 뽑아내지 못했다. 그 이상의 수술은 레닌의 용태로 보아 무리였기 때문이다. 1917년 모스크바 근교의 미켈손 공장에서 모임이 끝났을 때 레닌은 판야카플란이라는 사회혁명당의 여자 투사가 쏜 두 발의 탄환을 어깨와 가슴에 맞았는데, 5년을 끈 것은 그가 수술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 있었기 때문이다. 두통이 심해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구토와 복부의 통증, 가끔 생기는 언어장애의 증세를 보고 독일 전문의 폴터 교수는 심상치 않은 때가 온 것임을 예감했다. 1922년 5월 26일, 레닌은 뇌졸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졌다. 혈괴가 동맥을 막은 혈전증이다. 세 번째의 뇌졸중, 이번에야말로 언어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인한 이마를 가진 레닌은 식물인간으로 8개월을 살다가 네 번째의 뇌졸중으로 1921년 1월 21일 모스크바 근처 고르키에서 사망했다. 권좌에 앉은 지 겨우 5년,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들의 삶에는 그토록 잔인한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럽지 않다. 우리 세대는 놀랄만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일을 성취했으니까. 우리가 처한 조건에서 불가피했던 모든 잔혹한 일은 결국 이해되고 변호될 것이다. 모든 것이. 이것은 레닌이 마지막 투병기간에 절친한 친구 막심 고리키와 혁명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면서 남긴 말인데, 그대로 그의 묘비명이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