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7장 떠도는 자의 노래
녹색 지팡이와 톨스토이
톨스토이 [Tolstoy, Aleksey Konstantinovich, Graf] 1817. 9. 5(구력 8. 24) 상트페테르부르크~1875. 10. 10(구력 9. 28) 러시아 크라스니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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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가 죽은 지 15년이 지난 후,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서적, 특히 문학서적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은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러나 어찌 러시아 문학사에 그만이 홀로 존재한단 말인가. 중국의 이백과 두보처럼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와 쌍벽으로 꼽힌다.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4년 먼저 태어났고 19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1910년 10월 28일 새벽 3시, 가을 밤의 어둠을 틈타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리야나의 집을 나섰다. 자기가 태어나고, 또 평생의 대부분을 보낸 집이었다. 이 가출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톨스토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괴로운 생활을 강요하는 아내로부터 도망해 나왔다고 말하면 간단할 것이다. 아니면 가족의 비교적 사치스런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세상을 떠나 농부와 노동자들 틈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것은 그의 딸 타티야나가 쓴 <딸이 본 톨스토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이다. 톨스토이는 83세가 되던 해, 그러니까 죽기 열흘 전인 10월 28일, 미명에 집을 나섰다. 내가 생활해 온 사치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오. 그래서 나는 나이 많은 늙은이들이 잘하는 식으로 떠나가려오.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그는 작업복 차림에 망토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가진 것이라곤 평생 써온 펜과 종이가 전부였다. 정부로부터 받은 백작작위, 세계적인 명성, 훌륭한 저택, 막대한 재산, 이런 것들은 그와 상관이 없었다. 그의 아내 소냐는 28일 아침, 남편의 쪽지를 보자 밖으로 뛰어나가 연못에 몸을 던졌다. 즉시 구출되기는 했으나, 전에도 몇 번 자살소동을 벌인 일이 있으므로 가족들이 감시하자 이번에는 굶어서 죽어버리겠다고 소란을 피웠다. 톨스토이는 우선 오프타 수도원으로 가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쌰마루디노 수도원으로 갔다. 거기서 수녀가 된 여동생 마리아를 만났다. 그는 마지막이 될 것임을 말하고 동생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친 채, 우랄산맥을 넘어가는 3등 객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도 없는 여행길이었다. 10월 하순의 날씨는 음울하고도 몹시 찼다. 추운 객차 안에서 톨스토이의 몸은 감기로 불덩어리가 되었다. 기차가 멈추어 선 곳은 아스타포브의 작은 역이었다. 이 빈사 상태에 빠진 노인은 조그마한 역사 안으로 옮겨졌다. 역장의 침대에 누워 떨리는 손으로 그는 또 마지막 일기를 쓴다.
바로 이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다. 이것은 선을 위한 전부이고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며칠 동안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처음부터 동행한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의사인 친구 듀산이 서둘러 집에 연락을 취하고 강심제를 놓는 등 많은 애를 써서 응급한 상황을 돌려놓았다. 전보를 받고 가족들은 그곳으로 달려왔다. 톨스토이는 그것도 모르고 야스나야에 전보를 쳐서 아내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세상에는 레프 톨스토이말고도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은 레프 한 사람만을 돌보고 있어.
마지막 말이 아주 작아지더니 톨스토이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11월 6일, 숨지기 전날 밤 그는 곁에 있던 세료자를 불렀다.
나는 진리를 사랑한다 대단히 진리를 사랑한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다시 혼수에 빠져들었다. 1910년 11월 7일, 새벽이 되자 약하던 그의 맥박이 갑자기 거칠게 뛰었다. 그리고는 숨을 한번 크게 몰아 쉬더니 그게 끝이었다. 오전 6시 5분의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한 사람이었다.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단적인 그의 내부에서는 예술가, 사상가, 도덕가, 향락가 그리고 귀족과 무정부주의자가 항상 공존, 대립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싸우는 야곱과 타락한 천사가 한몸에 들어 있는 듯, 그는 어떤 때는 지킬 박사이기도 하고 또 파우스트 교수이기도 하였다. 육체와 정신이 똑같이 과격한 요구를 내세워 비장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귀공자로서 사치와 도박과 타락한 생활을 일삼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의 지나온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새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된다. 귀족생활을 버리고, 그는 농부가 되었다. 땅을 갈고 학교를 세우며 농노 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실천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은 하나도 빠짐없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유언장을 작성한다. 추운 겨울, 비록 초라한 시골역 관사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으나 그는 행복의 땅에 묻혔다. 초록색 지팡이 가 있는 참피나무 숲 속, 그의 형 니콜라이가 잠들고 있는 그 옆에 가서 묻혔다. 그는 나이 여든이 되던 어느 날, 일기에 이렇게 쓴 일이 있었다.
나는 얼마 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죽기 전에 나의 소원을 여기에 적어 둔다. (생략) 내 시체를 땅에 묻을 때에는 의식(장례식)을 하지 말라.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나무로 만든 관에 내 시체를 넣어 야스나야 풀리야나 숲 속의 녹색 지팡이 가 있는 곳에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
모스코바 근처 뚜라시의 야스나야 풀리야나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어린 형제들, 니콜라이, 세르게이, 드미트리와 함께 숲 속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때 큰 형 니콜라이가 물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니?
셋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사실은 녹색의 지팡이에다 주문을 써서 숲 속에 파 묻었거든. 누구든지 그 녹색 지팡이를 찾아내면 돼. 그 지팡이를 발견한 사람은 그 소유자가 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단다.
아이들은 녹색 지팡이를 찾으려고 날이 저물 때까지 숲속을 뛰어 다니면서 정신없이 뒤졌다.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이 날의 일을 잊지 않고 살았다. 그가 <부활>을 탈고했을 때는 일흔두 살이었다. 러시아 아카데미의 명예회원이 되고, 노벨상 수상이 결정되었지만 대중과 함께 받을 수 없는 상을 혼자만 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상마저 그는 거절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며 때론 성자처럼 떠받들기도 했다.
나는 성인이 아닙니다. 성인인 척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질질 끌려가기가 일쑤요(생략). 나는 정말 약한 한 인간으로서 악덕의 습관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의 신을 섬기려 하면서 언제나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만일 나를 잘못한 일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저지른 과실은 모두 거짓이나 위선으로 보인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를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그것이 사실 나의 본 모습입니다.
막심고리키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구나 라고.
그의 마음속에는 정말 미움도, 전쟁도, 슬픔도, 질병도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게 한다는 바로 그 녹색 지팡이 가 꽂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녹색 지팡이 는 그에게 있어 고양된 영혼, 아니 하나의 양심, 아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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