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5부 왕권과 여권
사련의 종말 -진성 여왕
나라 안은 술렁거렸다. 정강왕이 보위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이찬 김준홍을 시중으로 삼고 정사를 다스려 보려 하였으나 그해는 어찌된 셈인지 한재가 심하고 흉년이 들었다. 이듬해(887년) 정월에 왕은 황룡사에 백고좌를 베풀고 친히 행차하여 청강했으나 나라 안은 계속 흉흉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뿐이랴. 한주 외에는 왕에게 반기를 드는 무리가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거듭된 한재와 심한 흉년은 백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족했다. 흉년의 책임은 하늘이나 시중 이찬(일등 관명)들이 뒤집어쓰는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라의 어버이인 왕이 도맡아야 했다. "하늘이시어....... 이몸에게 힘을 주소서, 힘을." 왕은 그런 기도 속에서 병환이 든 것이었다. 5월의 화창한 봄날에 궁성 안은 검은 구름이 끼었다. 시중 김준흥은 중태에 빠진 왕 앞에 무릎은 꿇었다. "모반을 획책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으니 마마께서는 어서 힘을 내소서." 그러나 정강왕은 힘은커녕 오히려 유언을 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 나는 병이 심하므로 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소." "아니옵니다, 마마." "나는 아다시피 사자가 없는 몸. 허지만 누이동생 만은 천자 명예하고 골상이 장부 같으니 경은 내가 쓰러진 뒤에 만을 세워 왕위에 오르도록 하오." 그로부터 두 달 뒤인 7월 5일, 왕은 보위에 오른지 만 일년 만에 허망하게 승하했던 것이다. 정강왕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듣고 백성들은 슬픔에 잠기기보다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빠져 버렸다. 전왕 헌간왕도 7월 5일에 타계하고 말았으니 이 무슨 액운이냐는 것이었다. 20년의 수를 누리는 임금도 많은데 기껏 2년이란 짧은 재위 기간에 대를 이을 자리 하나 없이 돌아가시다니,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는 생각들이었다.
정강왕의 유언대로 왕의 누이동생 만이 제 50대 왕위에 올랐다. 여왕마마, 진성왕이 신라의 주군이 된 것이다. 여왕은 바람둥이였다. 각간 위홍은 여왕의 좋은 밤 친구였다. 위홍이 여왕의 침전에 드러누워 있다시피 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졌다. 주군이 밤낮으로 색정에 젖어서 정사를 게을리하자 변방을 지키는 신라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백제가, 그리고 북쪽에서는 고구려가 허약한 여왕 천하를 자주 침공해 왔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경선 변방 땅의 수비보다도 궁궐 안의 풍기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그 위홍이라는 자는 여왕 전하의 유모하고 무슨 인연이 있다면서........?" "바로 유모의 남편이라는 게야." "그렇다면 여왕마마께서는 유모의 남편을 데리고 산다?" "쉬이! 누가 들으면 목이 달아나네." 여왕의 유모는 부호였다. 부호는 남편인 위홍이 여왕과 내통했다는 소문을 듣고 설마 그러려니 했다. '친딸처럼 젖을 물려 키운 만이 그럴 리야.' 위홍이란 자는 그러니까 나이가 여왕의 아버지 뻘이나 되는 셈이었으나, 까짓거 나이 같은 건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이는 여왕보다 훨씬 많아도 남성적인 정력에는 자신이 있었던 모양인가. 여왕은 한번 위홍과 인연을 맺은 뒤부터 그를 남편처럼 받들게 되었고, 위홍 자신도 어엿한 남편 행세를 하여 궁중 안에서 세도가 당당했다. 여왕의 신임을 사서 국정을 좌지우지한 사람은 위홍만이 아니었다. 위홍의 아내, 여왕의 유모인 부호가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남편을 빼앗긴 몸이 무슨 낙으로 살랴, 기왕지사 지엄하신 여왕의 그늘 밑에서 살게 된 몸, 세도나 당당하게 부려 보구 살리라.' 부호의 그러한 계산은 부호로 하여금 남편인 위홍 못지않은 세도를 궁중에서 부리게끔 하였다. 사람들은 여왕을 가리켜 색에 미친 요상한 여왕이 유모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밤낮으로 해괴망칙한 짓을 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개탄했다. 아무리 여왕이 유혹하더라로 각간까지 지내고 있는 위홍이 여왕을 범하고 있다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었다. 요왕과 간신이 애욕에 빠져 있으니 나라가 잘 될 리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왕과 위흥의 관계를 <삼국사기>는 이렇게 저하고 있다.
진성왕 2년(883년) 2월에 소양리에 있는 돌이 저절로 움직여 옮겨 갔다. 왕은 평소에 각각 위홍과 더불어 사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떳떳이 그를 궁내로 불러 일을 보게 하고, 그에게 명하여 대구 화상과 더불어 행가를 모아 수집하게 하고 이를 <삼대목>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진성 여왕과의 사통 뒤에 은근히 향가의 수집자로서 위홍을 내세우고 있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위홍이 <삼대목>을 완성시킬 때까지 대궐 안으로 안방 드나들 듯 출입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기실 진성 여왕이 표면상에 내건 <삼대목집>이란 위홍 무단 출입의 구실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라인은 태어날 때부터 노래를 즐겨 부르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노래는 궁중 안에서건 궁중 밖에서건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이 즐기고 있었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취가하여 두고 서동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잔다. --"서동요"
위홍은 향가를 집대성하면서, 여자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노래는 진성 여왕 앞에서 낭송을 했다. 버로 전전 왕인 헌강왕 때에 해동 용왕의 아들 처용이 불렀다는 노래 "처용가"를 낭송할 때에는 성의 노예가 된 위홍과 여왕이 다 함께 공범 의식에서 쾌감을 맛보기도 했던 것이다.
동경 밝은 달 아래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둘은 내 해이고 둘은 누구 해인고 본래 내 해것마는 남에게 빼앗기었으므로 어찌할꼬, --"처용가"
향가를 모으다 이성이 생각나면 위홍은 여왕을 찾는다. 여왕은 언제나 침전에서 위홍을 기다리는 자세였다. 육체의 교섭이 끝나면 별수없이 또 한 번 죄를 저질렀다는 뉘우침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잡힌다. "각간......... 지금 내 뉘우침을 달랠 수 있는 무슨 노래가 없겠소?" "예, 그러하오면 천수대비가를 읊어 보소서........." "천수대비가라는 노래가 어떤 것인데?" 위홍은 그가 수집한 <삼대목> 책장을 넘긴다.
두 무릎을 고초으며 두 손바닥 모으아서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일천수 일천목을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덮겠사오면 들도 없는 내오니 하나는 그윽히 고쳐 주옵소서 아아 나에게 주옵시사 놓아 주실진대 자비여 크도소이다. --"천수대비가"
진성 여왕과 위홍이 궁중 안에서 '향가놀음'에 이어, 시들 줄 모르는 짐승의 '자웅놀이'를 일삼고 있는 사이, 백성들의 인심은 날로 흉흉해갔다. 소양리에 있는 돌, 부동석이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저절로 자리를 옮겨 갔다는 데에 문제는 있었다. 이것은 커다란 이변이었다. 게다가 이 바위(부동석)이라고 하는 커다란 바위가 저절로 자리를 옮겨 갔다는 데에 문제는 있었다. 이것은 커다란 이변이었다. 게다가 이 바위(부동석)에는 부동존이라는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글쎄 그 불상이 스스로 옮겨 앉은 셈이었으니 나라 안이 조용할 턱이 없었다. "이는 부처님이 망국을 경고하는 계시일 것이다. 여왕과 위홍의 간신 도배가 죄를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서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하고 만다."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서라벌 장안에 퍼지고, 급기야는 여왕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여왕은 위홍을 불렀다. "무슨 구실이 없겠소? 부동석이 옮겨 앉은 데 대한 구실 말이오." "그 문젠 신에게 맡겨 주소서." 위홍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그대에게 맡겨 달라니, 무슨 묘책이라도 있단 말이오?" "있다마다요, 아무튼 신에게 맡겨 주시면 부동석이구 유동석이구 모두 잘 처리하겠나이다." 위홍은 그 길로 즉시 일관을 불러 매수한 다음 부동석 이동의 점괘풀이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풀도록 명하였다. 그들 위홍과 일관의 음모는 이런 점괘 풀이를 하였다. "부동석이 자리를 움직인 것음 음양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다. 이 부동석은 원래 음것으로서 양석을 사랑하여 함께 있었는데 지귀가 애정을 질투하여 음석을 양석과 떼어 버린 다음 다시는 양석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중력으로 금주했던 것이다." 일관의 풀이는 더 계속된다. "......... 그러나 그 때부터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부동석은 양석에 대한 사랑을 알지 못하고 부자연스런 땅귀신의 금주의 중력을 물리치고 양석을 이동한 것이니 결코 불길한 징조가 아니고 세상일이 이처럼 모두 자연의 이치대로 발전할 아주 길한 징조다......." "얼씨구........."
사람들은 비웃었다. 일관의 해석인즉, 부동석을 진성 여왕으로 비유하고 양석을 위홍에다 비긴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왕이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었고, 여왕이 성적이 향락 생활에 젖어 있는 것은 그 역시 자연스러운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땅귀신의 질투와 같이 부당한다는 점뢔풀이였다. 천부당 만부당한 풀이였으나 백성들은 속아넘어가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육욕의 놀음에는 권태가 빨랐다. 지고지순한 정신력으로 이록된 사랑이 아니라 찰나적이 육체의 유희에 영원이 있을 턱니 없었다. 여왕은 위홍의 늙은 남성미에 싫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젊은 여왕은 젊은 장정이 필요했다. 위홍은 늙었다. 유모의 남편이었으니 아비 뻘이 되는 늙은이였다. 여왕은 중신들에가 소리쳤다. "나에게 궁남(남자 궁인)을 달라!" 남자 왕은 궁녀들을 두는데 여왕이니까 궁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지존의 엄명이라 중신들도 반대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궁남을!" 하는 여왕의 바람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궁중 안 여왕의 침전에는 건장하고 잘생긴 사나이들의 출입이 잦게 되었다. "궁남을........."하는 여왕의 바람의 한 여성의 본능이었다. 아니 이성에의 강렬한 욕망이었다. 욕망은 쉽게 충족되었다. <삼국사기>는 여왕의 욕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남몰래 아름다운 소년 2,3명을 궁중으로 이끌어 들여 음란한 짓을 저지르고, 또한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내맡기니 이로 인하여 영행이 빙자하여지고 뇌화가 공해하고 상벌이 불공평하고 강기가 무너졌다. 이때에 한 무명자가 시정은 비방하는 글을 조정의 큰 길 앞에 걸어 놓았으므로....... 시정을 비방하는 격뭉은 진성여왕과 위홍 부처가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으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남무망국 찰나나제......... 부이사바사................
찰나니제는 여왕을 암시하는 것이었고, 부이는 여왕의 유모 부호와 그녀의 남편 위홍 일당을 지적한 것이었다. 격문을 붙인 범인으로 은자 왕거인이 지목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왕거인은 옥중에서 나라의 운명과 자기의 억울함을 시로써 호소했다. 충신의 피눈물이 애를 태울 듯하나 역적의 권세는 여름에 서리를 내리게 한다 아! 내가 지금 억울하게 죽어 가는데 황천은 무심하게 돌아보지 않는구나 혹은, <삼국사기>에는 왕거인이 옥벽에 이렇게 썼다고 전한다.
간공이 통곡하니 3년 동안 한재가 들고, 촉연이 비분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왔다. 지금 나의 유원한 우수는 고사오 다름이 없는데 황천은 말이 없이 다만 창창할 뿐이로다.
그날 밤 갑자기 천둥이 울고 벼락이 옥문을 부수자 왕은 두려운 나머지 왕거인을 석방시켜 주었다. 진성 여왕과 위홍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대신 여왕과 궁남들의 거리는 가까워 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남과 위홍과의 반목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시기와 질투가 궁남과 위홍 사이에서 마치 불꽃처럼 튀었다. 여자의 시기에는 손톱 자국이 남고 남자와 남자들의 시기에는 칼자국이 남는 것일까. 위홍은 칼을 뽑아 들고 새로운 연적 궁남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각간과 궁남의 싸움이라면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위홍의 승리가 분명하겠지만 노인과 젊은이의 칼부림에는 다릴 기적이 있을 수 없었다. 위홍은 젊은이들의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위홍이 죽자 여왕은 궁남들의 힘의 세계와 성의 요지경 속에서 마음껏 성의 쾌락을 즐겼다. 그러나 여왕의 정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끊임없는 성의 유희에 휘말려들던 여왕은 결국 병이 든 것이다. 궁남들을 잠시 멀리하고 죄수들을 사면해 본다. 고승 60명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여 여왕의 쾌차를 빌기도 한다. 이윽고 여왕은 병환이 낫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재가 들어서 나라 안이 영 쑥대밭 꼴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여왕 즉위 2년 사이에 벌어진 것이니, 여왕이 얼마나 음탕한 생활을 즐겼으며, 정사에 게을렀나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영왕 즉위 3년, 국내의 여러 주군이 공부를 바치지 않아서 나라의 창고가 비어 재정이 궁핍할 때로 궁핍하였다. 이에 왕은 사자를 내보내어 공부를 바치라고 독촉할 지경이었다. 여왕 즉위 5년, 양길과 궁예가 기병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북쪽의 명주(지금의 강릉)를 비롯한 10여 군현이 함락 되었다. 여왕 즉위 6년, 완산(지금의 전주)에서 견훤이 들고일어나 무주(광주)가 그에게 항복하였다. 신라의 머리를 강타하고 허리를 찌르는 소동이 일어나자 여왕은 기진맥진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쳐 본다. 그러나 미처 당나라에 닿기도 전에 사신은 바닷귀신이 되고 만다. "온, 이럴 수가?" 하는 일마다 백성의 원성을 사는 일뿐이었고 연이어 불행한 사태만이 속출하였다. 여왕의 두 귀에 들리느니 변방에서 벌떼처럼 왕왕거리는 궁예와 견훤의 성난 함성이었고, 나라 안에서 굶주린 백성들의 울음소리뿐이었다. 궁예와 견훤은 여왕을 쓰러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아우성들이었다. 그들의 성난 함성은 오 신라 천지에 여울져 갔고, 급기야는 궁성의 높다란 담벼락을 넘어 여왕의 귀에까지 속속들이 흘러 들어왔다. 여왕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위홍과 궁남들을 섬기기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으나, 지금은 남자로 인한 불면의 밤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쇳소리같이 잉잉거리는 백성들의 원성으로 여왕은 그 이상 모르는 체 귀 감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여왕 즉위 8년, 그녀는 별수없이 나라의 기둥이 되는 인물을 백방으로 물색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첫손으로 뽑히는 인물이 거유 최치원이었다. 최치원. 12세 때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 나이 17세 때는 이미 과거에 급제를 해서 신라의 국명을 드높인 사나이. 38세의 젊음. 박식한 서라벌의 천재. "그 최치원을 불러들이도록 하라!" 여왕은 새로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출할 인물은 아무래도 최치원, 그 사람말고는 따로 있을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신 최치원 대령이오." "오! 그대는 오늘부터 나를 도와 이 난세를 바로잡아 보지 않으려오?" "황공하오이다." 최치원은 여왕의 뜻을 쾌락하고 '시무 10여 조'를 작성하여 정사에 반영시켰다. 난세를 사는 백성과 그 난세를 다스리는 위정자의 지킬 바를 명시한 10여 조였으니 요샛말로 하자면 무슨 공약 같은 것이었다.
원래 음탕한 여왕이었고 슬하에 한 점 혈육이 없는 게 흠이었으나 여왕은 서리맞은 국화꽃처럼 꽃의 미소를 잃지 않고 국정에 참여하는 즐거움으로 나날을 보내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어떠냐 싶었다. 여왕은 49대 헌강왕의 서자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그녀는 한 나라의 주군이기 전에 이제 한 나약한 여성이었다. 꽃은 시들어서 이마에 주름살은 물살졌지만, 후사를 걱정하고 나라 안 살림을 걱정하는 여성으로 그녀는 변모해 갔다. 여왕은 그녀가 왕위에 올라 있을 때에 태자비를 맞아서 아이를 낳게 하리라 했다. 나이 30을 넘기지 않은 여왕은 벌써 육신이 벌레 먹은 장미로 변신해 갔다. 여왕 즉위 11년, 여왕은 그녀가 살아온 생애를 뒤돌아본다. 뉘우침과 슬픔이 여왕의 죽음을 형벌처럼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왕은 신록이 물들기 시작한 6월에 병색이 가득한 얼굴로 좌우 중신들에게 말한다. "근년 이래로 백성들은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므로 어진 사람에게 양위하고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겠노라."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2월, 왕위에 오른 지 열한 해 만에 여왕은 야생마처럼 분별없이 살아온 자신의 생애를 문닫고 죽음의 언덕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