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열일곱 살에 떨어진 구국의 별 - 유관순
유관순 [柳寬順] 1902∼1920.
- 이화학당 시절의 유관순(윗줄 가장 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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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떨어졌다.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관순은 구국의 별이었다. 계속된 일제의 악행, 꺾일 줄 모르는 애국심, 모진 고문과 굶주림으로 관순은 영양 실조가 되어 있었다. 1920년 10월 12일, 별은 하늘이 아니라 감옥에서 떨어졌다. 관순이 죽은 지 이틀이 지났다. 관순의 모교인 이화 학당 당장 미스 프라이와 미스 월터 선생은 일본인 형무소 소장을 만나 관순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시, 시신........? 가, 가만히 계시오." 형무소장은 웬일인지 쩔쩔매었다. 두 사람은 거듭 재촉했다. 그 다음날에도 또 형무소로 찾아가서 끈질기게 재촉했다. "보시오, 소장. 만일 관순의 시신을 내주지 않으면 이 사실을 내외에 알리겠소!" "뭐라구?" "이 사실을 미국에 보고하여 세계의 여론을 일으키겠단 말이오!" "가, 가만 계시오......." 일본인 소장은 한참 만에 조건을 내세우고 시신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첫째, 시신에 관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아니할 것. 둘째, 장례는 극히 소수인으로써 조용히 지낼 것......... 석유 궤짝에 낳은 유관순의 시신은 해가 진 뒤 월터 선생에게 인도되었다. 학교로 돌아온 월터 선생이 시신이 든 궤짝을 열었을 때 선생님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관순의 시신은 머리, 몸체 할 것 없이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었다. "오, 불쌍한 관순........" 선생들은 시신을 부여안고 마침내 통곡해 버렸다.
유관순은 1903년 음력 3월 15일, 충청남도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에서 유증권의 4남매 중 들째 딸로 태어났다. 관순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다른 여자 아이들에 비하여 적극적이었고 감수성이 강했다. 그리고 또 봉사 정신이 강했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끝까지 제 의견을 굽히지 않고 관철시켰다. 관순은 또 장난이 심했고, 달리기에는 늘 첫째를 양보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유관순은 반일 사상이 투철했다. 어느 날 관순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가 낯선 일본인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관순의 아버지는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홍호 학교를 세원 그 고을 유지였다. 지령리에 학교를 세우느라 장터의 고리 대금업자 고마다에게 원금 300냥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정한 기일에 이자를 갚지 못하여 원금의 열 곱인 3,000냥의 빛으로 늘어나 있었다. "야 이 늙은이야....... 왜 남의 돈을 빌려가서 갚지도 않고 이자도 안 주는 거야, 앙?" 일본인 고리 대금업자 고마다는 매일같이 찾아와서 갖은 욕설과 행패를 늘어놓았다. 땅문서고 집문서고 모두 고마다에게 잡혀 있었으나, 원금을 갚지 못한 유증권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 해 겨울날 관순의 아버지는 가까스로 원금 300냥을 마련하여 가지고 문서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마다는 제 집 근처의 일인들을 불러 와서 또다시 행패를 부렸다. "이 유가를 우물에 거꾸로 처박자...." "그럽시다, 우헤헤헷." 그자들은 거꾸로 처박힌 유씨에게 물을 끼얹고 매질을 했다. 그날의 사형벌로 관순의 아버지는 때때로 신열이 나고 중태로 앓아 눕는 일이 많았다. 그 때부터 유관순은 일본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가난한 집안이라 여학교에 진학하고 싶어도 그 꿈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의 연줄로 관순은 열네 살 나던 해 봄 이화 학당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교비생으로 이화학당 3학년에 입학한 관순은 서울에 올라와 프라이 당장에게 소개되었다. 이미 사촌 언니 유예도가 이화 학당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이화 학당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새 지식의 흡수욕이 강했던 관순은 이화에 편입학되자마자 기숙사에 들어갔다. "관순아, 넌 나하고 이 방을 쓰는 거야." 사촌 언니 에더는 이층 기숙사에 넓은 방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언니하고 단 들이서만 쓰는 거야?" "아니, 모두 여덟 명이 있게 돼." 에더는 그 방에 있는 학생들에게 관순을 소개했다. 모두들 관순을 반겼다. 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기숙사에서 한 방에 있는 서명학과는 반도 같았다. 서명학은 학교 교육에 익숙지 못한 관순에게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서명학 외에도 주현숙, 김분옥, 김회자, 유점선과 친하게 지냈다. 관순은 쾌활한 학생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개방적이었다. 줄넘기는 관순을 따라갈 학생이 없었다. 기숙사 식대는 한달에 6원씩이었다. 대개 학생들은 교비생으로 기숙사에 수용되어 있었다. 관순은 고학하는 학생의 만두를 매일 팔아 주리만큼 동정심이 강했다. 또 한번은 기숙사생 가운데 식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이 있었다. 관순은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밥을 그 학생에게 먹이고 자기는 굶었다. 그리고 그학생을 위해 열심히 기도만을 올렸던 것이다. 그 당시 세계는 민족 자결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일본의 식민지로 온갖 박해를 받아 오던 우리 나라도 온 민족의 힘을 모아 3.1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인산을 앞두고 전국 각 고을에서는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이 줄을 이어 서울로 몰려들었다. 민족 대표 33인은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이용하기로 했다. 1919년 3월 1일 정오,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고, 학생을 선두로 한 만세 시위가 온 장안을 휩쓸었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학생들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소리는 흡사 노도와 같이 거리거리를 누볐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관헌은 이들 민족의 함성을 제지하기 위하여 총칼을 들고 날뛰었다. 3.1운동 당시 유관순은 고등과 2년을 눈앞에 둔 16세의 꽃 같은 학생이었다. 이화 학당 학생들은 그날 일제히 만세 운동에 가담하려고 운동장에 모였다. 그러자 프라이 학당장은 학생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여러분! 내가 당장으로 있는 동안은 여러분을 일본 사람한테 끌려가게 할 수도 없고, 고생시킬 수도 없습니다. 나를 밟고 넘어갈테면 가시오!" 학당장은 이처럼 필사적으로 말렸다. 그 바람에 학생 전체가 교문 밖으로 나가려던 계획이 변경되어 30여 명밖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만세 운동 바로 전날 관순은 고등과 1년생 6명과 함께 시위 운동 특별 결사대를 조직했었다. 결사대 6명은 상급생들을 따라 학교 뒷담을 넘어서 만세 대열에 합세했다. 3월 5일 학생들만의 시위 운동에도 참가하여 관순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우리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조선 총독부에서는 성난 파도처럼 일어나는 만세 운동을 막기 위해 3월 10일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관순을 비롯한 이화 학당의 기숙사 학생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유관순은 3.1운동의 민족적 울분을 가슴 깊이 지니고 사촌 언니 에더와 함께 고향 지령리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내가 할 일이란 무엇인가? 일제의 압박을 그냥 받고만 있는 고향 사람들에게 항일 정신을 불어 넣어야 하다.' 유관순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서울에서 있었던 만세 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관순의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다. 그리하여 관순은 아우내 장날인 음력 3월 1일을 기하여 시골에서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유관순과 에더 언니는 천안 고을뿐 아니라 인접해 있는 여기, 청주, 진천 등지로 찾아다니며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을 벌일 것을 종용하였다. 마침내 계획된 거사의 날은 왔다. 아우내 장터엔 아침부터 수천 명의 군중이 하얗게 모여들었다. 관순과 에더 언니는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를 구중들에게 나누어 주고, 관순이 짤막한 연설을 마치자 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조인원(조병옥 박사 아버지)의 선언서 낭독이 있었고 선창이 있었다.
병천의 진명 학교 교사 김구응이 선두에 서서 농기에 단 커다란 태극기를 휘둘렀다. 뒤따라 수천의 군중들은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관헌이 달려나와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내리쳤다. 하나오카란 자가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청년 김상헌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만세! 대한 독립 만세!" 늙은 조인원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자 일본 관헌은 조옹을 향하여 총을 쏘았다. 조옹 역시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뒤를 이어 희생자는 늘어갔다. 일본 관헌은 계속 무차별 사격을 가해 왔다. 천안읍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지원하기 위해 합세하자 아우내 장터는 피로 물들어 갔다. "이놈이...... 왜 우리를 쏘느냐., 왜 죄없는 대한 백성을 쏘느냐!" 항변하는 김구응의 가슴에 총알이 날아들었다. 쓰러진 김구응의 머리가 일본 헌병의 칼에 박살이 났다. 김구응의 늙은 어머니 채씨가 달려들어 아들의 죽음을 항변했다. 왜놈 헌병은 아들을 찌른 칼로 그 어머니를 또 찔렀다. 관순의 아버지 유증권이, "너희놈들은 부모도 없느냐....... 왜 죄없는 백성들을 죽이느냐......."하고 대들자 이번에는 유증권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여보!" 쓰러진 남편을 부축하려던 관순의 어머니 등에도 왜놈 헌병의 칼이 사정없이 내리찍혔다.. 관순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말았다. 관순의 아버지는 중상을 입고 집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다가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날 유관순은 일본 관헌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만세를 선동한 주모자를 대라. 주모자가 누구냐?" 일본 관헌은 관순을 심문하였다. "주모자는 나다. 내가 주모자란 말이다!" "뭣이! 바른대로 말 못할까!" 고문이 시작되었다. 심한 고문에도 관순은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기가 주모자라고 버티었다. 실상 만세 운동의 주모자는 그녀였으니까........ "칙쇼! 만세 운동에 관계한 자가 누구인지 그걸 대라. 순순히 대기만 하면 너는 석방이다." 그들은 관순에게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그런 꼬임에 넘어갈 관순이 아니었다. "사정없이...... 이 악독한 계집아이를 사정없이 내리쳐라!" 야만스런 고문이 거듭되었다. 관순은 천안 헌병대를 거쳐 공주 재판소로 이동되었다. 또다시 검사국에서의 고문. 검사국에서 감옥으로. 관순은 곧 재판을 받았다. 3년형. 경성 복심원에 공소. 법정에서 관순은 걸상으로 검사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7년형으로 가형. 서대문 감옥으로 이감된 관순은 감옥 안에서도 계속 만세를 불렀다. 만세 뒤엔 으레 고문이 뒤따랐다. 일본인들은 고문을 하다 못해 관순이 먹는 밥에 쇳가루와 모래를 집어 넣었다. 계속된 관순의 만세와 고문, 고문, 고문! 관순은 그 고문을 이기다 못해 1920년 10월 12일 아직 인생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17세에 어린 나이로 한많은 일생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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