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대중과 함께 산 무대의 여왕 - 배구자
시대 항일기, 1907-? 활동분야 신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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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극단 송욱제천승 일행 공연!' 시골 담벽에 붙은 극단 선전문을 보고, 한쪽 귀로는 목이 쉰 트럼펫 소리를 들으면서 자그마한 시골 바닥 젊은이들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덴카스라면 시골 바닥에서도 널리 알려진 마술 극단, 몇해 만에 찾아온 덴카스 일행의 마술과 춤과 연극을 보려고 사람들은 벌써부터 극장 주위를 맴돌았다. 극장이 문을 연 첫날부터, 마술과 무용과 노래가 흥겹게 진행되자 시골 사람들은 여전히 가슴을 울렁이면서 어서 다음 프로가 소개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날 황금 프로인 '소공자'에서 주연인 세시 역으로 나온 10대 소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마, 저 초롱초롱한 눈 좀 봐. 겨우 열한두 살이나 될까?" "저 소녀가 오늘밤 연극 주연인가?" "이런 맹추! '소공자'에서 세시로 나오면 주연 배우지 뭐야."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어 간다. 입 다물어." 소녀는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하게 연기를 해내고 있었다. 소녀는 전체 연극 중에서도 어머니를 그리며 유랑하는 대목에 이르자 눈물을 쏟아가며 이야기를 청승맞게 엮어 나갔다. 소녀의 눈물을 보고 관객들도 모두 유랑 소녀의 비극이 자기들 주위에 있는 이야기만 같아 슬피 울었다. 연극이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극장 안을 떠메고 나갈 것처럼 울려 퍼졌다. 배구자의 이름을 부르며 관중들은 천재적인 어린 소녀 연기자에게 환호를 보내었다. '소공자'에서 세시 역을 해내었던 소녀, 그녀가 바로 배구자였다.
1907년 충청남도 대전에서 태어난 배구자가 이렇게 덴카스 일행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소녀 배우로 출발한 것은 순전히 그녀 삼촌의 덕이었다. 배구자가 덴카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그녀의 나이 여덟 살도 안된 어린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로 소문이 나 있던 배정자의 조카딸이었다. 여덟 살 때 소녀 구자는 삼촌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역시 삼촌의 도움으로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나 삼촌이 워낙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배구자의 운명은 그 삼촌에 의하여 이미 결정이 나 있었다. 덴카스 일행과 친교가 있던 삼촌은 구자에게 학교를 집어치우게 하고 극단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아니, 그 같은 운명은 배구자 쪽에서 마련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린 구자는 덴카스 일행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불렀었고, 유희를 잘할 때마다 칭찬을 받아 오던 터였다. "소질이 있어. 어떻게 키워 볼까?" "소질 정도가 아니라 이건 대성할 수 있는 바탕이 있는 아이야." 덴카스 측의 관심은 마침내 소녀 구자를 극단 단원으로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13세. 그녀는 덴카스 산하 극단인 유라쿠좌의 한 단원이 된다. 무대에 익숙하게 된 구자는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다. "노래를 본격적으로 부르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해." 당시 악단의 제1인자로 꼽히던 세키야 도시코가 구자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녀는 용기를 내러 세키야를 찾아가 그 문하생이 된다. 천부적인 재질에다 무대를 향한 줄기찬 욕망, 배구자는 출세를 미리 약속받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덴카스 안에서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위치를 구축해 나갔다. 이제 덴카스 측에서도 배구자 없는 극단은 상상할 수조차 없이 되어 그녀는 관객과 극단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마침내 배구자는 덴카스 측으로부터 이름 하나를 선물로 받는다. 노모 가메코. 그녀가 펼쳐 나갈 제 2의 인생이 화려한 인기와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구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이른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해의 일이다. 덴카스를 따라간 공동의 여행이었으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전전하는 사이 그녀는 백계 러시아인 아나 파브로바를 만나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다. 무대를 익히고 음악을 배우고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마친 배구자는 그야말로 한 사람의 완벽한 연기자의 수련을 모두 거친 셈이었다. 3년 동안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끝내고 하와이에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을 때 덴카스의 인기는 미국인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가운데서도 배구자에게 보내진 박수 갈채는 대단한 것이었다. 덴카스 측에서는 배구자를 그들 극단의 후계자로 꼽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가 날로 높아 갈수록 그녀가 무대를 향한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은 미개지의 땅을 개간하는 개척자의 고난처럼 따르게 마련이었다. 예술이란 천부적인 재질만으로 대성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일본을 거쳐 덴카스가 평양의 해락관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1926년 6월 4일. 새벽녘에 눈을 뜬 덴카스 관계자는 밤 사이에 배구자가 사라진 사실을 발견하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침 일찍 평양을 떠나 중국으로 가기로 되었는데 배구자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도망간 게 분명합니다. 배구자 소지품이 보이지 않아요." 덴카스로서는 배구자의 도망으로 당장 내일의 공연이 문제였다. 11년 동안 몸담아 오던 덴카스 측에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떠나간 그녀를 두고 극단측에서는 배신자로 몰아세웠으나, 그녀의 이탈 뒤에 얽힌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덴카스측에서는 일단 평양 경찰서에 의뢰하여 배구자의 행방을 찾도록 부탁하고 미리 짜여진 일정에 맞춰 만주로 떠나갔다. 그 시각에 배구자는 열차편으로 서울을 향하고 있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 황주에서 배정자의 마중을 받고 그 길로 서울에 온 배구자는 성북동 배정자의 집에 은신하게 된다. 배정자가 황주까지 마중나갔던 점으로 보거나 그 뒤의 배구자의 움직임으로 보아 배구자가 덴카스를 떠난 것은 뒤에 배정자의 조정이 있었던 것 같았다. 기실 배정자는 얼마 뒤 일본인 실업가 이치고리를 만나게 하였고, 그에 따라 배구자의 숙소도 조선 호텔로 옮겨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만 하던 배구자의 인기였으므로, 배구자의 신상에 변화가 생겼다는 소문은 그만큼 빨리 온 서울 장안에 퍼져 나갔다. 배구자가 일본인 실업가와 만난 뒤 또 이러한 소문도 나돌았다. 배구자는 오래지 않아 신일좌라는 마술 극단을 하나 조직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다른 소문은 배구자와 장래를 약속한 어느 청년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아서 덴카스를 떠났다고도 하였다. 그 같은 소문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듯도 하였다. 본디 덴카스의 남편에게는 전처 소생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과 배구자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소문의 전부였다. 세상 소문이야 어찌 돌아가건 배구자는 성북동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버린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더니 급기야는 1926년 가을, 부모가 있는 김해 산골로 아주 낙향해 버리고 말았다. 김해의 배구자는 이미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음악과, 무용과 기술로 온 사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명성으로 화려한 무대 위의 인생을 보낸 예술가"가 아니었다. 촌부의 차림으로 물을 긷고 살림을 해 나가는 그녀는 아예 무대를 밟아 본 일조차 없는 산골 처녀 그대로였다. 그러나 배구자를 싸고 도는 소문은 시들 줄을 몰랐다. "배구자가 아이를 배었다." 신문은 엉뚱하게도 그 같은 소문을 기사로 실어서 배구자의 해명을 촉구했다. 오늘날의 주간지 기사 같은 특종이 보도되었을 때 세상은 다시 한 번 부글거렸다. 돌연히 모 일간 신문에 그(배구자)가 아이를 배었다는 기사가 크게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었기는 우리는 바라겠다. 배구자가 세류 같은 허리를 나부끼며 나서서 그 기사의 정오를 내기를 바라야 하겠다. 그러나 배구자야! 남산의 불빛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하던 배구자야! 너에게 그럴 만한 용기와 자신이 있겠는가? <매일신문> 기사의 그 같은 횡포는 오늘날에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 만인의 여왕이었던 배구자의 임신설은 그만큼 화제를 모을 만한 일대 사건이어서 신문이 해명을 요구할 정도로 앞장을 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효녀로서 시골스런 치마저고리에 시골 가시내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지 소문대로 부정한 아이를 잉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은둔 생활 2년여. 흥행계에서 배구자를 다시 무대로 끌어내어 한몫 단단히 재미를 보려는 사람들이 배구자의 소재 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무대를 떠났을 무렵, 그러니까 1927년 1월 13일자 <매일신문>에 태백산인이 배구자의 운명을 예언할 정도로 그녀는 아직도 일등 예술가요 만인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배구자 양은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덴카스의 유일한 수제자로 연극과 마술을 아울러 잘하는 천재 여배우올시다. 일전 신문 지상에서 보니 죽어도 배우 노릇을 아니하고 부모가 보내는 대로 아무데나 가서 시집살이나 하겠다 하나, 내가 보아서는 역시 배구자 양의 신수는 만인의 흠양을 받을 곳에 길운이 트일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남방의 혹성의 정기를 타고 난 사람이니 밤에는 불빛을 좇아 지나지 않으면 그의 팔자는 거세어질 것이며, 둘째, 그는 나비의 혼령이 사람으로 탄생한 사람이니 날고 뛰고 하지 않으면 그의 몸에는 재앙이 있을 팔자이올시다. 적어도 태백산인의 예언은 여기까지 자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도저히 이 말이 맞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신변에 마성이 세 개가 빛나고 있으니, 이 마성을 치워 버리기 전에는 도저히 신수가 트일 수는 없습니다. ........ 그러하므로 내가 보는 운명 예언을 오직 그 자신의 심리와 태도로써 능히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니 나도 그 마성의 세밀한 정체는 모르나 배씨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여 마성 같은 것을 골라 제멸키를 도모하면 길운이 트일 것이올시다. 그리고 남편을 얻으면 화성을 가진 분이 좋고, 직업은 비료 회사나 운송이 좋겠죠...........
나비의 혼령이 사람으로 탄생할 사람 배구자. 날고 뛰고 하지 않으면 그녀의 몸에는 재앙이 있을 팔자라는 배구자. 태백산인의 예언이 맞은 것일까. 배구자는 악극의 개척자 이철의 끈덕진 회유와 설득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이철이 배구자가 장차 미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달려가, "미국으로 떠나신다면 고별 공연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무대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하고 애원한 것이 배구자의 승낙을 얻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1928년 4월 21일. 장곡천정 공회당. 백장미사 주최 음악.무용 대회에 참석한 관객은 배구자의 건재함을 다시 확인하였고, '유모레스크', '집시', '앵화', '수부', '인형', '아리랑', '사의 백조'를 춤추는 배구자의 가녀린 율동미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날의 발표회를 시발점으로 배구자의 무대 활동은 재개되었다. 배구자 예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자들을 육성하기도 하고, 지방 순회 공연으로 전날의 인기를 바탕 삼아 화려한 무대의 여왕을 꿈꾸지만 그녀의 인기는 차츰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객석에서는 간혹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배구자의 인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그 무렵에 들장한 최승희의 신선한 매력은 배구자가 점유하고 있던 독무대를 조금씩 조금씩 침식해 들어갔다. 이미 홍순언의 아내가 된 배구자는 자기 개인의 인기가 사양길로 접어든 것을 절감하고 입체적인 대형 무대를 구상하게 된다. 남편의 후원으로 1935년 11월 1일에는 서대문구 충정로에다 동양 극장을 개관한다. 동양 극장이란 이름은 윤백남이 짓고 독견 최상덕이 지배인을 맡아 획기적인 공연을 갖게 되었다. 개관을 이틀 앞둔 날 <매일신보>(1935. 10. 30.) 기사는 그 당시 배구자 악극단의 진용과 동양 극장의 규모를 소개하였는데 이를 보면 알 만하겠다.
신축 낙성 개관 피로........ 11월 1일부터 배구자 악극단의 향토방문 대공연과 대작 영화 동시 봉절을 감행하는 레뷰, 연극, 영화의 3중주적 특별 대흥행은 사계 만도인사의 절대 기대에 봉부할 것을 자신한다. 중요 순서.만국 '멍텅구리 제 2세' 5경, 촌극 '월급날' 1경, 무용극 '급수부' 1경, 그 외 20여 명으로 조직된 소녀 관현악단의 무대 연주(조선국) 수종, 무용(클래식. 재즈. 텁푸)5종, 조선 무용 '아리랑' 창극, 합창, 뮤직 플레이. 객석 600의 회전 무대, 호리촌트 등을 갖춘 국내 유일의 연극 전문 극장은, 그러나 1주일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나서 뜻밖에도 고별 공연을 갖게 되어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놓았다. '배구자 악극단 석별 흥행 주간....... 11월 8일부터 12일까지.' 이 공연을 마치고 그녀는 서울을 벗어나 일본으로 순회 공연을 떠난다. 국내 공연보다는 일본 공연을 주로 하던 배구자는 남편 홍순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질적인 동양 극장의 주인이 되지만, 그 때부터 배구자의 인생과 사업은 급전되어 불과 5년의 세월을 채우지 못하고 극장을 양도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고 만다. 개관 이후 동양 극장은 전속 극단 청춘좌, 희극좌, 동극좌, 호화선 등 화려한 조직으로 장안의 인기를 독점하였었다.
기성 배우로 박제행, 서월영, 심영 등 토월회 출신과 황철, 연구생으로 김승호, 여자 배우로 김선초, 차홍녀, 지경순, 김선영, 신인으로 한은진, 유계선 등이 주축이 된 청춘좌, 변기종, 송해천, 하지만 등의 동극좌, 전경희, 석와불, 손일평, 김원호, 최영순 등의 희극좌, 게다가 전속 작가로 박진, 이서구, 이운방, 송영, 임선규, 김건, 최독견, 김영수 등의 활약은 배구자 내외를 돈방석 위에 올라 앉게 하였다. 지금도 가끔 입에 오르내리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검사와 사형수' 같은 프로가 동양 극장에서 막이 오랐고, '승방 비곡', '국경의 밤' 같은 작품이 모두 동양 극장 무대를 거쳐 소개되었다. 그러나 남편 홍수언이 죽자 배구자는 어찌된 셈인지 1년도 채 안 되어 김해의 미곡상 소사로 출발하여 거부가 된 동양 연료 회사의 김계조에게 재가하더니, 둘째 남편 김계조는 동양 극장을 팔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1939년 8월, 신문에 오르내린 기사로 보면 동양 극장은 36명의 채권자에 빚이 16만 원이라 했다. 8세에 무대를 밟기 시작하여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배구자에게 인기의 하락은 물론 경제적인 파탄이 오는가 했더니 그녀는 홀연히 일본을 떠나 버리고 만다. 배정자의 조카딸로서, 최승희 이전의 당대 제일의 무영가 배구자의 소식은 그 뒤 단편적인 것들만 떠돌뿐 지금은 역사의 장 저쪽으로 아주 사라져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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