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차라리 남자이기를 포기한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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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이름앞에는 언제나 마하트마<위대한영혼>란 수식어가 붙는다. 하얀 법복을 입고 맨발로 순례자와 같은 행렬을 이끌고 그는 인도 동해안의 단찌히로 가고 있었다. 제자들을 이끌고 소금을 만들러 가는 도중이었다. 1930년 3월 12일 영국 정부가 소금에 고액의 세금을 붙여 인도사람의 제염을 금지케 했으므로 이에 저항하는 사챠그라하 운동을 벌인 것이다. 즉 무저항, 불복종이야말로 인도인의 유일한 무기였던 것이다. 이 일로 간디는 푸나의 형무소에 투옥된다. 영국에 대한 항쟁으로 탄압과 투옥이 반복되는 생애였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돌아온 것은 스물한살때였는데 그때부터 그는 인도인의 자유를 위해 수없는 단식에 들어갔다. 민중과 고락을 같이한 그의 사생활은 간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조그만 집에서 살며 언제나 엷은 베옷으로 항상 반나체였다. 고기는 멀리했고 마시는 것은 물뿐이었다. 그는 79세의 노인으로 힌구교도와 회교도의 알력때문에 21일 간의 단식에 또 들어갔다. 14번째의 단식으로 이것은 이 두 교도들의 화해를 위한 기도였다. 죽을 때까지 단식을 결심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화합할때 나는 단식을 끝낼 것이다. 단식한지 3일째 되던 날, 인도정부는 간디의 요구대로 파키스탄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많은 인도사람들은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간디가 인도와 싸우고 있는 이슬람교도를 돕기 위해서 단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간디 집 앞에서 이렇게 외치며 시위했다. 피에는 피. 간디를 죽게 내버려 두자. 간디는 델리에 있는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나서 6일째 되던 날 단식을 그만 두었다. 간디는 자신만을 위해서는 짧은 시간도 쓰지 않았다. 단식이 끝나고 건강이 회복되기도 전 그는 또 일을 시작했다. 국민들에게 힘을 불어 넣고 고향에 가서 살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간디가 단식을 끝낸 지 얼마 안되어 기도회를 하는 곳에 폭탄이 떨어졌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간디의 집안 일을 보던 파텔은 간디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도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을 모두 검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거절했다.
내가 죽어야 한다면 기도회에서 죽고 싶다. 네가 나를 죽음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신만이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의 끝은 죽음이다. 병이 나서 죽는 것 보다는 형제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다.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버릴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나에 대한 미움과 노여움을 버릴 것이다. 이렇게 말하던 간디는 40년 뒤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간디의 생각은 힌두교의 교리를 따른 것이다. 인간은 신을 만날 수 없으면 그저 사라지는 것이라 믿었다. 죽음이란 강과 개울이 만나서 바다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1월 30일, 간디는 새벽 3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일하고 기도했다. 저녁 5시에 열리는 기도회에 늦었기 때문에, 간디는 파텔과 함께 서둘러 집을 나왔다. 영국인 기자 로버트스팀슨의 육성을 들어보자.
간디는 보통 때처럼 허리에 흰 천을 두르고 샌들을 신었으며 조금 추운 날씨라서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의 어깨에 팔을 가볍게 올려놓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기 위해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때, 이 300명의 사람들이 간디에게로 몰려오고 있었다. 간디는 마지막 계단을 오른 뒤에 사람들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어 인사했다. 언제나처럼 간디는 웃고 있었다. 그때 카키색 군복을 입은 30대의 땅딸막한 남자가 사람들의 첫 줄에 서 있었는데 그가 간디에게 다가서서는 총을 꺼내 몇 발을 쐈다. 간디는 오 신이시여! 하고 중얼거렸다. 몇 초가 지났다. 그는 쓰러졌고, 그리고 죽었다. 피가 그의 흰옷을 온통 물들였다. 범인은 힌두교인이었다.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고두제가 간디를 쏘았던 것이다. 그는 공범자와 함께 처형되었고, 살인을 도와준 5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간디의 장례식은 백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성한 줌나강 둑에서 행해졌다. 간디의 아들 람다스가 장작에 불을 붙였고, 그 장작은 14시간 동안 탔다. 간디의 남은 뼈는 봄베이 앞바다와 인도의 신성한 갠지스강에 뿌려졌다. 인도인들은 이 뼈를 띄운 성수를 앞다투어 마셨다. 네루 수상은 라디오로 간디의 죽음을 인도 국민에게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빛은 사라졌고 어디에나 어둠만이 남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도자이며 아버지인 간디가 죽었습니다. 전 국민이 간디의 죽음을 애도했으나, 그 부인의 거룩한 욕구봉헌의 기도는 알지 못했으리라. 미국의 라이프잡지 기자가 간디는 정말 위대하십니다. 재산을 다 바쳐 인도 국민을 먹여 살리고, 위로하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고 찬탄 어린 인사를 건넸을 때, 그의 부인은 머리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남편의 위대함은 재산을 바쳐 가난한 동족을 먹인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우리 부부에게 내려 주신 성생활의 쾌락을 그분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로 바치고자 나에게 금욕을 말씀하신 후, 오늘까지 한 번도 어기지 않고 그것을 지켜오신 일입니다. 그것이 남자 간디의 위대함이었습니다. 부인의 나직한 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내 목안에 뜨겁게 넘어갔다. 간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 거룩한 욕구봉헌의 약속을 함께 지킨 간디 부인에게도 머리가 숙여졌다. 간디가 죽었을 때 그가 남긴 것은 샌들, 지팡이, 안경, 니켈로 도금한 시계, 중국산 물병이 전부였다고 한다. 영혼이 가난하기 때문에 소유라도 많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물질에 더욱 집착하는 부끄러운 우리네의 삶을 조용히 돌아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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