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1장 죽기가 힘들었던 사람들
빗속으로 사라진 황제의 유해 -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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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공식 발표했다. 그리스를 지나 오리엔트로 가서 파르티아를 무찌른 뒤 흑해를 빠져나가 도나우강을 제패하면서 그곳을 방어선으로 확정하려는 의도였다. 이즈음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시빌라의 신탁 가운데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할 수 있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 소문의 출처가 된 것이다. 그 해 2월, 로마에서 열린 루페르칼리아 축제의 연회장에서 안토니우스는 왕관을 본뜬 관을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물론 카이사르는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 15일. 생일을 넉달 앞둔 56세에 그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살해되고 만다. 원정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가를 부르며 귀국한 카이사르가 왕위를 바란다면 그때는 어떤 수단을 써도 그의 야심을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죽이려면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전 마지막 원로회의의 장소가 절호의 기회다. 암살자들은 회의가 열리기 직전,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단검을 들고 카이사르를 마구 찔러댔다. 카이사르는 스물 세 군데의 상처를 입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슴에 받은 두번째 상처가 치명적이었다. 죽음을 깨달은 카이사르는 꼴사납게 넘어지지 않도록 토가자락을 몸에 감으면서 쓰러졌고, 잠시 후에 숨을 거두었다. 하필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 입상 아래서였다. 원로원 의사당은 폼페이우스가 지은 것으로 거기에 그의 입상을 세웠는데 카이사르가 집권후 부하들이 그 입상을 들어내었던 바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어 다시 그 자리에 세워 두었다. 폼페이우스가 내려다보는 듯한 대리석 입상아래에서 카이사르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것이다. 암살자들은 부르터스를 앞세워 밖으로 나왔다. 자유는 회복되었다. 폭군은 죽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모두 달아났고, 로마 시민들은 집안으로 숨어 버렸다. 시민의 환호를 받을 줄 알았던 암살자들도 뜻밖의 상황에 겁이 나서 카피폴리노 신전에 숨어 버렸다. 폼페이우스 회랑 한쪽에 쓰러진 카이사르의 유해는 노예들에 의해 수부라에 있는 사저로 운반되었다. 카피톨리노 신전 안에서는 카이사르의 시체를 테베레강에 던져야 한다는 의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3월 16일, 가게를 여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학교도 휴교상태가 되어 버렸다. 부르터스가 연설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연설장으로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우리가 카이사르를 죽인 것은 그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카이사르를 제외한 로마인은 모두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뜨렸다. 군중들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킨나가 등장하여 카이사르를 비난하자 군중들은 연단을 향해 고함을 치며 몰려들었다. 그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신전 안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3월 18일 안토니우스가 혼자서 추도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로마 시민에게 300세스테르티우스씩을 주고 테베레강 서안의 정원을 기증한다. 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낭독하고 고인의 업적을 찬양한 뒤 추도사를 끝냈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우는 불길은 그것은 바라보고 있던 군중들의 가슴에 옮겨붙어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변해, 유해를 태우던 불에 저마다 횃불을 붙여들고 암살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이 꺼져갈 무렵, 세찬 비가 쏟아졌다. 유해를 태운 재를 줍기도 전에 빗줄기가 그것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카이사르는 사람의 손을 거부하는 양, 그러나 로마땅 어디거나 강줄기에 로마와 함께 그는 존재할 것이었다.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한 뒤 황제묘를 만들었으나 카이사르의 무덤은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평범한 무덤 따위는 없는 편이 카이사르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고 <로마인 이야기>에서 말하고 있다. 아비를 죽인 놈(파리키다) 이라고 부르터스는 저주를 받았지만 진짜 암살의 주모자는 부르터스가 아니라 매제인 카시우스였던 것이다. 로마 원로원과 민회는 카이사르가 죽기 1년전 조국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그에게 내렸고 종신 독재관 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개선장군이 개선 당일에만 착용할 수 있는 자줏빛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권리와 월계관도 늘 쓸 수 있는 권리를 그에게 부여하였다. 화폐에다 자신의 옆 얼굴을 새길 수 있는 권리 등 수없이 많은 특권과 영예가 카이사르에게 주어졌다. 한 몸에다 그렇게 무거운 영예를 받은 것은 그의 나이 55세. 그러나 불과 1년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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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2-12 0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