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신여성이 뿌린 이혼 고백서 - 나혜석
나혜석 [羅蕙錫] 1896. 4. 18 경기 수원~1946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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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을 말하는 어느 기록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김명순(탄실), 김원주(일엽), 나혜석(정월) 세 작가는 동시대에 처해 같은 경향의 시를 읊었으며, 실연의 고배를 마셨으며, 그들의 말기가 한결같이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래서 세상은 그들을 비웃었다. 조소하고 조소당하게 한 사람은 남성이었다. 나혜석. 근대 한국의 여류 서양화가로서 또는 염문으로서 이름이 알려진 나 여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일찍부터 미술의 천분을 타고난 여사는 서울에서 여학교를 나온 뒤 곧 동경으로 건너가 여자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도 열심히 하였지만 연애도 열심히 하여 소문이 자자하였다. 시인이며 여류 화가로서 개화기의 문단과 화단에 숱한 화제를 뿌리고 다녔던 정월 나혜석은 원래 경기도 수원 태생이었다. 1896년 4월 18일, 그녀는 용인과 시흥 군수를 역임한 아버지 나기정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세상에 태어났다. 수원의 나씨 일문은 '나부잣집' 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었고, 나혜석의 증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명문으로 권세와 재력을 함께 과시하고 있었다. 위로 오빠 홍석과 경석은 모두 개화에 눈뜬 선각자들이었으며, 신교육을 받고 모두 일본에 유학한 개화 청년들이었다. 혜석은 말하자면 이들 두 오빠의 영향으로 일찍 개명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수원 삼일 여학교를 졸업한 14세의 나혜석은 그해 9월에 서울 진명 여학교에 입학한 재주꾼으로, 학교 성적은 늘 우수했고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혜석의 영광과 불운은 그녀가 진명을 졸업하고, 경석 오빠의 권유로 동경 여자 미술 전문 학교에 입학하여 서양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때부터였다. 나혜석은 당시 조선의 여자들이 집안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전통적인 인습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그녀는 동경 유학생들의 동인지 <학지광> 3호에다 근대적인 여권을 주장하는 글인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여권주장의 한 방법으로 나혜석은 또 동경에서 여성 유학생들의 단체인 '조선 여자 친목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나혜석은 이미 19세의 성숙한 처녀로 성장해 있었고, 그녀의 다정다감하고 적극적인 성격은 동경 게이오 대학 학생 최승구와 가까워 지고 있었다. 나혜석이 주동이 되었던 '조선 여자 친목회'는 1917년부터 동인지 <여자계>를 발간하지만, 이해에 그녀는 사랑하는, 장래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 최승구의 죽음을 맞는다. 최승구는 결핵 환자였는데, 그가 회복하지 못하고 나혜석 곁을 아주 떠나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은 사랑의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그 충격으로 잠시 살고 싶은 생의 의욕마저 잃어버렸으나 그녀는 강했다. '머지않아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해서 교단에 서리라. 발랄한 어린 학생들을 마주 대하다 보면 내 아픔도 가셔지겠지.........' 함흥의 영생 중학교와 서울의 정신 여학교 교단이 귀국 후 나혜석의 좌절되기 쉬운 사랑의 아픔을 씻어 주었다. 나혜석의 아픈 상처를 아물게 한 또 나의 계기는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었다. 그녀는 신여성이었으며 여학교 교사들이었던 신 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황 에스더, 김 마리아 등과 이화 학당 지하실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거족적인 독립 운동의 봉기에 신여성(지식인)들의 참가를 결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이 누설되어 신여성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받은 곤욕, 그녀는 그 곤욕과 사랑의 아픔을 맞바꾼 셈이었다. 첫사랑 최승구의 환상이 완전히 가셔지자 나혜석은 김우영과 자주 만나 제 2의 사랑을 전개시켰다. 김우영은 나혜석이 동경 유학 시절부터 열렬하게 접근해 왔던 청년으로서, 뒷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된다.
..... 그해 여름 방학에 나는 동경에서 귀향하였었나이다. 그 때 우리 남형 오빠를 찾아, 또 나를 보러 겸사하여 우리집 사랑에 손님으로 온 이가 씨(김우영)였습니다. 씨는 그 때 상처한지 이미 2년이 되던 때라 매우 고독한 때였습니다....... 씨는 며칠 후 경성(서울)으로 가며 내게 장찰을 보내었습니다. 솔직하고 열정으로 써 있었습니다. 우선 자기 환경과 심신의 고독으로 취처(아내를 맞음)하여야겠고, 그 상대자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물론 답하지 아니했습니다.
김우영 쪽이 먼저 적극적이엇고, 처음에 나혜석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답장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 편지가 왔다. 나혜석은 짝말한 답장을 써 보냈다. 김우영은 며칠 뒤 파인애플과 과일을 사 가지고 수원 나혜석의 집을 찾아왔으나, 그녀는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러자 김우영은 고향 동래로 내려가면서 동경으로 들어갈 때 편지해 달라고 했다.
무대는 다시 일본 동경.
어느 날 밤, 돌아갈 때였습니다. 전차 정류장에서 내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씨는 뜨겁게 악수를 하고 인하여 가까운 수풀로 가자고 하더니 하느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리었습니다...... 나는 이 열을 받을 때마다 기뻤었습니다. 부지불각중, 그 열속에 녹아 들어가는 감이 생겼나이다.
두 사람의 애정은 실상 동경 유학 시절에 싹텄고, 그 애정은 급기야 결혼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양가 친척들의 권유와 택일을 해서 결혼할 때 나혜석은 이른바 결혼 조건이라는 것을 내세웠다. 첫째,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사랑해 주시오, 둘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셋째,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 주시오.
김우영은 이 모든 조건을 무조건 응낙했다. 결혼. 신혼 여행은 나혜석이 요구하고 결정하였다. "죽은 애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요!" "신혼 여행을?" "그래요!" 남편이 된 김우영은 그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은 첫사랑의 무덤에 비석까지 세워 주어 아내 나혜석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던 것이다. 정월 나혜석의 나이 25세. 그녀는 한국 화단에 새 기록을 남겼다. 첫 개인전은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열렸다. 이것이 이땅의 여류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유화 개인전이었다. 화가로서의 위치가 굳혀지고,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되어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떠나게 된 남편을 따라 나혜석의 마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경성(서울)서 3년간, 안동현에서 6년간, 동래에서 1년간, 구미에서 1년 반 동안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딸 하나, 아들 셋의 소생 4남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로 외교관으로, 유람객으로 아들 공부로, 부로, 화가로 처로, 모로, 며느리로 저 생활에서 이 생활로 껑충껑충 뛰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고,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해 왔고, 노력한 바가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만하면 행복스러운 생활이라고 한 만하였습니다. 씨의 성격은 어디까지든지 이지를 떠난 감정적이어서 일촌의 앞길을 예상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혜석은 달랐다.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살고 싶었다. 그러한 이상은 잦은 충돌을 가져왔다. 덤으로 부부간의 갈등이 생긴 뒤로는 반드시 아이가 하나씩 생겨났다. 31세. 그녀는 남편 김우영과 함께 꿈에도 그리던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난다. 프랑스 파리에서 머문 8개월. 나혜석은 세계적인 미술의 조류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또한 자기 자신의 미술 수련을 위해서도 뛰어다녔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 파리 체류 8개월간이 나혜석 생애의 비극적 사랑이 될 줄이야. 남편 김우영이 독일에 체류중이고 나혜석 혼자 파리에서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숙소에서 요리를 만들고 있는데 최린이 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합쇼?" "아, 어서 오세요. 최 선생님." 나혜석이 만들고 있는 요리도 실상 최린을 대접하려고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최린. 저 분은 얼마나 유명한 분인가. 기미 독립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 아닌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분. 천도교의 도령, 대도정을 지냈고 장로를 지낸 명사가 아닌가.'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을 만난게 영광스러웠다. 그와 접근하고 싶었다. 민족 대표로 존경받는 최린과 깊이 사귀고 싶었다. "나는 최 선생님을 사랑해요. 하지만 내 남편과 이혼은 하지 않을 래요." 최린은 나혜석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과연 당신다운 말이오. 나는 당신 말에 만족하오." 나혜석의 생각은 이랬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 ' 최린과 나혜석은 파리의 식당과 극장을 두루 찾아다녔고, 혹은 뱃놀이를 즐기며 불륜의 사랑에 빠졌다. 그 때의 최린과의 사랑을 뒷날 나혜석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을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부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혜석의 진보적인 생각과 행동은 결국 가정의 파탄을 가져오고야 말았다.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제의했다. 만일 나혜석이 승낙하지 않으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별안간에." "단신이 최린에게 편지하지 않았소?" "했어요." "내 평생을 바치겠소, 하고 편지 안했소?" "그렇게는 안했어요." "왜 거짓말을 해? 하여간 이혼해!" 마침내 4남매의 어머니로, 저명한 화가이자 여류 시인 나혜석은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나혜석은 이미 시와 소설과 유화를 함께 하는 여류 명사로서 사회적인 지위가 굳혀 있었으나 사회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남성 위주의 사회 제도가 싫었고, 도덕과 법률과 인습이 싫었다. 그녀는 이러한 것들에 도전하면서 그녀의 예술을 살찌워 갔다. 김우영은 곧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 설마하고 나편이 자기를 다시 찾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나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이었다. 그 때의 심정을 나혜석은 이렇게 술회한 적이 있었다.
황망한 사막에 선 외로운 섬이었나이다. 모성애를 고수해 보려고 갖은 애를 썼나이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나이다. 죽는 일은 쉽사이다...... 그러나 내 사명에 무엇이 있는 것 같사외다. 없는 길을 찾는 것이 내 힘이요, 없는 희망을 만드는 것이 내 힘이었나이다. 역경에 처한 자의 요령은 노력이외다. 근면이외다. 번민만 하고 있는 동안 타임(시간)은 가고, 그 타임은 절망과 파멸밖에 갖다 주는 것이 었나이다.
우선 나혜석은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일본 정부 주최의 미술가 등 용문인 '제국 미술원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간에 그려 두었던 그림을 팔고, 있는 물건을 전당포에 잡혀서 돈을 만든 다음 금강산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그린, 나혜석으로서는 스스로 걸작이라 자부한 작품 '정원'을 제전에 출품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하룻밤은 입선이 되리라 하여 기뻐서 잠을 못 자고, 하룻밤은 낙선이 되리라 하여 걱정이 되어서 잠을 못 잤다." 그런데 1,224점 출품에 당당히 입선이 되질 않았는가. 나혜석의 기쁨은 하늘에 닿은 것 같았다. 몸이 떨렸다. 신문 기자들이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라디오로 방송이 되고, 세상은 온통 나혜석 한를 위해 생겨난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몸으로 낳은 4남매를 전 남편에게 빼앗긴 나혜석은 걷잡을 수 없는 적막감 속에 빠져 눈물짓는 때가 많았다.
야밤에 눈을 뜨면 허공의 구석으로부터 일진의 바람이 어디선지 모르게 불어옵니다. 그 때 고적이 가슴 속에 파고 펴지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느끼던 고적은 아픈 것은 있었으나 해될 것은 없었습니다. 지금 느끼는 고적은 독초 가시에 찔리는 자국의 아픔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디로부터 와서 가는지 모르는 가운데서 무엇을 하든지 그 뒤는 고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허락할까? 한 사람에게도 허락지 말까?' 이성의 사랑은 무섭다. 아! 무서운 것! 적막한 것이 사람입니다.
전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고 3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혜석은 여권 부재의 사회 제도와 남성 위주의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통박하는 글을 <삼천리>지에 기고한다. 이름하여 "이혼 고백서". 2회에 걸친 이 장문의 글은 나혜석의 분노와 저한이 그대로 담겨진 것이었는데, 그 대담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의 사회 사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고, 이 땅의 여성 개화사에 일대 사간을 일으켰던 나혜석의 일거수 일투족은 이제 모든 신문과 잡지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그녀는 저널리스트들의 시선이 자기 몸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추적해 오자 어디로든 도피해 가고 싶었다. 그녀의 좌절감은 그 이후 더욱 깊어 갔다. 그림도 그려 보고 소설도 써 보았으나 그림이나 글이 그녀의 고독과 좌절감을 매워 주지는 못했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41세 되는 해에, 이미 사랑에 실패하고 삭발 수도승이 되어 수덕사에 내려가 있는 김일엽을 찾아간다. 몸과 마음이 함께 시들어가기 시작한 나혜석은 어디서든 구원을 찾아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수덕사에서 가야산 해인사로 전전하며 방랑 생활을 되풀이하는 그녀의 몸에, 중풍이란 병마가 달려든다. 몸의 부자유, 고독감, 신경 쇠약이 그녀를 비극적인 종말로 이끌고 갔다. 말의 부자유, 육신의 불구, 마음의 고독, 마침내 정신 신경 장애. 그녀는 서울 인왕산 밑 청운 양로원에 수용된다. 48세. 한창 활동할 나이에 양로원이라니........ 50세. 추위가 몰아치는 1946년 연말께, 나혜석은 서울 원효로의 자혜 병원(시립 남부 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천재 화가란 신분을 숨긴 채 홀로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