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돌아올 기약 없는 가실이만을 기다린 -설씨녀
- 설씨녀(薛氏女) 생몰년 미상. 신라 진평왕대에 살았던 열녀. 경주의 율리(栗里)출신. 성씨로 보아 육두품출신으로 보이나 집안은 매우 한미하였다. 굳은 정조와 방정한 품행으로 《삼국사기》에 입전(立傳)되었다. 진평왕 때에 그 아버지가 늙은 몸으로 국경을 지키는 일에 징발되었다. 아버지가 늙었고, 대신할 사람도 없으므로 그는 매우 고심하게 되었다.그런데 평소부터 설씨녀를 흠모해왔던 사량부(沙梁部)출신 소년 가실(嘉實)이 이 소문을 듣고 역을 대신해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아버지는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하였다. 두 사람은 역이 끝난 뒤 혼인하기로 하고, 거울을 절반씩 나누어 신표(信標)로 삼고 헤어졌다.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어 군사들을 교대시키지 않아 6년이 되도록 가실은 돌아오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설씨녀의 아버지는 약속한 3년이 지났으니 다른 사람과 혼인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설씨녀는 약속을 어길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아버지는 드디어 그녀 몰래 마을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혼례일이 되어 아버지가 신랑을 맞아들였으나 그녀는 거절하고 도망하려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가실이 돌아왔다. 야위고 남루하여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자, 가실은 신표인 깨어진 거울을 내놓아 자신이 가실임을 알렸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혼인을 하여 일생을 해로하게 되었다. 설씨녀의 이같이 굿굿한 행동은 한국여인들의 의연한 기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이같은 이야기는 몇 안 되는 고대인들의 연담으로도 흥미를 주지만, 그 속에는 고대사회의 실상을 전하는 바가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백과사전 中 - 고도를 찾아나서는 나그네들은 으레 그 도시가 형성되던 때의 성터를 찾게 마련이다. 성터가 없는 고도는 별다른 역사가 없다. 옛날의 성은 견고했다. 오늘날에 와서 성은 고고학적 가치로만 따져지기가 일쑤여서 관광객의 발길이 잠시 멈춰서는 자리로밖에 환영받지 못하고 있으나 성을 쌓던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가 않았다. 신라 제 26대 진평왕 때다. 왕은 나면서부터 기이한 용모를 가졌고 신체가 장대하며, 의지와 식견이 심원하고 명철하다 하여 백성들의 기대가 컸다. 왕은 왕좌에 즉위(서기 579년)하자마자 왕비 마야 부인을 대동하고 부지런히 내을신궁에 나아가 제사를 지냈다. 왕의 즉위 3년에는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하여 이재 등용에 힘썼으며, 5년 정월에는 선부서를 설치하여 바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어디 위화부나 선부서 뿐이랴. 왕의 즉위 6년에는 조부를 두어 공부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고, 승부를 두어 차승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던 것이다. 왕의 즉위 13년에는 남산성(경주)을 축조하였는데 성의 주위가 자그마치 2,854보라고 하던가....... 왕성의 축조는 태평 성대를 구가하는 한가로운 작업이 아니였다. 서라벌에 도읍을 정하여 신라가 그 역사의 씨를 뿌리고 가꿔 온 뒤부터 내성(궁성)과 외성을 처음 쌓은 왕은 박혁거세로부터 시작되지만, 진평대왕에 축조한 성에다 비기면 모두 하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박혁거세 21년에 왕궁을 세우고 성을 쌓아 금성이라고 불렀던 것을 시초로 파사왕 22년에는 또다시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지만 그 둘레는 기껏 1,023보에 지나지 않았었다. 새로 쌓은 월성 북쪽에 만월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둘레도 1,830보에 지나지 못한 것을 상기해 보면, 진평왕이 서기 591년에 축조한 남산성은 내성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것이었다. 진평왕은 남산성을 쌓기 전에 추상 같은 어명으로 다짐하였다. "만약 남산성이 완공된 뒤 3년 안에 이 성이 무너지는 날이면 너희들의 목을 베리라." 1935년 경주 남산성터에서 발견된 '남산 신성비'는 진평왕의 그 같은 어명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좋은 기념비였다. 남산 신성비에는 서기 591년 왕명을 받고 성을 축조하던 관계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뿐이 아니고 그들의 출생지와 벼슬 이름까지 기록된 것을 보면 남산성에 대한 진평왕의 집념은 알만하다 하겠다. 성에 대한 왕의 집념은 거의 운명적인 것이었다. 오늘날의 경주 인왕동 ->탑동 ->배반동 ->남산동 ->배동로 이어지는 2,954보의 궁성. 남산성을 쌓고도 왕은 두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서쪽에서는 백제의 노략질이 계속되었고, 북쪽에서는 강대국 고구려가 잠시도 침략의 마수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 나간다면 언제 서라벌이 적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될지 몰랐다. 왕은 불안했다. 2년의 세월이 불안 속에서 흘러갔다. 동해로부터 왜구의 침입이 왕의 잠을 앗아갔다. 안되겠다. 왕은 또다시 명하였다. "명활산성을 개축하여 왜구의 침략을 막아라." 진평왕 15년 7월에 명활산성 개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주위가 3,000보, 때를 같이하여 서형산에 성을 쌓으니 주위가 2,000보였다. 동서남북에 견고한 석성을 새로 축조.개축하고 수나라 황제로부터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제수한 뒤부터 왕은 비로소 발을 뻗고 잠들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방 팔방으로 성을 쌓고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쳐도 액운은 쉽사리 물러나질 않았다. 진평왕 24년 여름. 찌는 듯한 8월이다. 이윽고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왕은 곧 백제 군사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귀산과 같은 당대의 명장군을 잃어야 했고, 백제 군사의 내습이 있던 그 다음해 8월에는 고구려 군사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친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나가 이를 막아내기도 했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서울 북방)으로 쳐들어왔을 때 왕은 병부를 통하여 온 나라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동원령의 골자인즉 한 집안에서 장정 한 사람씩을 뽑아 내라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도성의 축성 공사로 나라 안이 뒤숭숭하던 때라 총동원령이 내자마자 변방의 방비를 맡기 위하여 병부로 몰려들었다.
이 무렵 서라벌 율리에 사는 늙은 설씨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는 변방의 수자리(국경을 지키는 일)로 떠나라는 명을 받고 어명을 어길 수 없어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나 늙고 병들어 쇠약한 설씨는 멀리 북방의 국경 지내는켜녕 자기 마을의 좀도둑을 지키기에도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슬하에 아들이 없던 설 노인, 자식이라고는 다만 올해 열여섯난 딸 하나가 가사를 돌보고 있을 뿐이었던 설 노인에게 수자리로 떠나라는 명령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수자리로 떠나는 날이 하루하루 앞당겨 오자 설 노인은 고민 끝에 몸져 눕게 되었다. 그 때부터 늙은 설 노인의 딸은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다. 마을에서는 노인의 딸을 효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사량부에 사는 소년 가실이 효녀의 집 문밖에 나타났다. 소년 가실은 비록 그의 집이 가난하고 누추하였으나 뜻이 곧은 남자였다. 가실은 웬일인지 설 노인의 딸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가실이 설 노인의 딸 효녀(편의상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효녀의 아름다운 용모로 인해서였다. 효녀의 아름다움은 그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이웃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효녀는 이웃 젊은이들의 사랑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몸이었다.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그녀의 가난이 너무 절박했던 것이다. 하나 소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실은 알고 있었다. 가실은 효녀를 짝사랑 나머지 그녀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노예가 되기로 결심했다. '효녀, 나는 네 종이 되고 싶구나. 사랑의 세계에서 노예는 굴욕이 아니잖는가.' 가실이 효녀를 그녀의 집 문 밖에서 만난 것은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이 종군(수자리)으로 떠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효녀, 나는 효녀를 돕고 싶소." 첫마디를 꺼내는 가실의 말소리가 소녀의 귀에 그럴싸하게 들려서 그런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효녀........" "무슨 말씀이신지 찾아온 연유를 어서 말씀하세요." 그러나 효녀는 가실의 내방이 전혀 뜻밖이라는 듯 겁먹은 두 눈을 들어 가실의 행실을 찬찬히 살피는 것이었다. 가실은 그러한 소녀의 겁먹은 두 눈이 더없이 귀엽기만 했다. "무슨 말슴이신지 어서........" "아버님이 편찮으시다지요........" 헛 인사가 아니라 진정 가실은 설 노인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아버님이....... 네, 중태랄 것은 없어도 기동이 여의치 못하시답니다." 그러면서도 효녀는 문득 집쪽을 건너다 보았다. 그러는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금방 이슬이 맺히는 것이었다. 가실은 더 주저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효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땅 위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말하리라, 찾아온 사유를.' 그런데 이 무슨 마음의 변한인가. 가실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 사유가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효녀가 얼마 뒤에, "저를 찾으신 연유를......"하고 재촉했을 때 비로소 그는 효녀의 두 눈방울에 멎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말을 꺼냈다. "나, 가실은 효녀를 위하여 무슨 일이건 기꺼이 해드리고 싶으니 나에게 일을 맡겨 주시오. 내 비록 가난하고 쓰잘 나위 없는 위인이지만 일찍부터 스스로의 지기로서 살아온 사람, 원컨데 불초의 몸이나 엄부군의 행역을 대신하게 해 주시오." 효녀는 울면서 가실의 청을 받아들였다. "가실이! 우리 아버님을 위하여 행역 종군을 대신하겠다 하니 이에서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곧 이 기쁜 소식을 아버님께 여쭙겠으니함께 들어가 보시어요." "그렇잖아도 병석에 계신 그대 아버님을 뵙고 인사 여쭈려던 참인데 잘 되었군여, 들어가십시다." 두 사람은 설 노인이 누워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가실은 그 자리에서 좁전에 효녀한테 들려준 이야기를 반복했다. 노인은 늙은 안면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가실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 위에 얹는다. "가실이...... 가실이! 그대는 늙은 몸이 수자리로 떠나는 것을 대신하여 떠나겠다 하니 기쁘고 송구스러운 마음 이기지 못하겠구나. 그대의 소원이라면 내 기꺼이 은혜를 갚을 생각이네." "은혜를 받자고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옵니다." 가실은 노인의 뜻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노인은, "만약 공이 어리석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줌이 어떠한가?" 하고 가실의 눈치를 살폈다. 가실은 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꿈만 같았다. 평시에 흠모하던 설 노인의 딸을 아내로 맞아 달라니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기분이 아마 이렇겠거니 했다. 노인이 다시 말한다. "공이 부족한 내 어린 딸을 아내로 맞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에게 베풀 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네.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 은혜를 갚을꼬......" 가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노인장. 노인장의 딸을 제 아내로 주신다면 감히 바라지 못할 일인 줄은 아나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노인은 그제서야 가실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안심했는지 이번에는 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 뜻은 어떠하냐?" "아버님이 정하신 일인데 소녀가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효녀는 첫마디에 쾌히 응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마침 중천에 떠 있는 달이 서라벌 넓은 장안을 밝혀 주고 있었는데 가실은 미래의 아내 효녀를 데리고 달밝은 냇가로 밤놀이를 떠났다. "내일 모레면 전방 수자리로 떠나야 할 몸, 간략하나마 혼례를 치르고 떠나고 싶으니 허락해 주오." 가실은 효녀에게 그런 주문을 했다. 그러나 효녀는 달빛 아래서 밝게 웃어 보이고 고개를 젓는다. "원래 혼인이란 인륜 대사이므로 서둘러서 아무렇게나 치를 일이 못됩니다. 내 이미 그대에게 마음을 허락했는데 두 마음을 품을 리 있겠습니까?" "그래두....." "아니됩니다, 가실이. 그대가 변방으로 떠나 부정한 말로 설혹 어찌된다 하여도 나는 그대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일생을 혼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 가실이......." 효녀의 마음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가실은 더 걱정할 것이 없었다. 효녀의 다음 말을 더 들어 보지 않더라도 이미 효녀는 가실의 아내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산다지 않는가. "원컨데 가실이, 그대는 방어하는 곳으로 떠났다가 이 다음에 수자리를 교대하고 돌아오거든 따로 날을 잡아서 혼례를 치릅시다. 어떻습니까, 내 뜻이?" 가실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연 내 아내다운 말이오." 두 사람은 달빛 속에서 얼싸안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었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나는 날 효녀는 품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어 둘로 나누었다. 효녀는 깨어진 거울 반쪽을 자기가 갖고 나머지 반쪽을 가실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이는 헤어지는 신표로 드리는 것이니 뒷날에 가실이 수자리에서 돌아오는 날 두 조각을 합쳐 다시 하나로 만들겠습니다." 가실이도 효녀에게 말 한 필을 맡기면서, "이는 천하의 양마로 뒷날에 반드시 쓸데가 있을 것이오. 어차피 내가 전지로 떠난 다음에는 이 말을 기를 사람이 없으니 바라건대 그대가 이 말을 맡아 길러 주시오."하고 작별한 다음 곧 북으로 가는 종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날부터 설 노인의 딸 효녀는 기다림에 마음 졸이는 여자의 그리움을 배우기 시작했다. 효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메아리 없는 그리움의 반추일 수밖에 없었다. 효녀는 가실의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면 문득 동강난 거울을 꺼내어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앉아 있기가 일이었다. 깨어진 거울 한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거울 속에 가실의 얼굴도 나타났고, 먼 북한산성의 수자리 근처의 솔바람 소리도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기다림의 세월도 형벌처럼 지루한 것이었으며, 형벌과도 같은 그리움의 언저리에 여자의 지친 한숨 소리가 나직하게 방안을 울려 놓기도 하였다. 일년의 세월이, 그야말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흘렀다. 2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3년의 세월이 번개같이 흘러갔다. 진평왕 25년(서기 603년) 8월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온 때부터 신라의 젊은이들은 다른 어느 변방에서보다 북쪽 고구려 국경 지대에서 더 많아 죽어 갔다. 가실이 북한산성 수자리로 떠난 지 5년. 진평왕 30년, 고구려가 번번이 변방을 침범해 오자 마음 약한 왕은 수나라 군사를 청해서 고구려를 칠 것을 결심하고 원광 법사에게 걸사표를 지어 보내도록 명했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망시키는 것은 사문의 할 행실이 아니옵니다. 하오나 신이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어찌 감히 어명을 좇자 어나하오리까."하고 곧 걸사표를 지어 수나라에 보냈다. 그러나 수나라에서는 원병을커녕 걸사표에 대한 회답도 오지 않았다. 이윽고 6년. 가실이 북한산성으로 떠난 지 6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효녀의 아버지 설 노인은, "처음에 가실은 3년을 기약하고 떠났는데 3년의 곱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더 기다릴 수 없구나. 마땅한 곳이 나섰으니 그 곳으로 시집가는 게 어떠냐?" "아버님께서는 6년 전에 소녀가 어떤 까닭으로 가실과 약혼하게 되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딸의 커다란 두 눈에서는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가실이와 헤어질 때 깨어진 거울을 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가실은 거울의 신표를 밎고 6년의 세월을 전지에서 보내면서도 지루하다거나 고되다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내 나이 아흔이 내일 모레라, 너 또한 과년한 여자로서 혼처가 나타나지 않을까 염려되니 아비가 정해 주는 사람하고 혼례를 치르자." 설 노인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님!" "글쎄 내 말대로 다른 데로 시집을 가라니까. 가실이는 벌써 죽은 몸이야." "아버님! 소녀는 6년의 세월 속에서 하루도 가실이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적의 청끝이 코 끝에 보이는 그러한 국경 지대에서 손에서 무기를 놓은 사이도 없이 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서 있는 것 같아 마음 놓을 수가 없는데, 그 신의를 저버리고 가실이와 언약을 잊어 버리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소녀는 결단코 아버님 말씀에 순종치 못하겠습니다." 효녀의 결심이 바뀔 낌해가 보이지 않자 설 노인은 강제로라도 딸을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고, 딸 몰래 마을 젊은이와 정혼을 하고 잔칫날까지 받아 두었다. 가실의 약혼자 효녀는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가실이를 기다린 6년의 세월이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아픔, 이 아픔은 분명 그래움 이었고 사랑이었다. 가실이 처음으로 접근해 오던 때를 그녀는 생각했다. 가실의 용기가 없었던들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효녀는 결심했다. 가실이 그녀를 찾아와 아버지의 행역을 대신하겠다던 용기는 이제 그녀 스스로가 실천에 옮겨야 할 단계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녀는 마구간으로 갔다. 가실이 남겨 놓고 간 말 앞에서 그녀는 가실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 말을 타고 북방으로 가리라...... 북방 국경 지대에 가서 가실을 만나자.' 그 때였다. 형색이 걸인처럼 볼품없고 깡마른 사람이 효녀의 집앞에서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차림새로 보면 영락없는 걸인이었다. 해골처럼 삐쩍 마른 형상이 더욱 그랬다. "설 노인...... 효녀." 걸인은 중얼거리면서 효녀를 찾았고, 설노인 찾았다. 설 노인과 딸이 밖으로 나왔으나 첫눈에 그 걸인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나, 가실이외다!" 가실이. 걸인은 스스로 가실이라고 말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었다. 가실은 깨어진 거울을 품속에서 꺼내어 효녀에게 주었다. '깨어진 거울....... 이별의 정표로서 둘이 나누어 가진 깨어진 거울........' 효녀는 가실의 거울을 받아들고 자기가 6년 동안 품에 지녀 온 거울을 꺼내어 맞춰 본다. 두 조각의 거울은 신기하게 들어맞았다. "가실이, 으, 으흐흐......." 효녀의 입에서는 통곡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고, 두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실이, 돌아왔구려. 여보!" 효녀는 그 걸인처럼 변모한 가실의 품에 안겨서 언제까지고 솟아나오는 눈물을 거둘 생각도 않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