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나라 - 박원재, 최진덕
군자의 나라 2부 - 일상을 지배한 인간의 윤리
공자 가장 특별한 보통 사람
공자 이전부터 중국의 역사 속에선 한없이 복잡한 여러 의례들을 주관하던 사람들을 통해 유학적인 전통이 내려오고 있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유학의 창시자는 공자가 아니다. 한마디로 유학은 기원이 불분명한 사상적 전통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격적으로 유학과 유가의 역사를 이야기할 경우 반드시 그 첫머리에 언급해야 할 인물이 공자이다. 공자가 비록 유학의 창시자는 아닐지라도 장구한 유학의 역사를 연 실질적인 개조는 공자이기에 그를 빼놓고서 유학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나 예수 등의 경우와 달리 공자와 관련해서는 탄생에 연관된 신화를 찾아보기 힘들다.아울러 인생의 전기를 이루는 극적인 깨달음이나 절대자의 계시가 있었던 순간도 찾아보기 힘들다. 즉 공자는 신의 사명을 띤다거나 혹은 어느 순간 깨달은 명확한 철학적 비전을 가지고 인생을 살거나 하지 않았다. 대개의 종교는 깨달음을 얻은 창시자나 신의 계시를 받았던 위대한 예언자로부터 시작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대부분은 우주의 창조 과정을 설명하는 전통적인 신화에서 출발한다. 불교의 역사는 부처가 인간의 어둠을 꿰둟는 진리를 확연히 깨달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거기에는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가 있다. 불교에 따르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인연에 따라 생겨난 산물이다. 따라서 그 어떤 사물도 제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인연이 다하면 흩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는 본래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의 메시지이자 후대 스승들의 메시지이고 불교의 메시지이다. 불교는 유학에 비래 경전의 수가 월등히 많고 그 내용 또한 잡다하지만 팔만대장경과 같이 장대한 경도 사실 위에서 말한 깨달음의 체득을 위한 방편으로 베풀어진 것일 뿐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유대민족 사이에 내려오던 신화에 예언자가 전하는 계시가 결합하며 탄생한 대표적인 종교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은 천지창조의 신화에서 시작하고 신약성경은 예수 탄생의 신화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신화는 기독교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신화들이 전승되어 왔다. 이 점에서는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에는 지고의 인격신이 존재하고 천지창도의 장대한 신화가 전개되는 그리스도교와 아주 유사한 형태의 종교들이 존재했다. 이외에도 고대 중국에는 영웅신과 같은 수많은 인격신 자연 현상을 관장하는 신 등 다양한 신들의 세계가 존재했고 이들을 받들고 달래는 사제들이나 제관 무당들이 존재했다. 이 중에는 조상신, 토지신을 모시는 종묘 사직의 전통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조선조에까지 내려오는 전통이 되었다. 하지만 공자의 탄생과 관련된 신화는 없다. 뿐만 아니라 공자 이전에 쓰여졌으며 유학의 사서오경 중 가장 오래 된 경에 해당되는시와 서를 봐도 거대한 신화로부터 유학의 이념을 합리화하거나 기원을 설명하는 노력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 시대 호머의 시들이나 구약시대 시편과는 전혀 달리 중국의 시에 채록된 시가들 속에는 신화가 아닌 제왕에서 평범한 남녀까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이 있을 따름이다. 서의 첫머리에 나오는 고대 중국의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혹은 도덕적인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해 약간의 손질이 가해진 것일 뿐이다.
물론 시나 서, 논어 등이 기독교의 하느님에 비할 만한 인간세계를 초월한 존재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들 존재는 상제라든가 천으로 불리며 선한 이들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들에게는 벌을 주는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상제나 천은 분명 인간의 평범한 일상세계 안에 존재한다고 하기는 어렵기에 기독교의 하나님처럼 우주를 창조하거나 우주의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는 존재일 수 있다.
공자에 대한 일화 중에도 천이라든가 천명 등 절대적인 존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와 안회에 대한 일화 한토막이다. 안회는 공자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였다. 그런데 빈민촌에서 살면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던 그가 요절하자 공자는 애통함을 참지 못하여 천이 나를 망쳤다 라고 탄식한다. 이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공자가 인간 노력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이따끔 천이나 명 혹은 천명에 대해 언급하곤 하는데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언급은 대개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한계상황에서 나오고 있다.공자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열심히 배우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배움은 인간의 노력에 속하는 행위로 제자들에게도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군자가 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논어는 제일 마지막에 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 고 말한다. 인간세계를 떠나 천의 세계가 부여하는 운명 혹은 필연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이다. 명을 수용하는 것은 결국 자기 삶의 향방을 하늘이나 운명에 맡기고 인간적인 노력을 포기함을 말한다. 공자가 그랬던 것처럼 유학 속에 천이나 천명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은 인간을 넘어선 섹에 대해 유학자들이 가졌던 관심의 일단을 보여 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천명에 대해 지속적은 관심을 갖고 이를 심화 시킨다거나 체계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공자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천명이 지배하는 세상이나 천명을 부리는 절대자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자는 명을 모르고선 군자가 될 수 없다는 선에서 그칠 뿐 명의 세계에 대해 그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인 한계인 죽음에 대해서도 삶을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고 말하는데 그칠 뿐 죽음 너머의 세계로 순례를 떠나지는 않았다. 즉 공자와 유가의 천이나 천명에서는 기독교의 하느님이나 불교의 부처님처럼 나약하고 고통받는 대상으로서의 성격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그 때문에 유교에는 가톨릭의 미사나 개신교의 예배 불교의 법회처럼 모든 사람이 함께 없이 신도의 자격으로 참여하여 절대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을 수 있는 종교적 의례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실제 논어는 공자는 괴력과 난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주자는 이에 대해 공자는 괴이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말하고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덕을 말했으며 어지러움이 아니라 다스림을 말하고 신이 아니라 인간을 말했다 고 주석을 단다. 공자 이래 유가에서는 일상적 삶의 세계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존재의 놀라운 힘에 대한 이야기 즉 괴이한 신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전통이 마련된 것이다.
인간세계를 떠난 절대적 존재로부터 혹은 우주 창조와 관련된 거대한 신화로부터 유학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공자의 진정한 관심사는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화는 생리적 현상처럼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자연적이고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든 작위의 총체로서 지난한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는 배움을 통해 후천적으로 습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배움은 신의 계시를 받거나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깨우치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신의 게시나 철학의 심오한 진리는 배운다고 해서 꼭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계시는 배움과는 무관하게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주어지는 것이고 철학자의 심오한 진리도 스스로 깨달아서 아는 것이다 배움이 없다면 찰힉적인 진리에 대한 깨달음도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배운다고 해서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배움과 무관할 수 있는 생리적 현상이나 신의 계시와는 달리 인위적인 문화란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거나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문화를 배움으로써 어른으로 성숙하고 제대로 인간 노릇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어른이 된 인간은 수독적으로 기존의 문화에 자기를 맞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존의 문화를 기반으로 해서 이를 수정하거나 부정하는 등 능동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게 된다. 결국 배움이란 지나간 옛 문화를 계승하여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여는 중간고리인 것이다. 그리고 타인들의 문화를 일단 배워서 계승하지 않고는 인간으로서의 성숙이 불가능하며 사회적인 삶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문화도 인위적인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자연만큼이나 필연적이고 근원적인 그 무엇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자의 삶을 전하는 논어는 - 초인간적인 신화나 모종의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 문화에 대한 배움이라는 평범한 인간사의 진실에 대한 확인에서 출발하고 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인 논어에 나오는 이 말은 바로 앞서 말한 배움에 대한 강조이다. 실제로 공자는 누가 그 자신에 대해 물을 때면 늘 배우기 좋아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해 버릇했다. 그리고 공자의 이런 말을 책의 첫머리에 배치한 것에서 논어 편찬에 참여한 공자의 후학들 역시 얼마나 배움을 중시했던가를 알 수 있다.
공자는 바로 모든 보통 사람들이 이미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문화와 그 문화 안에 포함된 각종 질서의 배움이 갖는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에 자신의 열학을 두었던 인물이었다.공자를 위시한 유학자들이 말하는 배움이란 문자로 기록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옛부터 축적되어 전해 내려온 문화적 전통에 대한 학습을 의미했다. 공자는 요순시대 이래로 기나긴 세월 동안 인간의 작위적 활동을 통해 축적되어 온 중국의 문화적 전통을 배우고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일생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런데 공자가 당시에 전해지던 중국의 문화적 전통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다 애호했던 것은 아니었다.그가 애호했던 것은 주나라 문화였다.공자는 주의 문화는 하나라와 은나라의 문화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기에 찬란하게 빛난다. 나는 주를 따르겠다. 고 했다. 주나라 문화는 요순 이래 오랜 옛날부터 축적되어 온 고대문화 가운데서 핵심적인 것을 골라 만든 고대문화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누구나 따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주의 문화는 무력 혁명을 통해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자 주 왕실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졌던 주공의 결정적인 공헌속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공자는 꿈에서까지도 주공을 그리워했다. 주공이 건설한 물화는 주공의 아들이 봉해졌던 공자의 고국 노나라에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자 당시 노나라는 중국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지역일 수 있었다. 고대 중국문화의 중심지인 노나라에서 공자와 같은 인물이 태어나고 제자백가 가운데 유가라는 학파가 노나라를 중심으로 생겨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공자가 자신의 고국 노나라에 보존되어 온 주나라 문화를 배우고 가르친 이래로 문왕과 무왕이 세운 주나라의 초기에 주공이 곷피운 찬란한 문화는 모든 유학자들이 꿈꾸는 역사 속의 이상향으로 자리잡는다.
공자가 따르고자 했던 주의 문화, 즉 주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당시 이미 문자로 쓰여져 전해지고 있던 시와 서 그리고 아직 문자회되지 못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예와 악이었다.시서예악은 바로 공자가 생각했던 인간 문화의 가장 바람직한 원형이자 규범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인간의 문화, 즉 인문의 본질은 꾸미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꾸미는 행위의 기본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나누는 행위 즉 분절에 있다. 선과 악을 나누고 인간다움과 야만스러움을 나누는 문화의 특성은 이러한 분절의 행위에 기초한다. 오경의 모태가 되는 시서예악의 공통된 본질 역시 바로 이 분절에 있다. 시는 언어를 분절하여 운을 맞추는 데서 성립한다. 서라는 역사 기록은 역사적 사건은 분절하여 본받을 만한 좋은 일과 본받지 말아야 할 나쁜 일을 구별하는 데서 성립한다. 그리고 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분절하여 서로 적절한 거리를 취하도록 하는 데서 성립하고 악은 자연적으로 울려나오는 소리를 분절하여 듣기에 좋은 음악을 만드는 데서 성립한다. 시서예악을 더욱 확장하고 정비하여 경전화시킨 오경도 모두 분절 행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분절은 모두 공토오디게 서로 대립하는 두 요소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오경 가운데 역과 같은 경전은 인간과 자연의 모든 변화하는 현상을 우선 음과 양으로 분절해 놓고 설명한다. 한 번은 음이 되고 한 번은 양이 되는 것을 도라 한다고 역의 계사전은 말한다. 결국 인간의 문화는 어떤 것이건 음양처럼 서로 대립하는 두 요소로 분절하지 않고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항대립은 분절 행위의 기초이다. 문화를 이룩하는 인간의 정신 자체는 언제나 이항대립 위에서 사유하게 되어 있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의 분절 속에서 좋은 것을 취하고 아름다움과 추암희 분절 속에서 추함을 피하자고 하는 것이 인간 문화의 공통된 특성인 것이다. 공자는 시를 통해 감동하고 예를 통해 바로 서며 악을 통해 완성된다는 말로 시서예악의 배움이 갖는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이 말에 비춰 본다면 공자에게 있어 시서예악이란 인간이 배우고 익혀야 할 문화의 가장 근본된 구성 요소인 셈이다. 공자는 결국 시서예악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문화를 만들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기본 정신과 틀을 담아 내고자 한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이미 30대 무렵부터 옛 문화에 대해 누구보다도 해박한 학자로서 그리고 이를 알기 쉽게 잘 가르치는 교사로서 천하에 그 이름이 높았다. 그의 이름은 공구로 구는 언덕을 뜻하는데 그의 머리 모양을 빗대서 생긴 이름이라는 말도 전한다. 유학자라면 으레 열기도 없고 습기도 없는 말라 비틀어진 인간이겠지니 하는 편견을 가지기 쉽다. 하지만 그런 공자의 이미지를 상상한다면 이는 매우 큰 잘못이다. 공자는 흔히 생각하듯이 완고하기 짝이 없는 도덕군자의 원조라기보다는 2미터나 되는 엄청난 키에 다양한 유머의 소유자로 활쏘기나 낚시를 좋아하는가 하면 음악도 무척 좋아했던 인물이다. 공자께서 평소에 늘 말씀하시던 것이 시와 서 그리고 예의 집행이었다고 논어는 전한다. 공자는 시서와 예는 물론 특히 음악을 좋아하여 어떤 고전적인 음악을 듣고는 너무 좋아서 몇 달 동안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를 정도였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다. 이런 공자는 당시 사람들에게 단순한 학자나교사 이상의 매력을 지녔던 존재였다. 그 매력의 정체가 무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당시의 우수한 젊은이들이 노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각지에서 그의 문하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는 시서예악을 가르쳤는데 제자가 삼천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서예악이라는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배움을 통해 인간이 비로소 인간으로 도야될 수 있다고 믿었던 공자는 이를 통해 터득한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현해 보려는 꿈을 갖는다. 실제 그는 50세 이후 노나라의 법무장관이라는 고위관리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제후를 찾아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춘추시대 중원 일대응 방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제후들의 차가운 냉대와 생사고비의 위기를 넘기며 다시 고국 노나라에 돌아와야 했던 공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늘 그리던 주공에 대한 사모의 정을 피력하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한탄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 바깥에 있는 천이나 천명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가 하면 아예 홀가분하게 인간세계 바깥에서 숨어 사는 은자들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논어에서 음미해 볼 대목이 가능한 것도 없고 불가능한 것도 없다는 공자의 말이다. 자신에게는 외곳의 긍정도 없고 외곳의 부정도 없다는 뜻이다. 즉 공자의 언행은 삶의 다양한 문제와 고뇌를 따라 때로 흔들리곤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유학에 내제해 있는 이 같은 다양한 가치 사이의 불협화음은 논어에서 이미 분명하게 나타난다. 허심탄회하게 논어를 읽고도 이런 흔들림의 징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게으른 독자일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보여 준 이런 미묘한 흔들림은 사실 공자만의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세상에 나가 적극적으로 뭔가를 이뤄 보려는 마음도 누구에게나 있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산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아주 중요한 것은 공자의 이런 헷갈림 속에는 보통 사람이 넘볼 수 없는 모종의 균형감각이 있다는 점이다. 공자의 언행이 보여 주는 흔들림의 진폭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일상적인 모습이다. 세상에 나가 적극적으로 뭔가를 이뤄 보려는 마음도 누구에게나 있지만 또한 누구에게나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산 속으로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만 아주 중요한 것은 공자의 이런 헷갈림 속에는 보통 사람이 넘볼 수 없는 모종의 균형감각이 있다는 점이다. 공자의 언행이 보여 주는 흔들림의 진폭은 인간이 살고 있는 일상적 세계의 범위와 거의 일치한다. 공자의 삶은 세속을 떠난 무위자연의 세계, 혹은 명이 지배하는 절대자의 세계, 인간의 욕망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역사의 현장을 맴돌았다. 그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세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자의 삶은 그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묘하게 중심이 잡혀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맹자는 공자를 두고 시중의 성인이라 칭송하였다. 시중의 성인이란 늘 변화하는 상황에 딱 들어맞게 행동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바로 여기에 특별한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보통 사람 공자의 미묘한 매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논어가 애매모호하면서도 때로는 묘한 감동과 매력을 주는 것은 삶의 다양성이 맞부딪히는 선택의 기로에서 흔들리며 고뇌하는 인간의 자취가 있으면서도 균형의 멋과 그윽한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융통성 없이 하나의 가치를 어떤 상황에서건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은 유학의 본령이 아니다. 그리고 물맛처럼 자극적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데도 묘한 맛을 지니는 논어라는 책의 비밀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공자는 다른 누구이기 이전에 역시 문화적 전통을 배우는 자요 가르치는 자였다. 공자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일상적 세계를 넘어서는 고원하거나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일상적 삶에 필수불가결한 문화적 전통이다. 공자는 문화가 있고 예라는 질서가 있는 이 인간세계를 넘어서는 해탈이나 구원을 추구하지 않았고 인간세계의 질서를 모조리 뒤집어 버리고자 하는 혁명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자는 신의 계시를 받은 예언자나 심오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로 자신을 소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었던 심오한 철학자도 아니었다. 공자는 바로 옛부터 전해 오던 문헌과 전통을 배우고 가르치고 편찬함으로써 아직 미미한 흐름에 불과하던 유가에 인간세계의 보편적인 이상과 비전을 제시했던 인물이다. 물론 세월이 흘러 공자는 성현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하지만 공자는 자신을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를 한없이 추모하는 후대 유학자들의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 논어는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거의 같은 형태의 책으로 만들어졌기에 공자가 활동하던 시기와는 일정한 시차가 있다. 하지만 공자의 본래 모습을 보여 주는 책으로는 논어보다 더 믿을 만한 것을 없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 역시 도저히 일관되게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하다. 논어에는 도가적인 요소도 있고 법가적 요소도 있고 묵가적인 요소도 있으며 명가적인 요소도 있다. 이것은 유학이 법가나 도가와 같은 유학 아닌 것들과 이웃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가는 제자백가의 학파이면서 동시에 제자백가의 원조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공자는 자신의 문하에 모인 제자들에게 소인유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라고 가르쳤는데 이 말로 보면 유학적인 전통을 계승한 유가라는 모종의 집단의식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공자 당시에 다른 학파들과 대립하며 명확한 학파의식과 특별한 학문적 이론을 가진 유가라는 집단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실제 논어에는 제자백가가 말하는 온갖 사상의 원천이자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성격의 내용이 혼재되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시서예악을 배우는 학파를 유가라 부르고 이를 제자백가의 다른 학파와 구별한 것은 빨라도 전국시대 이후의 일이다. 제자백가는 공자 이후에야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것이다. 이미 공자의 가르침에는 제자백가에 속하는 각 학파의 가르침이 조금씩이나마포함되어 있다. 제자백가를 도가니 법가니 하는 식으로 구분한 것은 한대 역사가들의 분류 방식일 뿐이지 원래 그러한 학파들이 공자 때부터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국 인문주의의 원형을 만들다
유교라는 별칭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종교로 볼 근거는 없다.물론 정치나 도덕의 세계 그리고 종교의 세계 사이에 절대적인 구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유학은 늦어도 공자 이후가 되면 종교적 관심이 현저하게 사라지고 정치와 도덕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인간세게로 관심을 집중한다. 유학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사이에 한대에 도교가 성립하고 불교가 수입되면서부터 중국에는 이른바 유불도의 삼교가 정립한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도교나 불교와도 달랐던 유학의 사회적 기능이었다. 불교나 도교는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추구하기도 했던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에 비해 유학은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는 리얼한 역사의 현장에서 도덕에 기초한 바람직한 인간 삶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중국의 당나라나 한반도의 고려 시대는 도교나 불교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유학은 그 나름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었는데 이는 통치 엘리트들을가르치기 위한 학문으로서 유학이 갖는 기능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에서 신앙의 대상이나 귀의해야 할 궁극적인 대상을 가진 종교의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빼고서 유학을 말할 수야 없지만 유학의 예는 종교적인 의레가 아니다.
물론 유학에서도 최고의 존재로 막연히 상제나 천을 생각하며 이를 숭배하는 의식을 치르지만 그것을 치를 권한은 오직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천자에게만 허용되었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의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권위를 꾸미기 위해 행하는 상징적 행위 가운에 하나였던 셈이다. 도덕이나 정치는 인간의 평버한 삶에 속하는 일로 사라모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고 따라서 상대적이다. 그러나 다양성과 상대성이 지나치면 인간사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상제와 천은 이런 점에서 정치적 행위와 도덕적인 판단에 권위를 부여하고 세속의 일정한 질서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상징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관혼상제의 예나 국가의 전례는 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유학은 이를 체계화하여 종교로 연결시키지 않았고 설사 이러한 상제나 천에 관련된 종교적 측면이 있다 해도 도덕과 정치라는 현실적 목적을 위해서만 그것을 언급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상제나 천을 말할 때에도 죄악과 고통에 물든 세계 소소한 인간들의 주장이 넘치는 인간의 세계 너머에 있는 초월적 세계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유학자들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도덕과 정치가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의 현실적인 삶에 있었다.
흔히들 유학을 종교라 부르면서 조상신을 숭배하며 상례나 제례를 중시하는 전통에서 유학의 종교적 특징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 중국의 고대사회에는 조상신을 중히 여기는 전통이 내려왔었고 공자 당시부터 유가의 중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한없이 복잡한 의례의 절차를 교육하고 주관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유학은 전국시대의 다양한 제자백가 사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강한 사상이었다고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여타 종교에서의 의례 행위가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평범한 일상 너머에 있는 거룩한 세계 신의 세계와 만나기 위한 통로가 된다는 점 때문이다.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거나 세속을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이다. 종교 의례에서 손을 씻고 음식을 취하는 것은 청결과 건강을 위한 혹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속의 때를 벗기고 종교에서 말하는 보다 가치 있는 세계로 가기 위한 신성한 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일상적 행위라도 세속의 일상을 초월한 초세속적인 의미가 부여됨으로써 종교적 의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학의 의례는 일상적 삶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죽은 자를 기념하는 의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려야 하는 인간세상에 늘 있는 일상적인 사건이지만 여타의 일상적 사건과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의 한계를 알려 주는 가장 극명한 사건인 동시에 인생의 모든 가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일대 사건이다. 즉 죽음은 한 존재가 인간의 세계를 떠나는 초일상적인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는 인생이 무의미해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죽음은 종교가 자라나는 터전이 된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종교란 것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불안을 먹고 사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은 삶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이후에도 연속되는 세계와 가치가 있다는 가르침을 내놓았다.
그런데 유학은 죽음 자체나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상례에서 중요한 것은 죽음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을 꾸미는 장례식의 구체적인 절차이며 제례에서도 중요한 것은 죽은 자와 사후의 세계에 대한 기념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이 행하는 제례의 구체적인 절차이다. 산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듯 죽은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키되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드르이 이쪽 세계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여러 의례를 행하는 것도 결국은 삶의 세계 살아 있는 사람들으 위해서이다. 유학의 살예나 제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사건까지도 산 자들이 모여서 질서를 이루고 사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이 세계 안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문화를 가꿔 나가고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세계는 갖가지 질서가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이다.정치를 하거나 교육을 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밥을 먹거나 옷을 입을 때에도 질서가 있다. 인간의 일상적 삶을 규제하는 이런 질서들의 총체가 곧 유학에서 말하는 예이다. 이 세계에 인간이 한 사람밖에 없다면 예는 있을 필요가 없다. 예는 언제나 두 사람 이상의 관계를 전제한다. 예는 사람과 사람을 일정한 간격으로 나누고 그 간격을 어떻게 꾸며 갈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예는 언제나 나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이고 세속적인 세계이다.다양한 의례 절차를 중시하는 유학에 있어서 궁극적인 관심사는 종교가 참여하고 철학이 물음을 던지는 죽음의 의미나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이다.따라서 유학의 여러 의례들은 종교적인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유학은 초일상적인 사건에 대해서까지도 일상적 의미를 부여해 버림으로써 그것을 세속화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에 집착하지 않은 유학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철학도 부재한다. 인간이 결국 죽음에 의해 끝나 버리는 허무한 존재임을 못내 아쉬워하는 종교나 철학은 죽음 너머의 절대적인 존재를 찾거나 절대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초월의 길을 발견하고자 애쓰게 된다. 그래서 철학에는 늘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의 중심에 있게 마련이고 철학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장황하면서도 논리정연한 답을 구하게 된다. 물론 모든 답은 잠정적인 것이었고 하나의 답은 늘 새로운 물음으로 이어졌다.
희랍시대 이래 서양철학의 중심에는 궁극적인 존재를 찾는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 있었다. 존재론은 온갖 잡스러움이 뒤섞인 채 항상 변화하고 있는 일상적 삶의 세계 너머에서 영원 불변하는 존재가 무언지를 찾아 규명하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이런 질문에 대한 싱화적인 해답이 종교하면 철학은 이성에 호소하여 그 해답을 구한다. 얼핏 신화에 기반한 종교와 이를 합리화하려는 신학은 척학과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훑어 보면 미토스와 로고스는 근본적인 방향에서 상당히 일치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미 니체가 정확하게 지적한바 있듯이 플라톤의 철학이나 기독교의 신앙 그리고 기독교의 신학은 표현 양식은 서로 다를지라도 모두 지겹게 반복되고 그래서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이 세계 너머에서 영원 불변하는 참된 존재와 절대적인 가치를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공자도 일찍이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뚫어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의 도가 무엇인기 스스로 분명하게 밝힌 적이 없다는 점이다. 어쨋거나 공자가 말하는 하나의 도를 신적인 것 혹은 참된 존재와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전혀 얘기가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합리적인 눈으로는 논어라는 한 권의 책 속에서 일관된 하나의 도를 찾기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논어에는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이 눈에 뜨이지 않는 대신 단편적이고 비논리적인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들이 빼곡히 차있을 뿐이다. 흔히들 인이 하나의 도, 즉 유학의 이념이라고말하기도 하지만 별반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논어에서 인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인이란 글자가 106번 등장하는데 등장할 때마다 의미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로 상충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인은 사랑이기도 하고 미움이기도 하다. 실제 공자는 중용에서 인자만이 남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공자는 인을 남을 사랑함이라 풀기도 하고 극기복례라고 풀기도 한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을 하나로 합치려 하는 반면 예는 사람과 사람을 혈연의 친소관계나 신분의 상하관계에 따라 적당한 거리로 떼어놓으려 한다. 예는 기독교 신약성서에서 비난하는 구약시대의 율법과 그 본질이 비슷하다.사랑과 대비한다면 예는 미움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인을 어짐이라 풀이하지만 이는 매우 불충분한 번역인 것이다.
논어를 읽고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잘못 읽은 것이다. 논어만 보아도 이처럼 그 내용이 잡다한데 사서오경 더 나아가 십삼경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런 이념을 찾아 낸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송명이학처럼 예외라고 볼 소지가 있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송나라와 명나라 시대에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면서 유학이 새롭게 부활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유학을 흔히 송명이학이라 부른다. 송명이학은 대개 주자학과 양명학으로 나뉘는데 이기심성을 따지기 때문에 얼핏 보면 그 이전 어떤 시대의 유학보다도 철학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송명이학자들은 대자연의 질서인 이에는 인간의 도덕적 질서의 원천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본성 자체가 도덕적이라는 것 이것이 송명시대 유학의 흐름을 대별하는 주자학과 양명학을 관류하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이는 자연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 역시 일상적 삶의 세계에 충실하려는 공자와 맹자의 평이한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이 혹은 성은 늘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기 즉 음양오행의 순환적 법칙 외에 특별한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낮이 가면 밤이 오고 사계절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대자연의 질서가 이이고 성이다.또한 이는 자연적인 질서 그 자체라는 점에서 변화하는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차이가 있고 동시에 인간이 인류적 가치 그 자체라는 점에서 좋고 나쁨 등의 가치가 배제된 근대 자연과학의 자연법칙과도 차이가 있다. 즉 공자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학은 서양이나 인도에서 흔히 보는 그런 철학도 아니다. 유학은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명쾌한 진리 불변의 진리 혹은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을 일사불란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원리나 도를 구하는 것은 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며 유학 속에는 이러한 일관된 메시기자 담겨 있지도 않다. 따라서 유학의 진리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누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에 따라 진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학은 늘 변화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삶에충실하고자 했던 실용주의 정신을 지켜 왔고 언제나 실학이기를 원했던 학문이었다. 제왕의 삶으로부터 선비나 일반 평민 같은 사람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늘 변화하는 다양한 일상적 삶의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잡다하기 짝이 없는 노숙한 지혜들의 총합이 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결국 공자에 의해서 실질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던 유학은 종교나 철학이 아니다. 유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종교나 철학의 범주를 떠나서 동아시아의 상식을 지배해 왔던 학문이었다.그리고 공자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학에 의해 동아시아 문화의 독특한 원형이 마련된다. 동아시아 문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이고 그 무대는 자연이다. 즉 동아시아 문화의 핵심은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과 교감을 나누며 사는 인간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 무대를 본질적으로 벗어나는 제 3의 존재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동아시아인들은 인간은 자연에 싸여 무리를 이루고 살면서 결국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혹은 자연의 힘으로 풀 수 있다고 보았고 자연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있는 벽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살다가 지친 이들은 경서라는 책으로 돌아가 성인에게서 삶의 가르침을 받거나 인간이 없는 자연으로 물러나 잠시 쉴 뿐이지 전혀 다른 세계 신의 왕국으로 떠나 버리는 것은 동아시아인들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이를 일러 중국적 인문주의라고 부른다. 공자와 그의 유학은 이러한 중국적 인문주의의 원점에 서 있다.여기서 말하는 인문주의는 물론 인간중심주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적 인문주의 속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요소도 없잖아 있지만 인간중심주의의 정반대인 자연중심주의도 포함된다. 공자의 이런 유학에 의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이 자리잡히며 특정의 종교가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던 전통이 마련되어 간 것이다.
사서오경 2000년의 문화 답사기
신비한 세계를 구하거나 심오하고도 체계적으로 완성된 이론을 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가의 지식은 잡설이고 경전은 잡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서오경은 어느 경전이라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렇듯 유학은 심오하지 않고 평범하지만 바로 여기에 유학의 본질이 있을지도 모른다.유학의 품격을 높여 보겠다고 유학을 너무 심오하게 보려든다면 오히려 유학의 너무 심오하게 보려든다면 오히려 유학의 본질을 왜곡할 우려마저 있다. 유학의 이 같은 특성은 유학의 경전인 사서오경과 이것들에 대한 다양하기 짝이 없는 해석의 역사 즉 경학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유학에서 경으로 떠받드는 책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유학의 경전은 여러 개의 숫자가 자꾸 늘어 가는 경향이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중요시되는 경전도 자꾸 바뀐다.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일관된 메시지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 듯하며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다. 공자는 유학의 창시자가 아닐뿐더러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학의 경전인 사서오경의 작자도 아니다. 이미 이러한 사실은 20세기 이후 유학의 여러 경전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예로 경에 흔히 등장하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말은 공자가 이들 문헌의 작자일 수 없음을 알려 주는 증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가 사서오경과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니다. 공자는 시서예악에 관한 문헌들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오경으로 경전화되기 이전부터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시서예악의 문화적 전통을 배워 자신을 가꿨으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서예악의 문화를 수집해 스스로 정리했다. 중년 이후에는 그 내용을 교재로 삼아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때문에 공자는 계승하지만 창작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적어도 중국 고대문화를 가장 잘 계승하고 집대성했던 것이다. 물론 오경 모두를 성왕이 제작하고 공자가 산정했다는 한대이후 후대 유학자들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분명히 오경 속에는 공자 이후 전국시대 내지 진한시대 유학자들의 말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왕이 오경을 제작했다는 말을 오경의 모태가 되는 시서예악 모두가 요순 이래 오랜 문화적 전통의 산물로서 훌륭한 제왕의 통치에 꼭 필요한 문화적 도덕적 장치였다는 말로 새긴다면 후대 유학자들의 말을 다 틀린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시서예악이 유가하고 불리는 한 학파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공자가 배우고 가르쳤던 시서예악은 요순시대 이래로 축적되어 온 중국문화의 정수이다. 사서오경은 모두 유학자들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잡다한 문화적 전통 가운데서 진리 혹은 도로 믿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섭취하여 잡다하게 모아놓은 책들이다. 시서예악은 그것의 가치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관계없이 춘추전국시대 이후 중국의 요양인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자라는 한 개인이나 유가라는 학파를 넘어 중국인들이 공유하던 문화유산의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를 비롯해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두고 유가라고 부르지만 실은 다른 학파와 명확하게 구별되는 이념을 가진 하나의 학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공자가 오경 혹은 육경을 산정했다는 말 역시 공자가 시서예악을 중시하여 이를 정비했고 공자의 이 같은 인문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후학들이 시서예악을 계속해서 정비해 오면서 이것이 오경이 되었다는 뜻으로 새기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오경은 경전화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공자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문화적 전통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시서예악이 있고 공자가 있고 오경이 있게 된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잡다한 경서 중에서 어느 경서가 늘 절대적인 중심의 역할을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시대에 따라 유학의 학파에 따라 혹은 유학자 개개인에 따라 일상적 삶의 잡다한 여러 측면들 가운데 강조하는 측면이 달라지게 마련이고 강조하는 측면이 달라짐에 따라 중심이 되는 경전도 달라지게 된다.
자연세계로의 퇴행을 동경할 때에는 역이 중시되고 역사세계에의 도덕적 참여를 고취할 때는 춘추가 중시된다.제왕에게 백성을 위하는 올바른 정치를 권유할 때는 서가 중시되고 제도개혁에 적극적일 때는 주례가 늘 중시된다. 내면의 슬픔과 증거움을 시로 표현할 때는 시가 중시되고 일상적 삶에 필요한 갖가지 의례의 규칙이나 행위의 규범을 따질 때는 예가 기준이 된다. 한나라 무제가 유학을 유일의 공식적인 국가교학으로 승인할 때에는 오경뿐이었는데 오경에는 공자 당시부터 교재로 쓰이던 시와 서를 위시해서 예와 역과 춘추가 포함된다. 시는 궁정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가를 채록해 놓은 책이고 서는 요순이래 주초에 이르기까지 역대 제왕들의 훈화를 기록해 놓은 책이다. 예는 천자부터 사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각종 의례의 규칙과 행위의 규범을 기록해 놓은 책이고 역은 고대로부터 전해진 점을 친 기록들을 모아 이를 64괘의 순서로 배열해 놓은 책으로 유학의 자연철학을 보여준다. 춘추는 노나라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연대 순으로 기록한 역사서이다. 오경에 악을 더해 육경이라 말하지만 악은 문자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은 정식으로 경서에 포함될 수가 없다.오경을 결정하는 기준은 먼 옛날 선왕이 제작하고 무관의 제왕 즉 소왕공자가 산정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전국시대 말부터 유행하던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이다. 동한시대에는 오경외에 효라는 가치를 극도로 높인 효경이라는 작은 책과 공자의 후학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가 첨가되어 오경이 칠경으로 확대된다.당나라 때에는 경서의 수가 아홉으로 늘어 구경이라 불리게 된다.원래 예에는 국가의 행정제도를 구상한 주례 주로 상의 각종 예절을 기록해 놓은 의례 각종 예절과 그 원리를 설명하는 예기가 포함되는데 이것들을 흔히 삼례라 부른다. 또 춘추에는 세 가지 상이한 주석서로 좌전, 공양전, 곡량전이 있는데 이것들을 춘추삼전이라 부른다. 여기서 전이란 해석을 의미한다. 삼례와 삼전을 모두 경으로 격상시키고 여기에다 원래부터 오경에 포함되어 있던 역, 시 , 서를 더하면 모두 구경이 된다. 송나라에 오면 이 구경에다 논어와 효경 그리고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맹자와 일종의 사전인 아이까지 합쳐 십삼경으로 확대된다.
칠경과 구경에 속하는 경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지만 늘어나 마침내 십삼경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의 인상적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라면 무엇이건 경전 속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경전의 수가 자꾸 늘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 십삼 종 경서의 내용이 매우 잡다하여 그 사이에 일관성이라고는 별로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춘추처럼 인간들이 서로 치고받은 역사적 사건들을 간단하게 기록해 놓은 경서가 있는가 하면 역처럼 인간의 혼탁한 역사를 넘어 대자연의 변화 법칙을 말하는 경서도 있다. 주례처럼 한 국가의 행정제도를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경서가 있는가 하면 시처럼 엄숙한 궁정의 시가에서부터 음란한 유행가의 가사까지 다 채록해 놓은 고대 시가집도 있고 또 의례나 예기처럼 사적인 영역의 자질구레한 예의범절을 보여 주는 경서도 있다. 부모를 하느님처럼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맹자와 효경도 있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논어도 있다. 이다양한 경서들 사이에 어떤 일관성이 있는지를 알기란 어렵다.심지어는 하나의 경서 가운데서도 일관된 메시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경서와 경서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의 경서 안에서 간단 멸료하게 정리될 수 있는 일관되 메시지를 찾아 내는 것은 뒷날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자들이 내린 자의적인 해석의 결과일 뿐 애당초 유학의 경전들 속에 그런 것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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