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나라 - 박원재, 최진덕
군자의 나라 2부 - 일상을 지배한 인간의 윤리
사서오경
지금 유학은 왜 매력없는 학문인가? 때는 조선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고 있던 고종 31년이었다. 이해 조선조 오백년을 지배했던 사서오경 중심의 유학에 마침내 황혼이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사건 하나가 역사에 기록되었다.조선조가 이 땅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과거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이다.그 배경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유학 중심의 관거제가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을 떠나서는 폐지의 원인을 생각할 수 없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에는 사서오경을 암송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변화한 시대의 요구에 이제 더 이상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다.실로 고려 광종 9년 이래 936년간 지속되어 온 과거제도가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과거는 단순하게 말하면 정부의 관료를 뽑는 시험제도이다.그러나 이제도가 조선이나 중국에서 지녔던 의미와 영향력은 깊고 넓었다.지난 역사는 익히 알고 있는 대로 경제적 토대가 농업에 국한된 시대로 다양한 사회적 활동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꿈을 펼치려 한다 해도 그 통로는 매우 제한 될 수밖게 없었다. 더욱이 중국이나 조선의 전통은 칼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설득력과 대의명분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문치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다.결국 무리적인 힘으로 세상을 평정할 수밖에 없는 난세가 아니라면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어 뜻을 펼치는 것이 거의 유일하고 일반적인 방법이었다.세상사에 참여할 포부와 역량을 갖춘 인재에게 부와 명예를 선사함은 물론 합법적인 권력을 안겨주는 제도가 유학 과목의 필기시험을 중심으로 한 과거제였던 셈이다. 따라서 과거제도의 폐지는 조선 반도에서도 한자문화권의 유학적 전통을 견지할 수 있게 해주던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져 버렸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이미 세계는 알파벳 문화권에서 시작한 근대사상에 의해 뒤덮여 가고 있었다. 실제로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지구상의 수많은 다른 나라처럼 공식적인 학교 교육의 내용과 형식을 서양의 근대학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오늘날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진 공교육의 양대 목표는 엔지니어나 테크노크라트의 양성이다. 지금의 유학은 회고의 취미를 가진 한학 전문가나 극소수의 대학교수용 학문일 뿐이다.제대로 말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물론 존경받는 지배 엘리트의 반열에 올라가기 위해 꼭 익혀야 했던 사서오경의 학문이 도도하게 밀려오는 서양 근대의 학문 앞에 처참하게 패배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1910년 조선조의 멸망을 전후하여 많은 유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아니면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핏빛이 너무나 아름다운 이 사건들은 조선조 선비들의 대쪽 같은 의리의 정신이 표출된 것이었지만 동시에 변화한 시대 현실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한 학문이 몰락함을 알리는 허무한 낙조이기도 했다.조선조의 유학자들은 자신의 올바른 생각이 당대에 이해받지 못할 경우 더러 백세뒤의 군자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먼 훗날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백세뒤가 아니라 100년도 채 안 되어 우리는 지금 너무도 다른 세계를 살고 있고 21세기라는 또 다른 세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변화하는 학문의 유행 속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학문의 운명이 그 자체의 진리 여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진리 자체는 영원 불변할 수 있지만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바로 이 때문에 어떤 학문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고 반대로 어떤 학문은 공허한 학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령 희랍시대에는 논리적 언어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이 로마시대에는 웅변술을 가르치는 수사학이 서양 중세에는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신학이 모든 학문의 으뜸이었다.그러나 근세에 들어서는 수학으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자연과학이나 새로 등장한 근대 시민사회의 다양한 사회 현상을 규명하는 사회과학이 학문의 으뜸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과 백년 전까지 조선인에게서 절대적인 숭상을 받았던 경학 ,즉 사서오경을 읽고 외우고 생각하는 학문경향에 일대 변화를 초래한 것일까? 장구한 시간 동안 훌륭한 조선인이라면 평생을 걸쳐서 배워야 했으며 또한 조선의 아름다움과 지혜가 간직된 학문인 경학이 무엇 때문에 역사의 주무대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일까? 새로운 근대문명 속에는 기존의 유학이 쉽게 대응할 수 없었던 새로운 문제의식이 있었다. 즉 서양 세력이 너른 바다를 건너 동아시아에 밀려왔을 때 이는 단지 월등한 성능을 자랑하는 총과 대포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신식무기의 뒤에는 근대문명과 그 주인공인 근대인들이 있었다.새로운 문명에 맞닥뜨린 조선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아야 했는데 이는 다른 동아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바로 그것은 근대성을 쟁취했던 인간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위력이었다.
근대문명은 일찎이 기독교가 쳐놓은 중세의 울타리를 뛰쳐나오며 서구인들이 새롭게 형성한 문명이었다.이 문명의 중요한 특징은 - 여러 면에서 복잡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지만 - 중세 기독교의 엄숙한 종교적 장막에 짓누려 있던 인간의 삶을 해방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긍정했다는 점이다. 이때의 세속적인 욕망은 돈에 대한 욕구이면서 권력에 대한 욕구이기도 했다. 근대 서양인들이 만든 자연과학은 인간 이성에 의해 엄밀하게 고안된 수학을 자연세계에 적용함으로써 다른 어떤 방법보다 자연의 질서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문이다. 이로 인해 근대인들은 때로는 두려움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던 자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손쉽게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과학이 불러온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재화의 엄청난 생산은 물론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위력적인 무기의 생산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법률학, 행정학, 경제학, 정치학 등으로 대별되는 근대 서양의 사회과학도 물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동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장치였다.사회과학은 이해관계를 둘러싼 인간들의 욕망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시민사회의 한복판에서 자라난 학문이었다.따라서 그것은 이성적 사고를 통해 지난날의 그 어떤 유사 학문보다 정밀하게 인간 욕망의 충돌을 조절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근대 사회과학은 마르크스주의처럼 체제변혁을 위한 이론과 체제순응적인 이론으로 나뉘어 대결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근대사회의 권력과 돈에 대한 합리적 지배와 관리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근대적인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인간의 목적에 맞게끔 자연세계과 인간세계를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지배하려는 요궁 최적의 답을 제공할 수 있는 학문들이었던 셈이다.
자기 시대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 그래서 한 시대를 지배할 수 있는 학문이 곧 실학이다. 여기서 실학이란 말은 조선조 후기의 실학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학문은 실학이 되기를 원했고 실학이 되지 못한 학문은 허학으로 전락하여 역사의 주무대에서 물러났다.그러나 실학과 허학을 가늠하는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기준이란 애당초 있을 리 없다. 다만 어느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그 기준이 바뀔 뿐이다. 서양 중세의 실학이 신학과 스콜라 철학이었고 조선조 오백년의 실학이 사서오경의 학문이었다면 이제 우리 시대의 실학은 서양의 근대적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다. 사서오경을 암송하고 해석하는 낡은 경학은 근대사회의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채 실학의 지위를 근대학문에 넘겨야만 했던 것이다.
민족사의 치욕이었던 한일합방 때이 일이다. 합방 문서에 조인하라는 이토 히로부미의요구에 고종은 먼저 백성들의 허락을 얻어야겠노라고 맞섰다.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조정이 언제 백성의 뜻을 물러 정책을 집행했는냐 라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조선에는 의회와 같이 일반 백성들과 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통로가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백성이 합심하여 근대적 요구에 새롭게 대응할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새시대의 거센 풍랑 앞에서 고종과 몇몇 유신들은 유학이라는 낡은 조각배와 함께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야 했던 신세였던 것이다.조선의 역사는 이렇게 새로운 근대의 물결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공허한 경전에서 먼지를 닦는 이유
본래 학문의 역사란 무상한 것이며 영고성회의 변화를 거듭하기 마련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새삼스레 과거로 눈을 돌려 고전을 이야기하는 것일까?한가롭게 과거의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는 안타까운 향수나 늘어놓자는 것이라면 경전에 대해 논의할 필요는 없다.그렇다고 이미 현실이 되어 버린 근대문명의 가치를 다 부정하고 단지 우리의 옛것만이 좋다는 식의 강변을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다. 더구나 오늘날의 우리는 정신적인 면에서 고전을 만들어 낸 우리 조상보다는 백인에 가깝다. 우리의 경우 과거의 전통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계승 속에 20세기가 전개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세상은 달라져 있었고 우리는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해야 했다. 이 가운데 사서오경을 외우고 생각하며 이룩했던 조선조 오백년의 찬란한 학문은 우리에게 단절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 . 어려운 학문의 세계를 뛰어넘어 조선의 문화를 힘겹게 학습해 본 사람들만이 유학이 지난날 우리의 이야기라고 아주 조심스럽게나마 말할 자격이 있을 것이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참고자료로 이를 활용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인 우리가 어째서 과거로 눈을 돌리며 고전의 물을 두드리는 것일까? 이는 바로 역사가 늘 전대미문의 새로운 사건들만 끊임없이 출현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핏 새로운 사건으로만 가득 차보이는 역사의 이면에는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구약성서 전도서의 말처럼 진실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세계에서 과거는 미래에 대해 너무나 많은 정보를 알려 주는 그 무엇일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역사와 인간의 삶에 반복되는 동일한 구조에 대한 성차로가 배움을 통해 당장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다. 과거의 옛것을 익혀 미래의 새것을 안다는 논너의 온고이지신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낡은 옛것이 때로는 새로움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쓸모없어 보이는 옛것에 대한 학습 없이는 새것에 대처할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아직 오지 아니한 미래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현재는 과거의 자식이고 미래는 현재의 자식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 대한 회고와 현재에 대한 직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늘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옛것과 새것 사이에 우리가 아직도 잘 모르는 모종의 동질성이 있기 때무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준비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고대 이집트에 대한 탐구가 오늘의 우리를 반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조선조의 문화 역시 오늘의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ㅎ다. 자칫 간과하기 쉽지만 오늘날의 서구적인 근대학문에 패배해 버린 사서오경의 낡은 학문도 한때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어떤 진리르 이야기해 줄 수 있었다. 유학은 분명 지나간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시대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었기에 수많은 다른 학문과 사상의 도전 속에서도 살아남아 실학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전세게 어디서나 가르치고 배우는 보편적인 학문이 되는 영광을 누린 서구의 근대학문 역시 오늘은 실학이지만 언젠가는 허학이 누린 서구의 근대학문 역시 오늘은 실학이지만 언젠가는 허학이 되어 좋았던 시절을 회고해야 되는 운명에 처할 수 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은 현대 인간의 정신적 공허하고가 가치의 혼란 광경 문제 그리고 여전히 통제되고 있지 않은 크로 작은 분규 등을 지적하며 서구의 근대성이 지닌 가치를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며 그 동안 근대 서구 문명에 의해 쉽게 무시되어 버린 다양한 인류의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 고전학은 허학에 속한다. 이에 비해 근대학문은 당장 우리의 삶과 밀접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다 .한 정당의 정책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해 주는가 하면 기업의 지원 아래 기업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듯 근대학문이 긴박한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데 비해 고전을 이해관계를 떠난 사람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즐기는 허허로운 세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근대의 세계가 흔들리며 이후의시대가 미지수인 지금 허학의 허, 즉 비어 있음은 새로운 변화에 모종의 힌트를 제공해 주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잘 나갈 때는 무관심한 채 거들떠보지도 않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위기에 처하는 순간 새로운 의미로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렇듯이 근대문명의 위기가 논의되는 지금 우리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지금이 우리와는 다른 의미와 방식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고 그것을 지금의 우리와 비교하는 일이다. 우리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우리는 현재와 다른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불만족스러운 현재에서 찾을 수 도 없고 아직 있지도 않은 미래에서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결국 우리의 참고자료는 늘 과거 속에서 찾아질 수 있을 뿐이다. 고전은 어떤 것이건 간에 지난날 인류의 삶인 과거가 남긴 흔적이다. 따라서 고전에 대한 기반이 없이 진행되는 현재에 대한 진단과 미래의 설계는 천박해지거나 근본적인 힘을 얻기가 어렵다.현재의 고민의 뿌리가 찰나적인 사회 현상에 있지 않고 우리가 새롭게 짜고자 하는 미래가 그저 잠시간의 새 유행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고전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필수적이다.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연과학까지도 그렇다.고전에 무지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은 천박함을 면하기 여럽다. 사회과학자나 자연과학자도 한계에 부딪히면 고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늘상 새로운 사건만 일어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동일한 패턴이 지속되는 것만도 아니다.사상의 역사를 보면 인간과 신,혹은 인간과 자연 통이로가 분열 경제적 가치와 인간의내면적 가치 등 이질적인 두 요소가 번갈아 가며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기도 한다. 가령 인간의 가치를 중심에 두었던 서구 근대문명은 신의 가치를 중심에 두었던 서구 근대문명은 신의 가치를 중심에 두었던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나 고대로 눈길을 돌려 그리스나 로마의 인간 중심 문화를 재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지난 고전을 돌아보는 것은 한층 의미심장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명은 근대가 무시해 버린 과거의 전통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근대사회를 대체할 문명은 근대 이전의 고전을 새롭게 재발견하는 가운데에서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명과 경전 사이의 수수께끼
문화를 뜻하는 문이란 한자는 원래 가슴에 문신을 새긴 사람의 못브을 본딴 상형자이다. 문신은 자연 상태의 몸에 인위적으로 무늬나 그림 따위를 새긴 것으로 일조으이 꾸미는 행 위에 해당한다. 사람들이 자연에서 받은 본래 모습을 화장과 장신구 옷 등으로 꾸미는 행위야말로 인간 문화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예이다.이러한 문의 어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문화란 넓게 보면 주어진 자연을 배경으로 그것을 꾸미는 인간들의 모든 노력 즉 작위의 총체를 가리킨다.문화를 가리키는 영어의 culture 도 자연을 경작하거나 자연 상태의 인간을 훈련시킨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나 철학도 자연이나 세계 그 자체를 인간호시켜서 인간적인 눈으로 본 결과라는 점에서 문화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자연과는 그 속성을 달리한다. 가령 먹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필연성과 보편성을 지닌 것이지만 문화는 그와 다르다. 가령 밀과 쌀 가운데 무엇을 골라 먹는 것이나 그것을 조리하는 방법은 상황에 따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문화에 속하는 사항이다. 하지만 몸(자연)이 있어야 문신(문화) 이 가능하듯 인간의 문화는 자연에서 탄생하여 늘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문화란 것은 인간 생명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면 문화를 떠날 수는 없다. 원시 사회로부터 고도로 발달한 형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있는 곳에는 늘 무노하가 있었고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문화의 일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사람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전승되어 온 문화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규범에 따라 먹고 말하고 생각하면서 인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이때의 인간다운 사람이란 그 문화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닮은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각 문명권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근대문명의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화라는 말까지 인구에 회자되느 ㄴ오늘의 지구촌에도 각 문명권의 독특한 전통과 정서는 존재하고 있다. 각 문명의 이런 전통 그 독특한 특징이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없다.하지만 각 문명의 독특한 특징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경이다. 경은 각 문화권을 특징짓는 상이한 규범들의 궁극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경이 성립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문명의 정체성이 마련되는 기원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먼저 이 문제를 살피고 유학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자.
경이란 한자에 대해 중국 한나라 때 허신이 쓴 설문해자 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경은 직물의 날실을 의미하며 부수인 사와 음을 나타내는 경이 합해서 된 글자이다. 베를 짤 때는 세로줄인 날실과 가로줄인 씨실이 다 필요하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날실이다.날실을 축으로 삼아 고정시키고 베틀을 움직여 씨실을 짜 내려가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경이란 글자에서 경은 각각 땅과 개울 곧게 뻗는다의 뜻을 갖는 한일자와 내천, 공 공이 합쳐져서 된 글자라고 되어 있다. 즉 그것은 땅 밑을 곧게 관류하는 물줄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경이 사와 합쳐지면서 항구적이다 혹은 곧바로 통한다는 뜻을 갖는다. 따라서 경전이라 할 때의 경자는 모든 시대를 인관하여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를 뜻한다. 마치 그것은 베를 짤때처럼 변치 않는 기준인 날실 즉 경전을 기준으로 세상사를 가늠한다는 의미가 된다. 기독교,힌두교, 이슬람, 유교 등 각 문명권에는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올라 성 인의 예로 받들어지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예수나 무함마드 ,부처, 공자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삶의 좌표를 찾아 전부터 내려오는 상식과 관습의 세계를 탐험했으며 그것의 극한에 이르러 그 너머의 세계까지 보았던 존재들이다. 이들이 서 있는 극한의 경계선 한쪽이 앞서 말한 상식적인 인간의 세계라면 다른 한쪽은 인간이 있기 이전 혹은 인간의 상대적인 지식 너머의 세계이다. 후자의 세계는 각 문명에 따라 신의 세계 자연의 세계 불가사의의 세계 등으로 불린다.따라서 예수나 부처 등은 인간의 세계와 그것을 넘어선 세계의 경계선에서 그 두 세계를 이어 주며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무리를 이루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메시지를 전해 주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원대한 비전이 늘 처음부터 사회 구성원에게 설득력을 얻고 존중받았던 것은 아니다.이설로 치부되며 무시되거나 위험한 사상이라 하여 기득권층의 엄청난 탄압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박해를 받아 죽거나 망명자로서 살아가며 자신의 이상이 꽃피기도 전에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이름과 치적을 기억하듯이 결국 그들은 각 문명의 구성원들에게 성인,예언자. 선지자 ,현인등으로 예우를 받으며 문명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각 문명권에서 부여받는 엄청난 지위처럼 그들의 메시지나 일화가 담긴 문헌들 역시 여타의 책과는 격을 달리하는 신성불가침의 어마어마한 지위를 - 이러한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 소위 경이다 -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 경은 인간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세계, 우주 그 자체 혹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시켜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판단 행위의 최초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거창한 추주에 대한 이야기에서 소소한 삶의 규범에 이르기까지 삶의 세계는 물론 죽음 너머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전해 주는 책이 바로 이들 경이었다.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서 이러한 역할을 했던 경전은 바이블이었다. 바이블이 성경을 뜻하는 동시에 경전 일발은 의미하듯 바이블은 유일한 절대진리였으며 경전 그 자체였다. 그 외의 문헌에는 바이블이란 말을 붙일 수 업었고 바이블은 곧 성경을 의미했다. 아울러 아랍의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이슬람교의 경전을 지칭하는 코란이 이슬람교도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으며 여기에서도 코란은 경전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아랍인들에게 경전이란 오로지 코란만을 의미했다. 결국 하나의 문헌이 경전이 된다는 것은 역으로 경전에서 말하는 세계관이 그들 사회의 상식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가치관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근대인이라면 누구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명제를 상식이자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일단 신성화되고 체제가 확립된 경전의 진리는 그 문명권의 구성원이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까지 간주되었다. 이후의 사상이나 학문은 이런 경전의 세계관 속에서 그 메시지를 해석하고 응용하는 작업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이나 코란 등을 중심으로 한 다른 문명권과는 사뭇 다른 동아시아의 전통 하나를 확인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사회에서는 경이란 글자가 하나의 문헌과 동일시되거나 독점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경이라는 호칭은 중국의 한나라 이후 사대부들의 문화를 주도했던 유학의 경인 사서오경에 국한되지 않고 타종교나 학문이랄 수 있는 도가 게열의 도덕경이나 황제내경 혹은 화업경 ,금강경과 같은 수많은 불교의 문헌들에도 따라 붙었다.
실제로 유가가 아닌 어떤 종파나 학파도 자신들이 보편적인 진리로 받들어 모시는 경에 대해서는 아무 제한 없이 경자를 붙일 수 있었다. 유학자들은 한대 이후 도교가 형성되고 불교가 수입되기 훨씬 이전부터 오경(시,사,역,예,악)이라 불리는 책들을 높이 받들고 있었지만 불교도나 도교도들이 그들이 중요 문헌에 경이란 글자를 쓰는 것에 대해 전혀 시비를 걸지 않았다. 과거 역사를 보면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종교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진리체계 즉 경전을 갖고 있었던 각 문명권은 이를 사수하고 전파하기 위해 때로는 무자비한 종교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입장을 달리하는 쪽에 엄청난 탄압을 가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경이 위협받는 것은 곧 삶의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가 위협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양상은 이와 달랐다. 다양한 경전들이 나란히 존재해왔고 여타의 문명권과는 달리 경전의 수호를 위해 심각한 살육 사태나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들어와 있지만 상대적으로 종교 간의 갈등은 덜 심각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독측한 동아시아적 전통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우리는 여러 사례를 통해 종교가 과거 동아시아 사회에서 차지했던 위치가 유럽이나 아랍 혹은 인도에서와는 확연히 달랐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일찎이 동아시아에서는 하나의 종교가 국가와 사회의 모든 것을 온전히 지배한 일이 없었다. 대신 정치와 종교 사이에는 늘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이는 유학의 이념이 가장 완고하게 정착했던 조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물론 이 시기에 불교 승려들의 한양 사대문 안 출입을 제한하는 정책 등이 시행되기도 했지만 한 종교에 의한 다른 종교의 소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였지만 왕들도 수미일관한 하나의 종교적 믿음을 견지하지 않았다. 유학적인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왕이란 신분은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왕은 유학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고대 중국의 요순 임금의 본을 받아 유학의 이념을 계승하고 실천해야 하는 가장 중심되는 위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왕 중에서는 불교 등을 통해 삶의 위안을 얻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당장 숭유억불의 조선 왕조를 창업한 태조로부터 불교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서양의 중세에서 최고의 권력자이자 기독교 정신의 계승자인 교황이 개인적으로는 이슬람교를 신봉했다는 가정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과는 달리 이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전통이었다.
권력과 종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한편으로는 문화를 계승하는 지식인 사회와 종교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이 점 역시 중세 서구에서는 신부나 신학자들이 지식을 독점하며 문화를 계승하는 거의 유일한 집단이었다는 점과 확연히 대비된다. 기독교를 빼고서는 서구 중세의 지식인 사회를 이야기할 수 없듯이 어떤 면에서는 서양의 지식인 역사 전체가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종교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종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성립하기 힘든 역사가 서양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지식인들도 종교를 철저하게 합리화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종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중동 지역이나 인도 지방도 종교를 떠나서는 지식인 사회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서구 중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세 대개의 경우 지식인들은 아예 종교에 별관심이 없거나 받아들이더라도 종교적인 성격이 탈색된 부분에 오히려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처럼 내세지향적인 종교나 신비하고 주술적인 성격이 강한 종교는 주로 하층민중과 여성들에 ㅡ이해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전통은 중국의 전국시대에 화려한 꽃을 피우며 등장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동양 사상의 젖줄 역할을 하였던 제자백가에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제자백가의 한 극단에는 애써 뭔가를 만들어 보려는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버리고 무위자연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노자와 장자의 도가가 있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와 같은 도가의 중심 문헌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별로 없다. 도가와는 정반대로 엄격한 법질서에 의한 통제를 강조하며 제자백가의 또 다른 한 극단에 섰던 한비자와 이사의 법가에서도 종교적인 냄새를 맡기 힘들다. 법가는 군주를 정점으로 어떻게 국가사회를 통일시킬 것인가에 관심이 있을 뿐 종교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겸애 즉 모든 사람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외쳤던 묵가일 것이다. 묵가는 귀신이나 인간세계를 초월한 천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는 모종의 종교적 틀을 갖추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의 구심을 마련하기 위한 필요에서 나온 언급일 뿐이다.
이후 전개되는 역사 속에서도 지식인들은 비종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종교적인 색채가 덜한 사상들을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한대이후에 도교가 유행했지만 지식인들은 노장사상이나 양생술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지 무속적인 분위기가 짙은 도교의 종교적인 측면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위진시대 이후 수당시대에 걸쳐서는 인도에서 수이된 불교가 유행했지만 지식인들은 불교 가운데서도 매우 철학적인 교학불교나 깨달음 그 자체만을 강조한 선종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정토종과 같이 종교적 측면이 두드러지는 불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한 왕조가 말기적 병폐에 시달릴 때면 어김없이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기존 왕조는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는데 이런 반란의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이 서양의 천년왕국설처럼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을 고취하는 종교들이었다. 태평도나 오두미도라든가 백렬교 따위가 그 예들이다. 청나라 말기의 태평천국이나 조선조 말기의 동학 역시 그런 민간종교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하지만 새 왕조의 등장과 함께 농민반란을 이끌었던 민간종교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여 다시 민간으로 내려가고 종교에 무관심한 지식인들이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곤 했다. 이렇게 권력이나 지식이 종교로 온전히 물들기 힘든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종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많은 관용이 베풀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종교라는 절대적인 신념이 절대적인 권력과 결합하는 일은 오히려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대신 종교는 사적인 영역 즉 개인의 신념과 사상의 영역에 머무르고자 하였다. 종교는 정치권력을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종교가 애초부터 타인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의 바깥에 있는 상황에서는 종교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려야 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종교는 국가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힐 경우에만 가차없는 탄압을 받았을 뿐 교리적인 이유로 정치적 탄압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조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했던 것도 천주교의 교리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천주교가 조선 사회의 봉건적 질서와 규범을 위협한다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유가 강했다. 동아시아 전통에 있어 종교에 의해 인륜과 국가사회의 질서가 위협받지 않는 한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푸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미덕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경전이 말하는 절대불변의 보편적인 진리는 하나밖에 없다고 말해야 옳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진리가 다르다면 이는 당연히 상황에 따른 진리일 뿐이지 보편적인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양상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다. 삶의 양상이 변함에 따라 그에 필요한 진리도 변할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진리를 시종일관 고집하는 것은 삶에 적재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변화하는 삶이야말로 문자나 우리의 머릿속에 고정된 어떤 진리보다더 더 소중한 것이다. 일단 진리와 경의 다양성을 긍정하고 어느 것이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에 잘 부합하는가라는 실용주의적인 기준에 따라 그 중 하나 혹은 여러 개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실학적 진리관이다. 그런데 많은 동아시아인들은 이런 실학적인 진리관을 상식처럼 지니고 있었고 유학은 이러한 전통의 원형을 마련했던 사상이었던 것이다. 유학은 종교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는 인륜의 보호막으로 국가사회의 질서를 지탱하는 이념을 제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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