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나라 - 박원재, 최진덕
소설 삼국지가 숨겨 놓은 진실
중국의 한나라가 그 명운을 다해 가던 후한 말엽의 어느 날 동아시아 문명의 젖줄인 황하 강변의 어느 객줏집에 남루한 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잠을 청하고 있었다.그의 곁에는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긴 칼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머리맡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당시로는 귀중품인 차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그 차는 아까 석양 무렵 낙양을 오가는 황하의 물줄기 위에서 진귀한 물품을 팔던 상인에게서 구한 물건이었다. 그가 몇 년간 돗자리를 팔아 마련한 돈에다 자신의 칼에 자신의 칼에 달린 장식품까지 건네주며 통사정 끝에 어렵사리 구한 것이었다.
차를 구하기 위한 낮의 그 실랑이 때문이었을까? 피곤한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그러나 얼마쯤이나 되었을까 그의 잠은 자신을 부르는 객줏집 주인의 화급한 목소리에 이내 깨고 말았다. 도적들이 객상들을 털러 들이닥쳤으니 얼른 몸을 피하라는 소리였다.서둘러 행색을 챙기고 나가 보니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치솟는 불기로가 그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리고 도적들인 듯 머리에 누런 두건을 쓴 채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일단의 무리들 그러나 그런 상황 파악의 여유도 잠시 젊은이는 재빨리 객줏집을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줄달음을 쳤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읽었을 삼국지의 첫 대목으로 유비가 황건적에게 봉변을 당하는 내용이다. 그런에 이 소설의 짧은 한 대목속에도 글쓴이의 편견이 들어가 있다.환건적이라는 명칭부터가 그렇다.그것은 고작해야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누런 두건의 도적떼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민중들 사이에 은밀히 진행되던 결사운동을 항상 의심에서 찬 눈초리로 지켜봤던 기득권층의 경계십리가 반영된 편견일 뿐이다. 사실 황건적의 난 이라고 왜곡되어 불리는 한나라 말의 이 농민봉기를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근본정신은 태평스러운 세계에 대한 민중들의 뿌리깊은 염원이다.그리고 그런 민중운동의 밑바닥에는 바로 도교라는 종교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도교의 종교성 여부에서 시작하여 도교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 종교적 운동의 성격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합의된 결론은 없다.도교에서는 대부분의 종교가 강조하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쉽사리 찾을 수 없고 또 도교라는 모종의 결사운동이 시작된 이래 쉽사리 찾을 수 없고 또 도교라는 모종의 결사운동이 시작된 이래 통일적인 교리나 교단 조직을 가져 본 적도 없기 떄문이다. 심지어 도교는 다른 종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도덕적인 삶에 대해서도 공격하는 등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종교의 형태와는 많이 달랐다.대신 도교는 민중들이 다양한 삶 속에서 직접적인 체험과 수행을 강조하는 형태로 도도한 흐름을 이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민중분기의 정신적인 동기를 찾다 보면 우리는 도교라는 이 모호한 종교적 결사운동과 항상 만나게 된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도교가 비교적 가시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중꾸이 한나라 말이다.이 시기에 우리는 역사에 공식적인 흔적을 남기는 두 개의 주목할 만한 도교 교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병을 고쳐 주는 대가로 쌀 다섯 되를 받았다는 데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오두미교라는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앞에서 말한 황건이 봉기를 일으킨 태평도라는 조직이다. 역사가들은 보통 이 두 교단 조직으로부터 도교가 시작됐다고 본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어떤 사건이 공식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그에 선행한 오랜 움직임이 있었기 마련이다.도교 역시 전국시대에 발원하기 시작한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사상적 흐름이 하나로 합쳐진 결과이다.
이들 가운데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자연에서 타고난 인간의 생명을 온전히 지켜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양생술과 세계를 음양이나 오행과 같은 기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음양오행설 그리고 불로장생을 꿈꾸는 신선가의 전통이다.이 세 흐름은 때로는 독립적으로 또 때로는 서로 인연을 맺으면서 흐르다가 한 대에 이르러 점차 공통된 관심사를 중심으로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이루어 나간다. 그 관심사란 바로 영원한 삶, 즉 불사에 대한 인간의 뿌리깊은 염원이다. 한나라 후반기에 이 세 흐름은 건강하게 영생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공통된 관심을 누리고 싶다는 공통된 관심을 매개로 강력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도교였다.그렇다면 도교를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나머지 하나의 흐름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황노도가를 중심으로 하는 황노학이다. 한의 무제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유학을 선택하자 황노학은 그 권위를 상실하고 급격히 쇠락해 갔다.하지만 엄밀히 말해 쇠락한 것은 황노학이 누렸던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철학으로서의 지위였지 황노학 자체는 아니었다. 오히려 황노학은 그 안에 품고 있던 지식들 중의 하나를 새롭게 발전시키면서 변화된 상황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갔다.한의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황제내경이라는 책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항제내경은 한의학의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이런 책의 제목에 황제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는 사실 그것은 곧 엄청난 사상적 잠재력을 갖고 있던 당시의 황노학이 물꼬를 어디로 틀었는지 쉬이 짐작케 한다. 물론 전국시대의 황노학도 다분히 의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한나라가 유학을 중심 이념으로 채택하여 제도권에서 밀려나게 되자 황노학은 앞에서 말한 양생술과 신선가드으이 흐름과 급속히 결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황제는 통치술의 묘미를 체득한 성인에서 점차로 양생수르이 달인으로 간주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신으로 격상되기에 이른다.
황제에 대한 이와 같은 추앙 분위기는 당연히 황노학의 또 다른 축인 노자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도교의 흐름에서 먼저 신격화된 것은 황제였지만 노자 역시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신으로 받들어지지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의 황제가 친히 천신에 준하는 예식으로 황제와 노자를 제사지낸 것은 기원후 166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무렵에 오면 노자는 이미 신으로서 완전히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노자는 인간 노자에서 노군이라는 신으로 노군에서 태상노군으로 태상노군에서 천존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원시천존으로 불리면서 서서히 도교의 최고신 가운데 하나로 신분이 높아져 간다. 결국 노자는 도교에서 최고의 신이 되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아홉 척이나 되는 키에 황금색 얼굴과 새 부리 모양의 입 다섯 치 길이의 눈썹과 일곱 치 길이의 귀 그리고 아래위로 세 개의 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또한 다섯 가지 상서로운 빛깔의 구름을 옷으로 삼고 황금으로 된 집에서 신령스러운 거북이를 침상으로 쓰는 최고의 신이 되었다. 그러나 도교의 역사에서 노자에 대한 신격화 작업의 백미는 역시 중국 당나라 때 내려진 일련의 조치들이다. 당대는 그야말로 도가의 전성시대였다.그런데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도덕경에 담긴 사상의 깊이라기보다는 노자의 성씨가 이씨라는 다분히 믿어지지 않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통치세력이 느끼고 있었던 가문에 대한 콤플렉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의 황실은 본래 귀족가문 출신이기는 했지만 그 시대에 영화를 누리던 다른 귀족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처지는 가문이었다.그래서 그들에게는 당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도교의 교주인 노자가 자신들과 성이 같다는 사실이 굉장히 매혹적이었다.그들은 주저없이 노자와 자신들의 가계를 연결시키는 작업에 들어가서 우선 자신들의 건국을 노자가 꿈에서 예언했다는 이른바 꿈의 계시를 조작해 냈고 뒤이어 노자에 대한 신성화 작업에 들어갔다. 노자에게 부여된 칭호만 살펴봐도 당시 숨가쁘게 진행된 신성화 작업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당의 고종 건봉 원년에 태상형원황제로 받들어지는 것을 시발로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현종의 천보2년에 오면 노자는 태성조현원황제로 추승된다. 이어 천보 8년에는 성조대도현원황제로 불리며 천보 13년에 이르러서는 노자에게 태성조고상대도금궐현원천황대제라는 어마어마한 칭호가 부여된다.세상을 다스리느 지극한 대도를 관장하시면서 금으로 된 하늘의 궁궐에 사시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우리 황제의 위대한 조상 옥황대제님! 이것이 태성조고상대도금궐형원천황대제라는 칭호의 대체적인 뜻이다.이보다 더 융숭한 존칭을 또 생각해 낼 수 있을까? 도교의 발전과 함께 전개되 노자에 대한 신성화 작업은 당연히 도덕경에 대한 성역화 작업으로 이어진다.앞에서 판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5천2백여 자에 달하는 도덕경을 사마천이 도와 덕에 관한 5천여 자의 글 이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두미교는 이에 착안하여 도덕경을 정확히 5천 자로 교정하여 자신들이 경정인 노자상이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도덕경에 대한 열기가 당나라 때에 와서 최고조에 다다른다. 고종 의풍 3년에 도덕경을 최고의 경전으로 명하여 받들게 하고 관리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이를 숙독하게 하였다.그리고 꿈에서 본 노자를 토대로 초상화를 직접 그려 유포시키기도 했던 현종은 개원 21년에 모든 집에 도덕경 한 권씩을 의무적으로 소장토록 하였다.동시에 유학 전공자에게 할당된 관리들의 정원을 감축하여 도덕경 전공자에게 할애하였다.그리고 천보 원년에는 노자를 도덕진경으로 부르게 하고 처놉 14년에는 친히 도덕경의 주석서를 집필하여 천하에 반포하기까지 하였다.이 밖에도 노자와 도덕경을 연구하는 국립연구소를 설치하고 노자의 탄생 연도를 기원전 1301년으로 하는 도력을 만드는가 하면 탄생일을 국가 경축일로 선포하는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성역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노자와 도덕경에 대한 이와 같은 숭배 열기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사기의 노자열전에 실려있는 공자에 대한 노자의 질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반조자적인 현상이라고까지 해야 한다. 특히 노자와 도덕경에 대한 비정상적인 열기는 도교라는 종교의 중요한 사회적 사명 하나를 감퇴시키고 말았다. 종교적인 측면을 배제하고 말하면 도교라는 종교적 결사운동의 역사는 한마디로 지배계층에 대한 피지백케층의 저항의 역사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지배계층의 비호를 받으면서 지금껐 누려 보지 못했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자 도교는 지배층을 옹호하기 위한 종교적도구로 전락하면서 특유의 저항정신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도교의 역사에 노자와 도덕경이 그렇듯 깊숙이 개입되어 있지만 사실 노자와 도덕경은 도교와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노자에서 발원한 철학적 도가는 결코 종교적 도가인 도교의 탄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흐름은 아니기 때문이다.도교는 불사의 신앙을 중심으로 신비스럽고 주술적인 여러 사상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므로 도가와는 하나의 사상적인 흐름으로 묶을 수 없으며 어떤 면에서 이 도가와 도교는 서로 상반되기까지 하다. 불사에 대한 생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노자는 도로 표현되는 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천수를 누리다 삶이 다하면 다시 자연으로 흔쾨히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그러나 도교가 추구하는 불사의 신앙은 이런 자연스런 삶의 질서에 대한 명백한 거부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역으로 자연에 역행하는 길로 나아가려던 극단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이런 점에서 도교는 본질적으로 반노자적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와 도교가 밀접하게 연결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선 도교가 노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대부분의 민중종교가 그렇듯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여 차츰 교세가 신장되어 가면서 도교는 무엇보다 자신의 교리를 체계화시켜줄 고등이론을 필요로 했다. 이런 도교도들에게 노자는 무엇보다더 매력 있는 사상가였다.반면에 노자의 입장에서도 도교와 같은 종교적 결사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인간사회의 불균평함을 자연히 균평함으로 되돌리고자 할 때 노자의 꿈을 실제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노자의 전통에서 도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도교는 노자의 오랜 꿈을 구체적인 현실과 접목시키며 대중의 삶 속에서 실현시켜 갈 수 있는 하나의 가교였던 것이다. 비록 표면적인 명분은 제각각이었더라도 창천은 이미 죽었도다! 바야흐로 황천이 도래하는 때로다! 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황건의 붕기에서부터 그 동안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민중봉기는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고자 한 피집재계층의 오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의 민중봉기 속에서 균평이 나 태평이라는 구호가 쉽사리 발견된다는 사실은 봉기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지배계층의 중심에 서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던 유가에 반발하는 노자적 전통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의 역사에서 도교라는 종교운동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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