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나라 - 박원재, 최진덕
노자는 있다, 노자는 없다
중국에는 어떤 위대한 철인의 탁생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기원전 604년 9월 14일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그러니까 지금의 하남성 녹읍현 동쪾쯤에 해당하는 곳에서 한 여인이 자두나무에 기대어 사내아이 하나를 낳았다.그는 유성의 도움으로 잉태되었고 그런 비범함 떄문이었는지 60년이 넘도록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때문에 그가 태어날 때는 이미 70에 가까운 나이로 세월에 걸맞게 그의 하얀 머리는 지혜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말을 시작하여 옆의 자두나무를 가리키며 그 나무의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자신의 큰 귀를 이름으로 삼겠노라며 스스로를 자두나무 밑에서 태어난 귀가 큰 아이 즉 이이라고 칭하였다. 그가 바로 노자이다. 이것은 노자가 후대에 도교의 교주로 추앙되면서 각색되기 시작한 그와 관련된 수많은 전설 가운데 하나로서 노자가 상당히 신비에 싸인 인물이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그만큼 노자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별로 없다. 사실 중국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노자만큼 그 인적 사항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드물다. 하지만 모든 전설이 그럿듯이 노자와 관련된 전설에도 뿌리는 있다. 그것은 사마천이 전하고 있는 노자에 대한 기록이다.사마천은 자신의 저서 사기에 수록된 노자열전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노자라는 사람은 초나라의 고현 여향에 있는 곡인리 출신이다.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이이며 자는 담으로서 주나라 황실도서관의 책임자를 지냈다. 한 번은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노자에게 예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지금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을 말한 사람은 이미 그 뼈까지 썩어 문드러져 없어지고 다만 그 말만이 남아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군자는 때를 만나면 그 뜻을 펼치기 위해 관직으로 나아가고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떠나는 법이다. 내가 듣기로는 뛰어난 상인은 재물을 깊숙이 감추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한다고 한다. 그러니 그대의 교만함과 욕망 허세와 야망을 버려라 그런 것들은 그대의 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가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다.
공자는 물러나와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라면 그것이 날아 다니는 것임을 내 익히 알고 고기라면 그것이 헤엄쳐 다니는 것임을 내 익히 알며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들판을 달리는 것임을 내 익히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으면 되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잡으면 되며 날아 다니는 것은 주살로 잡으면 된다.하지만 바라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에 이르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바로 용과 같은 인물이었다. 노자는 은둔하여 도와 덕을 닦으면서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다. 그는 주나라에 오랫동안 살다가 주가 쇠미해지는 것을 보자 그곳을 떠났다.국경의 관문에 이르자 그곳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가 말했다.선생님은 은둔하시기로 한 모양이군요.내키지 않으시더라도 저를 위하여 책을 하나 남겨 주십시오.그러자 노자는 상,하로 되어 있는 저서 두 편을 써서 도와 덕에 대해 논한 5천여자의 글을 남기고 떠났다.그 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한다.노래자라는 사람 역시 초나라사람으로서 저서 15편을 지어 도가의 효용성에 대해 말했는데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다라고.노자는 대략 160여 세를 살았다 하기도 하고 혹은 200여세를 살았다고도 하니 이는 그가 도를 닦고 양생을 했기 때문이다.공자가 죽은 지 129년 뒤에 주나라의 태사라는 직위에 있던 담이라는 사람이 진나라 헌공을 만나 처음 진나라는 주나라에 합병되어 있다가 500년 뒤에 갈라졌는제 갈라진 뒤 70년이면 천하는 장악하는 왕이 등장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담이 곧 노자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도 하니 세상이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지를 못한다.결국 노자는 은둔한 군자인 것이다.
인용이 다소 장황한 감은 있지만 사마천의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첨단의 고고학적 지식을 동원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이것이 거의 전부이기 때문이다.즉 사기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노자와 도덕경에 대한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록의 내용에서됴 알 수 있듯이 사마천 당시에도 이미 노자에 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이 점은 훗날 역사가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는 사마천 스스로도 노자에 관한 세 가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이것은 사마천 역시 춘추시대말기에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근거를 동원하여 노자열전의 신뢰성에 의문을 표시하였지만 노자에 대한 이 기록의 권위는 지금까지도 요지부동이다.뿐만 아니라 이 기록은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둘러싼 유교도와 도교도들 간의 논란처럼 노자와 관련된 각양각색의 논쟁이나 이야기의 근거를 제공하여 왔다.
가령 지금까지 노자를 언급하면서 그의 성을 이라하는 것도 오로지 사마천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이 무슨 근거로 노자의 성을 이씨라고 했는지 춘추시대에는 이씨란 성이 없었다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달리 확인할 길은 없다.또 노자의 성이 이라면 노자라 쓴 책은 맹자나 순자 한비자 등과 같이 선진시대의 관행에 맞게 맞게 이자라고 했어야 하지만 왜 굳이 노자라고 했는지 사마천의 기록은 명확하게 밝혀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당시 산동지방에 살던 이씨 집안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했는데 사마천이 이를 받아들여 노자의 성을 이씨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도 추측일 뿐이다.뒤에서 그 상황을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노자의 성이 이씨라는 근거 불명의 기록하나 때문에 노자가 당나라의 통치 세력에 의해 더할 나위 없이 추앙받는 묘한 상황도 벌어진다. 노자가 국경의 관문을 거쳐 은둔했다는 내용은 불교도와 도교도 사이에 논쟁거리를 제공하게 된다.노자열전에 기록된 국경의 관문이 서쪽에 있는 함곡관으로 해석되면서 노자가 인도로 가서 석가모니로 변신하였거나 혹은 석가를 제자로 삼았다는 이른바 노자화호설과 관련된 논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도와 덕에 관한 글 5천여 자를 남겼다는 내용도 예외는 아니다. 뒷날 도교의 일파 가운데하나는 이 기록에 집착하여 도덕경을 정확히 5천 자로 교정하는 웃지 못할 일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노자를 둘러싼 이와 같은 전설과 해프닝은 노자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의 빈곤 때문에 발생했다.노자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온 것도 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인한다.즉 노자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신뢰성이 있는 사기의 노자열전에 근거를 두되 유포자의 의도가 다분히 개입된 자의적인 상상력들이 가지를 쳐 간 결과이다. 노자의 정체를 둘러싼 논란은 당연히 도덕경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저자로 알려진 인물에 대한 정보의 신뢰도가 낮다 보니 그의 저작에 대한 의견에도 상당한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노자란 인물의 실제성 여부에서 시작하여 노자와 도덕경은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 도덕경은 한 사람의 저작물이 아니라는 주장 등 여러 의문들이 도덕경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하지만 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덕경에 대해서도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결과 도덕경도 노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춘추 말에서 한 대에 이르는 오랜 시간을 넘나들며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결국 사마천의 기록이 지금까지도 노자와 도덕경에 관해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는 것은 그 기록이 매우 믿음직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반박할 결정적인 다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도가는 유가와 함께 동아시아의 정신사를 양분해 왔다.그런데 우리는 도가의 실질적 창시자인 노자와 그의 저서에 대해 이 이상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록의 명확함 여부가 아니라 노자와 그의 저서가 긴 시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에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돼 주었다는 점이다.즉 노자라는 바이블의 진정한 힘은 역사적인 권위가 아니라 거기에 담긴 사고의 힘찬 생명력인 것이다.인류는 자신들의 문화가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전승해 온 바이블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노자와 도덕경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다양한 색깔의 에피고넨들을 거치면서 노자의 생각이 도가라는 거대한 강줄기를 이루어 나간 것도 노자와 도덕경이 지니고 있는 바로 그 힘때문이다.그러면 이제 그 강줄기를 따라가 보자.
에피고넨의 시대
세속과 탈속의 경계선에서
노자로부터 발원한 흐름이 뚜렷한 강폭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전국시대이다. 물론 전국시대라는 거친 광야를 적신 물줄기는 도가만이 아니다.모두가 중국 문명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산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후대에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다양한 흐름이 산의 서로 다른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전국시대를 굽이쳤다.그들 속에는 유가라고 불리는 다분히 엄숙한 풍모의 강도 있었고 법가라고 불리는 격류도 있었으며 소박하게 주변의 자그맣고 이름 없는 풀들을 적셔 주고자 한 묵가라는 강도 있었다.또 그 가운데는 이리저리 얽힌 다양한 흐름들이 못내 못마땅하여 서로의 자리를 분명히 해 보자고 부지런히 외친 명가라는 강도 있었고 대지에 누워 흐르면서 하늘의 근본 이치를 생각한 음양가라는 강도 있었다.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고만고만한 시내들이 큰 강물 사이에서 나름의 흐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 중국 역사의 다른 시기에서는 결코 구경할 수 없었던 많은 사상들이 일대 장관을 연출한 데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싸우는 나라들의 시대였던 이 시기는 주나라에 의해 각 지역의 책임자로 봉해졌던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천하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혼돈의 시기였다.주나라 초기에는 100여 개가 넘는 제후국이 있었지만 이때는 최종적으로 전국 칠웅이라 불리던 일곱 제후국만이 남아 패권의 향방을 놓고 다투었다. 그런데 혼돈의 시대야말로 부랑하는 조금 점잖은 말로 한다면 자유롭게 유동하는 지식인들을 싹트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다. 체계가 잘 짜여 완전한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 속에서는 창조적인 지식인이 숨쉴 자리는 별로 없다. 반면 그런 질서가 없었던 전국시대는 당시의 지식인에게 그런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하였다.껍데기만 남은 주 왕실만이 존재하는 무주공산의 천하를 차지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의 제후들에게는 세상의 힘을 모을 지략과 이념 그리고 제도가 필요했다. 때문에 각 제후국은 지식인 즉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선비라는 말로 더 친숙한 사라는 계층을 불러모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논리로 유세하다가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은 당당하게 대접을 받으면서 뜻이 맞는 제후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자유로이 떠돌며 자신의 포부를 펼쳤다. 맹자도 수십 대의 수레와 수백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서 이 제후 저 제후의 유숭한 대접을 받는 유세여행을 다녔다. 그러다가 한 제자로부터 어쩌면 그렇게 호기롭게 식객 노릇을 할 수가 있느냐는 다소 힐난조의 질문을 받기까지 했다. 비록 전국시대가 아니라 춘추시대 말엽이라는 시간상의 편차는 있지만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보기 위해 천하를 자유롭게 유랑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의 이런 독특한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자로부터 발원한 생각들이 전국시대에 이르러 도가라는 굵직한 강줄기를 형성해 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인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다.노자로부터 발원한 물줄기는 이 골 저 골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지류들을 수용하고 소용돌이와 평탄한 흐름을 반복하면서 도도한 세를 형성해 갔다. 그런데 이 흐름이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정표가 있었다.하나는 장자라고 하는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황노도가라는 호수이다. 이 둘은 도가가 만든 흐름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했던 사상들로 후대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자의 사상이 갖는 특징은 한마디로 거칠 것이 없이 탁 트인 그 시원스러움에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공물도 없다. 온갖 종류의 풍광을 넘나든다.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의 색깔밖에 없다. 온갖 종류의 수목과 새, 물고기들이 각기 타고난 개성에 따라 탁 트인 그 시원스러움에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공물도 없다.온갖 종류의 수목과 새 물고기들이 각기 타고난 개성에 따라 탁 트인 호수의 풍광을 넘나든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의 색깔밖에 없다. 분명 붉은 꽃도 노란 새도 초록의 풀도 있지만 이 다양한 색깔들이 한데 어우러져 연출해 내는 것은 하늘을 닮은 쪽빛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호수는 그 쪽빛이 푸르름으로 하늘과 맞닿아 흐른다. 어디가 호수의 끝이고 어디가 하늘의 시작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에 차라리 호수가 하늘이고 하늘이 호수라고 해야 할 그 무한한 넘나듦의 경지. 그것이 바로 장자라는 사상가가 펼쳐 보이는 웅혼한 대자연의 철학이다.뱁새나 메추라기 같은 세속의 관심에 찌들고 문명의 틀에 짜맞춰진 무리는 이 호수의 넓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오직 그 푸르름을 타고 비상하는 대붕만이 거칠 것 없는 그 경지를 포용할 수 있는 마치 소요하듯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 자유의 경지, 그것이 장자라는 호수가 연출하고 있는 풍광의 참모습이다. 그러나 자유의 사상가 장자의 인적 사항 역시 그 시대 대부분의 사상가들처럼 분명하지 않다.다만 사기에 실려 있는 그의 전기를 기준으로 볼 때 대략 기원전 4세기 중반에서 3세기 초반 무렵 그러니까 맹자와 비슷한 시대를 산 사람으로 추정될 뿐이다.그러나 흔히 노장이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노자의 사상을 한층 풀요롭게 한 노자의 대표적 계승자이다. 그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 그리고 이런 언어로 가공된 모든 이념과 주장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일체의 제도가 상대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는 노자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절대자유의 경지로 인간의 정신을 끌어올렸다.
사람들이 아옹다옹 다투며 얻고자 하는 일체의 세속적 가치는 장자의 세계에선 무의미하다.이것은 대붕새와 같이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는 자에게는 구속의 족쇄일 뿐이다. 장자는 죽어서 비단에 곱게 싸인 채 점치는 도구로 융숭히 대접받기보다는 진흙탕일망정 꼬리를 끌면서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거북이로 살고자 했다. 장자는 높은 관직에 오른 뒤 으스대며 금의환향한 어릴 적 친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듣기에 왕의 종기를 짜주는 자에게는 수레 한 대가 상으로 내리고 그 종기를 빨아 주는 자에게는 수레 열 대가 하사된다고 하는데 거들먹거리는 네 모양을 가만히 보아 하니 왕의 치질이라고 빨아 준 모양이구나. 그는 자신의 삶을 세속적 가치에 단단히 옭아매려고 애쓰는 자들을 조롱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문화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보다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삶을 더 높이 평가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이 전통 속에는 두 개의 정신이 흐르고 있으니 하나는 정도가 아니면 참여하지 않는다는 유가의 명분의식이요,다른 하나는 일체의 세속적 가치를 백안시하는 장자의 탈속의 정신이다.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면서 자신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자신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탈속의 철인 장자가 내뱉은 이 말이야말로 물아일체의 경지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정신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데 탁월한 성취를 보였던 동아시아의 예술혼이 싹텄다.인위적인 가치의 절대성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천지와 하나 되고 만물과 함께 흐르고자 하는데도 거기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고 대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동아시아 예술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우리는 지금까지 전해 오는 동양의 수많은 위대한 작품들 속에 장자처럼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어떠한 본질적 구분도 거부하는 물아일체의 정신이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발견한다.장자의 정신이 동아시아 예술을 수놓은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피 속에 끊임없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고동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장자가 펼쳐 보인 절대적 자유의 풍광은 전국시대 이후 그 흐름을 원활히 이어 가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 뒤로 숨게 된다. 그리고 위진시대가 되어서야 다시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여 세인의 관심 속에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이 그려 내는 경지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대까지 도가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황노도가라는 호수에서 발원한 물줄기이다. 장자와 마찬가지로 노자를 계승하는 흐름이지만 황노도가의 분위기는 장자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언뜻 장자처럼 일체의 인위적인 꿈밈을 거부한 자연 그대로의 삶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그러나 이는 상당히 연출된 자연이다.
연출된 자연이란 점에서 본다면 노자의 충실한 계승자는 장자라기보다 오히려 황노도가라고도 할 수 있다. 도덕경에 담겨 있는 노자의 기본 관심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도덕경에는 도라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에 대한 관심과 도에 기반을 둔 통치술에 대한 이야기가 뒤섞여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유심히 검토해 보면 노자는 그래도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정치가 가능할까 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황노도가는 바로 노자가 꿈꾸었던 자연의 운행원리에 기반을 둔 정치라는 이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황노도가는 인간의 자연스런 삶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는 정치를 꿈꾸었던 노자의 이른바 무위정치의 이상이 통치술의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황노도가라는 호수는 자연처럼 연출된 문명이라는 풍광을 그려낸다.즉 있는 그대로 두라는 장자 제일의 명제가 여기서는 있는 그대로를 연출하라는 다분히 인위적인 명제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호수의 경치를 감상하다 보면 우리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그것은 이 호수의 이름에 왜 황노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무심히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고려가 숨어 있다.이 점에서 황노도가라는 이름은 도덕경이 다른 바이블과 마찬가지로 역사속에서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포장되고 저리 각색되어 왔음을 일깨워 준다. 간단히 말해 황노란 명칭은 황제아 노자라는 인명의 첫 글자를 합쳐서 만든 조어이다. 그렇다면 황제는 누구일까? 그는 중국인들이 떠받드는 이른바 삼황오제라는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중 한 사람으로 치우라는 또 다른 제왕과 판천들판에서 싸워 승리함으로써 중화문명 즉 중국 역사의 기원을 열었다고 한다.이 전설은 고대에 벌어졌던 부족간의 전쟁을 신화화한 혐의가 다분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채 전승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황제가 치우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권을 확보하면서 자신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중국인들은 황제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황제와 노자는 무슨 관계에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자와 황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와 노자라는 이름이 결합하여 황노도가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데에는 고도의 정치적 냄새를 풍기는 배경이 깔려 있다. 그것은 직하라는 연구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선진시대에 황노학이라는 학파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제나라에서 벌어진 정치적 파워게임이다.
애초에 제후국 제나라는 주나라의 건국 과정에서 일정한 공헌을 한 강태공 즉 우리에게 낚시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강태공과 그이 후손에게 분봉된 나라였다. 그러니까 원래 제나라 왕족의 성씨는 강씨인 셈이다. 그런데 급격한 신분변동이 이루어진 험악한 분위기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헤게모니의 쟁탈전이 자주 벌어졌고 이 때문에 각 제후국의 왕권은 수시로 바뀌었다.제나라에서도 기원전 392년 전화라는 인물이 정권을 찬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나라 왕족의 성씨가 강씨에서 전씨로 바뀌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한 계층이 제일 먼저 신경쓰는 것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정당화 작업이다. 전씨의 제나라도 이 점은 예외가 아니어서 자신들의 가계에 대한 신성화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가계가 이리저리 따져 보면 전설시대의 황제에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각 제후국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선조를 전설상의 제왕 하나와 연결하여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다.제를 차지한 전씨 세력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가계에 대한 신성화 작업의 일환으로 황제에 대한 사상에 대한 연구 붐이 직하의 학자들 사이에 급속도로 번져 갔다.하지만 작업이 풍부한 학문적 자료에 근거하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 맞춰 의도적으로 추진되다 보니 황제에 관련된 전설외에는 황제의 사상을 연구할 별다른 자료가 없었다. 때문에 황제의 사상에 대해 연구하려면 기존의 다른 사상을 각색하여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노자의 사상이 주된 차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제나라 직하의 연구원들사이에서 황제와 노자가 결합된 황노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이 탄생하게 되었다.또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도가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는 황노도가라는 도가의 한 분파가 형성되었다. 그러니까 관계를 엄격히 따지면 황노도가는 황노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의 한지류에 해당하지만 앞서 말한 형성 배경 때문에 황노도가는 실질적으로 황노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탄생의 동기가 이같이 불순함에도 불구하고 황노도가는 전국시대 말부터 사상계의 대세를 장악하면서 한대로 이어져 갔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황노학은 노자의 역사에 획기적인 사건 하나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노자가 한나라 초기의 황노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최초로 경의 칭호를 획득하면서 도덕경이라는 일종의 바이블로 받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후세에 문경지치, 즉 아버지인 문제와 아들 경제의 훌륭한 치세의 시대라고 칭송되는 정치적 황금기였는데 한의 통치계급은 이 시기 국가 권력의 적극적인 행사를 가급적 억제하여 노자의 무위정치를 구현해 보고가 했다.따라서 당시 그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노자로 모아지게 되었다. 특히 문제의 부인이며 경제의 어머니였던 당시의 실권자 두태후라는 여인은 황노학에 심취하여 노자를 비방하는 사람을 돼지우리에 가둬 버리기까지 했다. 그녀의 이런 취향은 자연히 아들인 경제와 손자인 태자 왕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야말로 황노학 일색인 시대를 만들어 낸다. 유학자들은 아예 관직에 등용하지도 않는 극단적인 친황노학 정책까지 실행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자는 겨으이 위치로 격상되어 바야흐로 노자가 아닌 도덕경의 시대를 열어 간다. 그러나 황노도가를 축으로 한 황노학의 절대적인 권세는 경제에 이어 등극한 무제에 의해 막을 내린다. 무제는 동아시아의 문명사를 바꿔 놓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선택을 한다. 그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한제국의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이를 계기로 도가 계열의 사상은 제도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노자의 역사에서 보면 일시적인 표면상의 후퇴에 불과했다.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황노학은 당시 주류에서 밀려난 몇몇 사조와 결합하면서 이후 동아시아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유학만큼이나 중요한 영향을 미친 하나의 종교적 운동과 깊숙한 관련을 맺는다.그것은 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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