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의 나라 - 박원재, 최진덕
도덕경
동아시아 지성사이 두 라이벌
제자백가가 새로운 헤게모니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던 전국시대중엽의 일이다. 공자를 계승하는 유학이 전도사로 자부하며 논적들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여 나가던 맹자는 왜 그렇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대답을 한다.
지금은 제후들이 방자하게 행동하고 아무런 지위도 없는 무리들이 제멋대로 지껄이고 다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천하를 주름잡고 있으니 세사의 여론은 어쩔 수 없이 양주나 묵적에게 쏠리게 되어 있다.결국 양주와 묵적의 학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공자의 가르침은 빛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내 어찌 논쟁이 좋아서 이러겠는가? 다만 이런 상황을 바로잡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일 뿐이다.
묵적은 우리에게 묵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개인 중심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를 주장했다. 묵가 학파의 창시자인 그는 당시의 혼란이 모두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풍토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또 하나의 인물 양주는 생명의 가치를 철저히 존중한 사람이다.그는 자기 정강이에서 털 한 오라기를 뽑아서 천하가 태평해진다 해도 결코 그 털 하나르 뽑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다.그는 어떤 이념이나 목표 때문에 무한한 의미를 지니는 생명의 가치를 희생하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전국시대의 많고 많은 사상가 중 왜 유독 이 두 사람을 논적으로 지목했던 것일까?맹자의 말을 통해 본다면 이는 먼저 그들의 학설이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 가장 유행했던 사상이었기 떄문이다.유학의 부흥을 꿈꾸던 맹자의 입장에선 무엇보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을 잠재우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나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바로 맹자와 이들 쌍 사이에 존재하는 견해 차이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사건이 기나긴 시차를 두고 되풀이되었다.맹자가 죽은 지 천여 년 뒤 이번에는 당나라의 한유가 맹자의 뒤를 잇는다.그 역시 서로 다른 사상들이 각축하던 상황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부흥시키고자 노력한 유학의 전도사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맹자의 논적은 양주와 묵적이었고 한유의 논적은 노자와 석가모니의 후예들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사상적인 세력 판도는 불교와 도교가 유교에 비해 우월한 상황이었다.노자에 맥을 대고 있는 도교는 얼마간의 우위를 점한 경쟁자인 불교와 호각의 세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유학은 상대적으로 중심권에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심지어는 유가내부에서 일찌감치세력의 불리를 인정하고 도교와 불교 세력이 그늘에 안주하려는 패배주의적 경향마저 나타날 정도였다.예를 들어 당시 도교도와 불교도는 자신들의 교조과 상대방의 교조보다 세상에 먼저 등장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탄생 연도를 날조하고 있었다.반면 패배주의적인 일군의 유학자들은 공자를 노자나 석가모니의 제자로 치부하는 주장을 공공연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일부 유학자들이 공자를 노자나 석가,특히 노자의 손아래에 두는 데 쉽게 동의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에대해 묻고 배웠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엄연히 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학자들은 그 기록이 출처 중 하나가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오경 가운데 하나인 예기라는 점 대문에 매우 곤혹스러워했다.사실 공자와 노자의 만남에 대한 일화는 한유가 살던 당나라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늦어도 전국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초기에는 꽤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마천이 쓴 불후이 명저 사기에도 노자와 공자를 다루는 부분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반복해서 실려 있다.
그 동안 공자와 노자가 만났다는 사건의 진위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하지만 도가를 적대시하는 유학자들은 이 문제를 매우 곤혹스러워하여 사실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거나 아니면 누구에게나 배움을 구했던 공자의 겸허한 학문 자세를 보여 주는 일화하고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이 우리에게는 공자와 노자가 만났다는 사실의 진위여부도 누가 더 탁월한 스승인가 하는 점도 중요하지 않다.중요한 것은 우리가 맹자에서 한유로 이어지는 유학자들의 그런 호교적 태도를 통해 동아시아 지성사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긴장구도를 읽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그것은 공자와 노자로 각각 대표되는 유가와 도가사이에 형성된 긴장구도이다.
한유는 당시 사상계의 중심에서 유학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을 한탄하며 유학의 맥은 끊어졌다고 통곡하였다.그리고는 맹자를 높이 평가하며 노자와 석가의 학설을 물리치고 자신이 감히 끊어진 유학의 맥을 다시 잇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밝혔다.그런데 천여 년전 맹자가 맹공을 퍼부었던 양주도 사실은 도가 계열의 사상가였다.그는 도가사상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데 공헌한 선구자 중 하나로 정통 도가의 한 분파를 대표한다고 평가된다. 맹자와 한유 사이에는 천여 년이라는 간극이 있었다. 또 묵적이 석가로 바뀌는 한쪽 전선이 변동이 있었다. 하지만 맹자와 한유는 유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바로 도가를 공통의 논적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당연하지만 지극히 중요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동아시아인의 삶에 절대적 권위를 행사했던 유학이 어째서 도가에 대해 끊임없이 적대감을 표시했던 것일까? 거창한 우주의 이야기에서 일상의 세세한 뿐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문명을 지배해 온 유학적인 세계관 속에서 도가는 왜 항상 위협적인 요소로 인식되었던 것일까? 해답이 무엇이건 이 의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도덕경을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 하나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이는 곧 유학이 도덕경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우회로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부터 노자와 그로부터 시작된 도가적 사유를 정확히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러자면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경'으로 대부분의 시대를 군림했던 유학과의 관련 속에서 도가의 맥락을 읽어 내야만 한다. 우리가 도덕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유학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자가 꿈에서도 주공을 흠모했던 이유
기원전 497년 경 50대 중반의 공자는 고국 노나라의 기득권층을 상대로 한 두 번의 결정적 인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켜 줄 다른 제후를 찾고자 기약 없는 유랑기에 오른다.그러나 그 여정은 공자에게 쓰디쓴 좌절감만 안겨 주었다. 그를 맞아 준 것은 제후들이 따뜻한 환대가 아니라 환대를 가장한 무관심이거나 싸늘한 냉대뿐이었던 것이다. 실의에 빠진 공자는 '집잃고 떠돌아 다니는 개와 같은 꼬락서니'라는 치욕스러운 평을 뒤로하고 14년여에 걸친 유랑 생활 끝에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때가 그의 나이 68세 죽기 5년전쯤이다. 대략 이 무력, 그러니까 적어도 정치판에서의 거듭된 실패를 확인한 인생 후반기의 어느 날,공자는 다음과 같은 탄식을 내뱉는다.
"심하도다 나의 쇠약함이여! 이제는 꿈에서조차 주공을 뵌지 오래 되었구나!"
아마도 공자는 자신의 비전이 뒷날 이천 년 동양의 역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된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의 삶을 실패한 인생이라 단정했던 것 같다.그런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주공'이란 인물은 누구일까? 공자의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공자는 자기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에 주공을 언급했을까? 이는 공자라는 인물의 삶과 생각에서 발원하여 이후 동아시아를 적셔 온 거대한 유학의 강이 어떤 세계에 도달하려 했는가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주공'의 성은 희요 이름은 단으로 주나라의 시종인 문왕이 아들이었다.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실질적으로 천하의 패권을 확립한 주나라 2대 무왕이 그의 형이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은을 멸했고 무왕이 죽고 나자 나이 어린 조카 성왕을 보좌하여 주나라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공자는 주공에 대해 극진한 예로 흠모와 존경의 염을 표했으며 주공은 훗날 유가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까지 올랐다.그러나 공자는 위에서 쓴 주공이 이력 때문에 그를 존경했던 것이 아니었다. 주공의 역할은 주나라의 질서를 새롭게 확립하는 것었다.주공에 의해서 새롭게 짜여진 주나라의 질서 체계는 흔히 주나라의 예의제도 즉 주례라고 불렸는데 공자와 주공은 바로 이 주례를 통해서 연결된다.주례야말로 공자가 평생에 걸쳐 부흥시키고자 했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는 한마디로 분열과 통합의 상반된 두 흐름의 교차하던 시기였다.주나라의 기존 질서는 끝없이 붕괴로 치달았고 천하는 여러 제후국으로 분열됐지만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운 통일을 향한 통합의 기운도 싹터 갔다.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라는 말도 있듯이 제자백가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고민의 초점을 맞추었다. 제자백가의 철학은 한마디로 중국 사회를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던 기존 질서를 대신할 새 질서를 찾아보자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제자백가가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던 것은 시대에 대한 그들의 몸부림과 고뇌가 그만치 치열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자백가의 사상은 한마디로 정치적이다. 그것들은 대개 공동체를 안정시키려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에 대한 모색이었디 때문이다.그러나 제자백가의 각 세력은 그런 공동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과정에서 각자 다른 노선을 선택했다.각 세력들의 노선이 보여 주는 구체적인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바로 그 차이 떄문에 수많은 지식인과 다양한 학파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또 그 차이가 선진시대 사사의 다양한 골짜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노선들 가운데 문제의 해결 방식에서 여타의 노선과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한 노선이 있었다.제자백가의 궁극적인 관심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으로 그것을 묵시적으로 기존 질서와의 결별을 의미했다.실제로 대부분의 제자백가는 이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대신 그 의미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던 특이한 그룹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유가였다.
유가는 당시의 혼란이 기존 질서의 문제점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그들은 반대로 과거의 근본정신이 여러 가지 시대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결과로 진단하였다.그들에게 기존의 질서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완성으로 이끄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량한 규범이었다.기존의 질서는 갈아치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회복시켜야 할 이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가는 시대의 위기를 극복할 가장 바람직한 방안이 기존 질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 가치를 새롭게 정당화함으로써 그것이 지향하는 세계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이것이 당시 공자가 걸어간 길이며 유가가 걸어간 길이다. 그러면 공자가 그토록 긍정하고자 했던 기존의 질서 체계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주례였다. 모든 신흥 건국세력이 그렇듯 주나라의 건국세력도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뒤 이를 영구히 지속시켜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런데 이들은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를 연결시키는 가장 강력한 끈 중 하나인 혈연의식 곧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럽고도 끈끈한 감정에 주목하게 된다.그들은 만약 나라에서 임금과 백성의 관계가 가정에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인간사회의 가장 기본적 조직인 가족 그 가족의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친애의 감정에서 통치질서의 원리를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결속력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할 최상의 통치원리가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 주나라 통치제도의 양대 기둥인 종법과 봉건이다.
종법은 한 집안의 혈통을 대표하여 계승하는 승계권자를 정한 제도로 같은 동아시아 문명권인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한 제도이다.가령 평소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결정권을 누가 쥐고 있든 간에 제사에서 제주는 종손이 맡아 하는 전통이 여기에 해당한다.그러니까 종법이런 한 집안의 핏줄의 정통성을 확인시켜줌으로써 혈연으로 맺어진 그 집단의 질서가 자동으로 유지되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봉건은 종법을 주나라의 정치체제 전반에 확대적용한 것이다. 이 제도에서 통치세력의 정당한 계승권자는 정실 부인의 몸에서 난 맏아들인 적장자로 그는 천자가 되어 직할지를 직접 다스린다.그리고 천자의 직할지 바깥에서부터 변경지역까지는 천자의 대리 통치자들이 천자와 혈연적으로 가까운 순서대로 배치되어 다스린다.바로 이것이 주나라가 채택한 봉건이란 제도이다. 주의 건국세력은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해 마치 종손을 중심으로 한 집안의 위계질서가 유지되어 가듯 주의 왕실을 중심으로 천하의 질서가 영속되어 가는 효과를 노렸다.주의 건국세력은 인간의 혈연의식에 기초한 가족 질서를 사회 전체의 위계질서로까지 학대하면서 하나의 나라를 가조그이 학대판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이는 인간의 자연스런 정감을 사회적 위계질서의 토대로 삼은 것으로 곧 자연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피를 나눈 소규모의 가족 사이에도 나름대로 규범이 존재하여 집안에는 항상 가장이 있고 사소한 대화에서 주요 결정에 이르기까지 규범과 예절이 늘 따라붙는다.흔히 강조되는 효도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규범 주의의 하나이다.이러한 혈연의식에 기초한 질서가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서 사회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위계질서가 사회 전체로 확대되면서 사회는 자연스럽게 거대한 위계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구상이 현실화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사회 구성원들이 자연적 정감과 사회적 위게질서의 일치를 당연하고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 제도를 사람들끼리의 합의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송향에서 끄집어내려 할 경우 그것은 외부적인 단순한 강제여서는 안 된다.그보다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런 성향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즉 구성원들이 사회제도를 자신들의 자연스런 삶의 질서로 받아 들이게끔 만드는 규범의 체계가 필요한데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예이다.
예는 가족 구성원 사이는 물론 인간과 인간 그리고 왕과 백성의 관계에서까지 인간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규범이다.따라서 주나라의 예는 한편으로 상하관계의 위계질서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주나라의 건국세력은 나라가 일일이 강제하거나 처벌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자식이 자식 된 도리를 다하듯 백성들이 이 예를 지킴으로써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어버이로 받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주례는 이와 같은 외도 속에서 만들어진 주나라의 규범체계를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다. 즉 주나라의 건국세력은 자연적 정감이 영속되듯이 주례를 통해 정권의 영속성이 보장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목적에서 마련한 일련의 제도적인 구상들이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면서 한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보편적인 가치로 역사 속에 살아남게 된다. 주례는 주가 망한 뒤에도 중국인이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과 세계를 관계짓는 기본적인 사유방식으로 자리잡았으며 특히 유가의 중요한 이념적 토대로 정착되었다. 공자가 당시 혼란한 사회에서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주례를 근간으로 하는 주나라의 문화적 전통이었다.그는 논어에서 자신의 평생에 걸친 작업에 대해 그저 술이부작이라고만 이야기했다. 이는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의 문화를 새롭게 설명하려 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공자는 주례속에서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의례적인 형식 이상의 의미를 짚어 냈고 주례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하여 찬양하고 널리 성양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자가 볼 때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 완성되어 가는 존재이다.인간은 결코 개인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누구의 보호자이거나 누구의 자식 혹은 친구로 존재한다.즉 인간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다양한 사회관계의 한 축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늘 다른 사람이나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적 존재 즉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울타리를 부단히 넘어서서 수많은 관계를 잘 맺어 가며 그 속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를 통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으며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것이다.공자는 주례가 인간드르이 다양한 관계를 올바르고 정당하게 이끌고자 한 규범이기에 그것이 인간됨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체계라고 생각했다.그는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도록 하는 최선의 길이 주나라의 이념에 있다고 본 것이다.그렇다면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공자가 왜 주공을 안타깝게 그리워했는가에 대한 답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공자가 완벽한 규범으로 생각했던 주례를 실질적으로 완비시킨 인물이 주공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꿈에서조차 주공을 뵐 수 없다는 공자의 탄식은 주례의 부흥이라는 평생의 염원이 끝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고 스르져 감을 못내 아쉬워하는 비감 어린 독백이었던 셈이다.
예는 인간으로 하여금 수많은 상황과 관계속에서 가선 안 될 길과 꼭 가야 할 길을 가리키는 인생의 나침반이다.그리고 그 궁극적인 지향점은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다.유학이 이른바 예교에 집착했던 이유는 애시당초 예의 실천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자아를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가는 인간사회만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세계 전반을 역시 도덕적인 관점으로 보는 특유의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만약 도덕이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인간이 제멋대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구태여 그것을 지키지 않도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또한 꼭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하게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도덕적임이 인간과 세계의 본래 모습이라고 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은 인간답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유가는 도덕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천지자연의 본성이라고 주장한다.만물이 만물답게 조화를 이루며 작동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도덕적인 시스템 속에 있기 때문이다.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도우며 사랑으로 아이를 키워 가듯 하늘과 땅도 비를 뿌리고 햇볕을 보내며 서로 도와 만물을 길러 간다. 유가는 바로 이런 식으로 우주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우주의 만물은 도덕적 질서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려 이러한 질서 속에서라야 제대로 제 역학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다른 사물과 달리 이러한 과정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 특수한 존재이다.따라서 인간은 자신과 우주의 도덕적인 본서오가 질서를 인식하고 이에 걸맞은 적절한 도덕적 실천을 통해 우주의 움직임에 동참할 수 있으며 이런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인간은 세계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다.이것이 유가의 기본적인 상유방식이며 동시에 신중심의 다른 문명권과 구별되는 동아시아 문명의 독특한 세계관이다. 신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세상 그 자체가 매우 불완전한 덩어리이다.인간과 세계는 신의 작용으로 창조되고 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따름이기에 그가 없을 경우 인간과 세계는 마치 운전사가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따라서 불완전한 세계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절대적인 의지처와 믿음의 근거를 신에서 끌어올 수 끌어올 수밖에 없다.결국 그들은 인간의 완성이라는 말보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말을 선호하며 어떤 초월적인 존재나 절대신에 의지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즉 인간이 갖는 의지의 빈약함과 불완전함은 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비해 유학과 이를 축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명은 인간의 문제는 인간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이런 점에서 유학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구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전성을 갖추고 있는 유기적이며 호혜적인 세계상의 틀 안에서 인간의 문제를 해명해 보려고 하는 인간적 신념의 표현이다.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중국적 인문주의라고 부르는 신념이다. 그런데 유학이 그리는 하해적인 세계관 속에는 어쩔 수 없는 그림자가 깔려 있다.비록 유학이 세계아 인간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고 하더라도 유학의 기본적인 관심을 당연히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다.왜냐하면 도덕이란 지극힌 인간적인 가치로 인간을 배제하고선 말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유가가 바라본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특정의 가치 즉 도덕적으로 바라본 세계이다.그러므로 유학적 세계관은 도덕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도덕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물론 이같은 왜곡이 유학에만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철학을 한다는 게 곧 인간이 행위하는 점을 인정한다면 세상을 향한 모든 질문가 대답에는 인간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인간을 만물 가운데 하나로만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러한 왜곡이 가능성은 최소화된다.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자를 만나게 된다. 즉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자를 만나게 된다.즉 우리는 인간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을 거부해야 흔쾌히 인간을 세계속의 한 존재로 되돌려 놓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비로소 공자와 함께 동아시아의 정신사를 양문하였던 노자라는 한 위대한 철인의 생각 속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진리 그 자체에는 침묵을 지켜라
노자는 세계에 대한 어떠한 인간주의적 해석도 거부하기에 도덕과 같은 특정의 가치에 젖어 세상을 보려 하지 않는다. 그가 볼 때 세계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세계는 만물에 대한 특별한 배려도 있을 수 없다. 또한 노자가 볼 때, 인간의 삶에 등장하여 인간을 위해 애쓰는 하나님처럼, 세계의 안팎에서 만물을 위하여 특별히 애쓰는 그런 존재는 이 우주에 없다. 노자는 만물이 모여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만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또한 자연스럽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힘차게 살아 움직인다.이런 과정이 끊이지 않는 것이 바로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 세계는 자연이다.자연에는 자연에 앞서 존재한 창조주의 설계도가 있지 않으며 절대신의 의지를 쫓아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가득 찬 물은 스스로 흘러 넘치며 달도 때가 되면 제 스스로 이지러지듯 삶을 마감한 생명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스스로가 알아서 하는 일일 뿐이다.즉 자연이란 여기 있는 그대로의 만물이 연출해 내는 스스로 그러함의 체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세계에서는 다른 어떤 것에 앞서거나 절대적으로 귀중한 존재란 없으며 도덕적으로 더 우얼한 존재도 없다. 만물은 세계 속에서 서로 맞물려 하나의 생명체처럼 떨어질 수 없고 관계 속에서 자기의 개성을 드러내고 유지하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열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노자는 왜 세계를 도덕적인 목적이나 인간적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를 거부한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중심 가령 도덕이라는 틀에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유가의 시도가 인간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유학적인 세계관으로 정작 굴절되고 고통받는 것은 세계자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이라는 점을 간파하였다.가령 유학은 하늘은 이러저러한 도덕성을 갖췄으므로 왕은 이를 본받아 인간세계를 도덕적으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그런데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왕은 하늘이 내린 존재이며 그가 말하는 도덕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거역할 수도 바꿀 수도 없게 되어 버린다. 유학은 이렇듯 특정한 가치를 세계의 본질로 고정시키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은 원래 이런 것이고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그런 논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을 그 방향으로 굴절시킬 수밖에 없다.인간의 어느 한 측면만을 하늘이 본뜻이라 추켜 세운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그거소가 배치되는 측면은 부정하고 죄스런 것이 된다. 이 과정에서 당시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나 이념에 적응하는 사람은 인간으로 대접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빚벙상적인 아웃사이더로 추방된다. 우리는 이런 폐단을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확인할 수 있다. 모든 문명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논리를 지닌다. 문명이 최소한의 설득력과 명분마저 잃어버린다면 그런 문명 속에서 살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적 가치와 도덕적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문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며 그런 문명은 곧 해체되고 말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 문명을 지탱시키는 근본적인 논리는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진리 때로는 인간적인 것 등의 이름으로 찬양되며 노래와 춤,연극, 위대한 예술품을 통해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된다. 그리고 이에 비례하여 다른 문명의 다른 논리는 자동적으로 이상한 것 위험한 것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가지들 문명의 논리를 널리 알리고 이를 잘 포장한 구성원에게는 높은 관직을 보장하거나 포상금을 내리고 위대한 교사나 영웅이라는 칭호가 내려진다. 그러므로 문명을 이루고 사는 인간에겐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노자의 탁월한 계승자인 장자가 꼬집은 대로 문명의 요구대로 다리를 잡아늘여 학이라는 표준을 흉내내는 오리가 되든지 스스로 아웃사이더로 소외되든지 하는 두 가지 길뿐이다.인간은 자기 사회에서 아름다워지기 위해 입술에 구멍을 뚫는가 하면 쫓겨나지 않기 위해 스포츠 머리에 제복을 입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는 문명의 허구성을 본다.노자는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다해도 문명이란 결국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을 굴절시키고 왜곡하는 폭력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노자의 사상은 바로 문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것을 근본에서부터 뒤집어 버리기 위한 기획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노자도 세계를 유지시키는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를 긍정한다. 노자는 이를 편의상 '도'라고 부른다.그러나 노자 철학에서 이 '도'는 특정의 그 무엇이 아니라 만물이 잦발적으로 움직이는 모습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도는 고정된 내용이 없다. 만물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쉴 새없이 변해 가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정된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도는 모든 것을 담아 내는 근본적인 원리가 될 수 있다.노자는 풀이 만물의 근원이다. 어떤 도덕이 만물의 근원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가령 풀을 주위의 거름과 물 햇볕 등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씨앗을 널리 퍼뜨려 자신의 삶을 확대하려고 애쓰는데 이런 풀에게 나무는 경쟁자이거나 위협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따라서 풀이 만물의 근원이라면 나무의 속성은 진리의 세계에서 부정되어 버리며 풀의 진리는 나무를 부정하거나 나무적인 것을 담을 수 없는 반쪽짜리 진리가 되어 버린다.그러므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 내는 그릇은 풀이나 나무 등 개별적인 존재로부터 자유로운 거울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거울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고 텅 빈 그 무엇이다.우리는 거울 자체에 대해 풀이다,나무다라고 얘기할 수 없는데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거울은 풀이건 나무이건 가리지 않고 있는 그래도를 보여 줄 수 있다.그래서 노자는 도를 텅 빔 곧, 허라고 말한다. 도는 이처럼 스스로 비어 있기 때문에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 내는 최고의 원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그러나 노자의 위대함은 이 역설에서 온다.그는 세계를 지탱시키는 근본 원리인 도가 곧 허에 다름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각 문명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들을 밑바닥에서부터 허물어 버린다.문명이 존재하려면 언어가 있어야 하고 범이 있어야 하며 진리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한다.그러므로 진리는 말로 고정할 수 없다는 노자의 언급은 모든 문명의 이념에 대한 치명타가 되는 것이다. 노자는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이라고 하였다.따라서 언어로 표현되는 모든 이념이나 주장들은 도에 비하여 열등하거나 상대적이며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도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노자 1장의 첫 구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명제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됨직하다. 즉 노자는 모든 기존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대신 그 자리에 자신의 도를 새롭게 앉힐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도는 곧 허라는 역설을 통하여 마찬가지로 부정된다.모든 만물의 원리가 되는 최고의 자리가 텅 빔 곧 허가 된다면 노자의 철학에서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만물밖에 없다.즉 노자의 도는 만물에 내재한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만을 본받는다고 할 수 있다. 노자에서는 어떠한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움직여 가는 자발적인 존재들의 세계만이 긍정되는 것이다. 이를 인간세계에 대입하면 인간을 만들고 인간 개개인의 머리 위에서 이들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지시를 내리는 절대신이나 이념 진리 등은 설 땅이 없어져 버린다. 각 존재들이 스스로 움직여 나가는 그대로의 세계 ,곧 자연의 세계만이 노자에게는 참된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통하여 노자는 문명의 이름으로 선전되는 어떠한 기존의 가치체계도 거부하고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런 삶을 복원히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 그 자체인 세계와 진정 어울리는 살므이 모습이라고 보았다.이는 유학의관점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인간과 세계가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맹자는 양주를 공격하면서 그의 학설은 군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 학설이라고 비판하였다. 군주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말은 사회의 위계질서를 부정한다는 뜻으로 이는 유학이 바라본 인간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에 정면으로 배치된다.유학에서는 가정에 가장이라는 중심이 있듯이 세상에는 군주라고 하는 만백성의 중심이 있다고 보았다. 군주는 무릇 성인이거나 성인과 비슷해지려고 하는 자로 도덕적인 하늘의 뜻을 인간세계에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노자의 사고방식과 가까웠던 양주의 입장에서는 그런 군주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노자는 결국 어떤 종류이건 권위에 인간을 읽어매려는 일체의 시도로부터 인간을 본연의 모습으로 해방시키고자 했던 저항의 외침이었던 셈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주는 한 생명처럼 만물이 유기적으로 얽혀 돌간다는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고다와 유가는 결별할 수밖에 없었고 끝내 화해할 수 없었다. 만물이 지니고 있는 전체의 질서를 도라고 한다면 만물의 하나하나에도 이러한 도가 숨어 있을 것이다. 노자는 이럴 덕이라고 부른다.이 때문에 중국철학사의 기념비적 문헌인 노자를 전체성의 질서와 개체성의 질서의 원리에 대한 바이블, 즉 도덕경이라고도 부른다. 이제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저항의 철학자 노자와 그의 도덕경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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