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9. 아무도 공을 세운 사람이 없었다(조선 열전)
대패하여 산 속을 헤매는 한나라
무너지지 않는 왕검성
아무도 공신은 없었다
조선의 왕 위만은 원래 연나라 사람이었다. 연나라는 전성시대에 조선을 공격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는 한편, 국경 지대인 요동 지방에 요새를 쌓게 했다. 한나라 때 조선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요동의 요새를 다시 쌓고 패수(중국에서는 압록강이라 주장하는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송화강이라 주장해왔다.)를 경계로 연나라에 소속시켰다. 그 뒤 연나라 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도망갔을 때 위만도 망명했다. 그는 천여 명을 이끌고 머리를 상투 모양으로 틀고 동쪽으로 요새를 나가 조선에 자리잡았다. 그리고는 자주 한나라 요새 부근을 침범했다. 그 후 위만은 조선의 왕이 되었고, 왕검(평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혜제 시대 때 천하가 평정을 되찾자, 요동군 태수는 위만과 이렇게 약속했다.
"조선왕은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밖의 오랑캐를 다스리고 변방에서 그들이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또 오랑캐의 족장들이 한나라 황제를 알현하려 할 때 저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황제에게 올려 승인을 받았다. 이때 위만은 한나라로부터 많은 무기와 재물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나라가 수천 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손자 우거가 왕이 되었을 때 많은 한나라 사람들이 도망쳐 나와 세력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한번도 한나라에 입조한 적이 없었고, 주위 소국들이 황제에 알현하기 위해 올리는 글도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그러자 한무제 2년에 한나라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를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 성과도 이루지 못한 섭하는 무언가 면목이 서야 했으므로 돌아오는 기에 패수까지 전송나온 조선의 관리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황제에게, "조선의 장군이 말을 듣지 않길래 단칼에 죽이고 왔습니다."하고 보고했다. 황제는 그를 칭찬하고는 요동의 수비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조선은 섭하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끝내 섭하를 죽였다.
대패하여 산 속을 헤매는 한나라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조선을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죄수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전에 남월을 정복했던 누선장군 양복에게 군사 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 지방에서 해로로 쳐들어가게 했고, 또 좌장군 순체는 요동으로부터 출정케 하여 우거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좌장군의 부장인 다는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다가 오히려 대패하였다. 그래서 다는 군법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편 누선장군 양복은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통해 왕검성을 쳤으나, 우거왕의 맹렬한 반격에 밀려 크게 패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양복은 10여 일 동안이나 산 속을 도망다녀야 했다. 또한 좌장군 순체는 패수 서쪽의 조선 군대를 공격했지만 이렇다 할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우거왕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평화 조약이 맺어졌고 우거왕은 태자를 보내 사과하도록 했다. 이윽고 태자가 패수를 건널 때 무장한 군대 1만 명도 따라 건너려고 했다. 이를 본 위산은 순체와 상의하더니 혹시 속임수가 아닌가 해서, "무기를 모두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시오."라고 태자에게 말했다. 그러나 태자 역시 한나라가 자기를 속여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수를 건너다 말고 되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 하자,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위산을 처형시켜 버렸다. 그리고 재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순체 장군과 양복 장군은 함께 왕검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무너지지 않는 왕검성
그런데 원래 좌장군 순체는 궁중에서 황제를 모시고 그 총애를 받고 있었으며, 그의 군사들 중에는 날쌔고 용감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교만했다. 하지만 양복은 처음부터 공격에 실패해 병사를 많이 잃었기 때문에 싸우기를 겁냈다. 그래서 그는 우거왕을 포위하면서도 화친을 맺기 위해 자주 사자를 파견했다. 그래서 순체의 기습공격 계획은 번번이 무산되었고, 조선은 은밀히 정탐꾼을 파견하는 한편, 양복과 화친을 교섭하였다. 순체는 몇 번이나 양복과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지만, 그때마다 양복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싸움을 회피했다. 그래서 순체는 급한 나머지 자주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구해 봤지만, 조선은 단호히 거절한 채 양복과의 교섭에만 신경썼다. 그러자 순체는 양복을 의심했다. '양복이 조선과 합세해서 나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닐까.'
아무도 공신은 없었다
이 때 황제는 탄식했다. '지난 번엔 위산이 일을 그르치더니, 이번에는 두 장군이 서로 반목하고 있어 일을 망치고 있구나!' 그리고는 공손수를 사신으로 보내면서 사태를 바로잡고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조선이 벌써 항복했을 텐데, 양복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라며 양복이 자주 공격하겠다고 하면서도 회피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냥 놔두면 양복은 조선과 짜고 우리를 공격할지 모릅니다. 어서 손을 쓰십시오."라고 부추켰다. 이에 공손수는 양복을 감금하고 순체로 하여금 군사의 지휘권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한편 순체는 양복의 군사를 흡수하고는 더욱 맹렬히 공격했다. 이때 조선의 대신들이 몰래 모여 상의했다. "우리는 양복에 항복하려 했는데, 이제 양복이 체포되었으니 싸움이 급해졌소.우리가 이기기는 어려운데, 우거왕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서 그들은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해 여름에 우거왕이 부하에게 암살당했으나, 대신이던 성이가 성을 또다시 굳게 지켰다. 그러나 한나라는 이윽고 왕검성을 함락시켰으며, 그곳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사군을 설치하였다. 그 뒤 순체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공적을 다투고 질투하며 모략했다는 죄로 처형되어 그의 목은 시장에 걸렸다. 양복도 그 군대가 좌장군의 도착을 기다려 같이 공격해야 하는데도 멋대로 진격하여 결국 많은 군사를 잃은 죄로 처형되어야 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부하 장군 중에서도 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한나라의 조선 공량으로 상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우거왕은 험난한 요새의 지형을 과신하여 나라를 망쳤고, 섭하는 공을 속여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또한 누선은 적은 군사로 무리한 작전을 벌여 10여 일 동안이나 산속을 헤매야 했고, 이 때문에 분열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리고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결국 공손수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 전쟁에서 양측 모두 치욕을 당했으므로 누구도 공적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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