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8. 서역으로 가는 비단길(장건)
흉노 공략을 발단으로 한나라와 서방 제국과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 때 서방의 길을 개척한 것이 장건이다. 한나라의 하급 관리에 불과했던 장건은 흉노족에게 사로잡혀 있던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귀중한 자료를 모아 후에 본국으로 들고 왔다. 이 보고 자료에 의해서 무제의 세계를 향한 꿈은 피어났고, 그 꿈은 차례차례로 장건의 후계자를 낳았다. 그러나 이 후계자들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13년 만에 귀국한 장건
서방에 관한 지식은 장건에 의해 처음으로 전해졌다. 장건은 한중 지방 출신으로 낭(하급 관리)이 된 인물이다. 당시 무제는 흉노의 투항자들에게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흉노는 월지의 왕을 쳐부수고 그 왕의 두 개골로 술잔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월지는 서쪽으로 도주했으며, 흉노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적개심과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나, 협력해서 흉노를 공격할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때마침 흉노를 격멸하고자 기도하고 있던 한나라 조정에서도 이 정보를 바탕으로 월지와 손을 잡기 위해서 사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나라와 월지 중간에는 흉노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사자는 흉노의 세력권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 중임을 완수할 인물을 모집하기로 했다. 이때 스스로 응모해 월지로 가는 사자로 발탁되었던 사람이 바로 장건이었다. 사자가 된 장건은 흉노인 감보라는 사람을 데리고 출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행은 영내를 통과하다 잡혀서, 선우에게 압송되게 되었다. 선우는 장건을 구속하고 이렇게 문책했다.
"월지국이라면 우리 나라보다도 북쪽에 있지 않은가. 네가 월지에 도착할 길은 없다. 가령 내가 월나라로 사자를 보냈다면 한나라에서 잠자코 보내 주겠는가."
이리하여 장건은 흉노에 의해 10여 년간 갇혀 살면서, 거기에서 아내도 얻고 아이도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 사자임을 나타내는 황제는 부절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흉노에서 오래 살게 됨에 따라 장건은 서서히 행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드디어는 야음을 틈타서 일행을 데리고 월지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일행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걸어서 수십 일 후에 대원 지역(중앙 아시아)에 도착했다. 그런데 대원은 한나라의 강력한 힘과 풍부한 물자 소식을 전해 듣고 전부터 한나라와의 통상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원에서는 장건 일동의 도착을 환영했다. 그리고는 대원의 왕이 장건에게 물었다.
"우리 나라에 잘 와 주셨소. 그래, 일행은 대체 어디까지 가실 예정이오."
이에 장건은 말했다.
"우리들은 한나라를 받들고 월지로 가는 길입니다. 불행히도 흉노에게 잡히어 뜻하지 않게 세월을 허송하다가 겨우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왕이시여, 저를 월지까지 보내 주실 분이 계시다면 오로지 당신뿐입니다. 제가 월지로 갔다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 나라는 대왕에게 엄청난 예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이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장건 일행에게 안내와 통역을 붙여서 보내 주었다. 일행은 우선 강거(키르키즈 지방)에 도착했고, 이어서 강거 지방 주민의 도움으로 대월지 (우즈베크 지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에게 있어 한나라는 너무도 멀었다. 그러므로 협력해서 흉노를 보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일행은 이 나라에서 1년 남짓 머문 끝에 귀로에 올라 강족의 영토를 통과할 무렵 또다시 흉노에게 잡혔다. 그런데 이 땅에서 거의 1년 동안 머무는 중에 선우가 죽고 좌곡려 왕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서 장건과 흉노인 아내는 한나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드디어 조국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어 장건은 귀국할 수 있었다. 한나라 왕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장건 일행을 환영하고 장건은 태중대부로 승진하였다.
장건은 체력이 좋고 관대하여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 인품의 덕으로 그는 이국 사람에게도 호감을 샀다. 또한 감보는 흉노 출신으로 궁술에 능하여 식량이 떨어졌을 때에는 짐승을 잡아서 굶주림을 면했다. 한나라를 출발할 때, 장건 일행은 백 명 이상이나 되는 부대였으나 13년이 지나서 귀환한 자는 이 두 사람뿐이었다.
해를 따라 서쪽으로
장건이 실제로 발을 들여놓은 나라는 대원, 대월지, 대하, 강거의 네 나라이고, 정보를 가져온 주변국들만도 5, 6개국이나 된다. 그들은 이런 나라에 대해서 황제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대원은 흉노의 서남방, 한의 서쪽에 위치하며 거리는 1만 리쯤이나 됩니다. 그 땅에 인간이 정주하여 농경에 종사하며 벼와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만듭니다. 또한 품종이 좋은 말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피땀을 흘리므로 선조는 천마의 아들이라 합니다. 도시마다 성곽을 쌓고 가옥에서 삽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합쳐 70여 성, 인구는 넉넉히 수십 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기로는 활이나 창을 사용하며 기마전에 능합니다.
대원의 북쪽은 강거, 서쪽은 대월지, 서남쪽은 대하, 동북쪽은 오손, 동쪽은 한미, 우전입니다. 우전 서쪽 지대에서는 강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아랄해)로 가고 동쪽으로는 동류하여 염택으로 갑니다. 오손은 대원에서 동북으로 2천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 풍습은 흉노와 같으며 사람들은 일정한 곳에 정착하여 살지 않고 가축을 따라 이동합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수만 명으로 모두 용감히 싸웁니다. 이전에는 흉노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그 후 세력이 왕성해지더니 현재는 명목상으로만 흉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을 뿐 흉노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대월지는 대원에서 서쪽으로 2, 3천 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대하, 서쪽으로는 안식, 북쪽으로는 강거가 있습니다. 그들은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 민족으로 생활 양식은 흉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활을 쏘는 전사는 대충 20만 가량 될 것입니다. 이전에 강력했던 시기에는 흉노마저도 우습게 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흉노에서 묵특선우가 나타나서 월지를 격파하고, 또한 그 다음에 즉위한 노상선우는 월지왕을 죽여서 그 두 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처음에, 월지의 생활권은 돈황, 기련산 일대였으나, 흉노와의 일련의 항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그곳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원 땅을 통과하여 서방의 대하를 공격, 그곳을 점령하고 규수 북쪽에다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 중에서 채 도망가지 못한 나머지 무리들은 기련산에 있는 강족의 거주지로 들어가 소월지라 칭하고 있습니다.
안식국은 대월지에서 서쪽으로 수천 리쯤 떨어진 데 있습니다. 안식 사람들은 정착해서 농경을 영위하며 벼, 보리를 재배하고 포도주를 생산합니다. 성벽을 둘러쌓아 도시를 갖춘 것은 대원의 경우와 같습니다. 지배하는 도시는 대소 아울러 수백 성에 달하고 면적은 수천 리 사방에 이르는 가장 큰 나라입니다. 규수라는 강에 접하고 있으며, 교역 시장이 서고, 사람들은 수레와 배를 함께 활용하여 인근 제국뿐 아니라 때로는 수천 리 먼 나라와도 흥정을 합니다.
은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고 있고, 화폐 문양으로는 그때그때 왕의 초상을 사용합니다. 왕이 죽을 때마다 화폐를 다시 찍고 왕의 초상도 바꿉니다. 글을 쓰는 데는 약간 딱딱한 가죽을 사용하며 거기에다 문자는 옆으로 늘어놓습니다. 대하는 대원에서 서남쪽으로 2천여 리, 규수의 남쪽에 위치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착해서 성곽, 가옥을 갖추는 것이 대원의 경우와 거의 같습니다. 왕 한 사람이 전권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각 도시별로 영주가 분립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전투력은 약하며 전쟁을 두려워하지만 그 반면에 상업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서쪽으로 이동해 온 대월지에게 격파되어 완전히 예속되어 있지만 백여만이라는 풍부한 인구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중심 도시는 남시성이며 교역 시장에서는 가지각색의 물자들이 거래되고 있습니다. 대하 동남쪽에는 신독국(인도)이 있습니다."
황제의 꿈
장건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제가 대하에 있을 무렵, 공나라의 죽장과 촉나라의 직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장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 본 즉,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네 상인들이 신독국(인도)에 가서 그곳 시장에서 사온 것입니다. 신독은 대하에서 동남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나라로, 정착 생활을 영위하는 점은 대하와 거의 차이가 없지만 습기가 많고 덥다 합니다. 이 나라는 큰 강에 임하고 있으며 코끼리가 있어 사람들은 그것을 타고 싸움을 합니다....' 제가 추측하건대 대하는 한나라에서 1만 2천 리요, 방향은 서남쪽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신독국은 대하에서 동남방 수천 리 밖에 위치하고 촉나라 산물이 유통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촉땅에서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하로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강족땅을 통과하기는 길도 험할 뿐 아니라 주민의 환영도 못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약간 북쪽 길을 택하면 흉노에게 잡히게 됩니다. 이상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대하로 가기 위해서는 촉땅에서 출발하는 것이 거리도 짧고 방해받을 염려도 없을까 싶습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무제는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폈다.
'대원, 대하, 인식 등의 여러 나라는 모두 진귀한 산물도 많으며 정착해서 농사짓는 것도 중국 본토와 비슷하다. 그런데 군사력을 약하고 한나라 물자에 대한 욕구는 강하다. 더구나 이런 나라들의 북쪽에 위치한 대월지나 강거 같은 나라들은 군사력은 강하지만 자기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한나라가 힘으로서가 아니라 계통을 밟아 이들 여러 나라들을 복종시킬 수만 있다면 한나라 영토는 만 리 밖의 저쪽 끝까지 확대되고, 한나라 언어는 아홉 번이나 통역을 겪으면서 풍속이 다른 민족을 통일시킨다. 그렇게 되면 나의 권위는 이 세상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한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장건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 대하고 가는 4개의 통로를 정하여 밀사를 내보내도록 하였다. 밀사는 모두가 천 리에서 2천 리쯤 전진했으나 그 가운데서 북쪽으로 향해 간 자는 저족, 작족에게 길이 막히고, 남쪽으로 간 자는 쉬주, 곤명 일대에서 앞길이 막혔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서방으로 1천 리 남짓 떨어진 곳에 코끼리를 사용하는 나라가 있는데 전월국이라 불리운다는 것과 이곳에는 촉나라 밀무역상들이 왕래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나라는 이렇게 대하국과의 통로를 탐색하는 동안 처음으로 전월국과 통상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이전에도 서남 방면의 이민족과 통상을 시도했으나 막대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통로가 발견되지 않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건의 '대하국과의 통상은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한나라는 다시 서남쪽 이민족과의 교섭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건, 다시 떠나다
한때 장건은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의 흉노 토벌에 참가했다. 그때 토벌군은 장건의 안내로 물과 풀이 있는 장소를 따라 전진했으므로 물과 말 사료의 공급에 곤란을 받지 않았다. 장건은 이 공으로 박망후의 칭호를 받았다. 기원전 123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해 장건은 이광 장군과 더불어 흉노 토벌을 위해 또다시 출격했다. 이 토벌에서 이광 장군은 흉노의 포위망에 갇히어 크게 패배했다. 그런데, 그때 장건이 이광 장군과 합류할 날짜에 도착하지를 못한 것이 패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그는 처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평민이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한나라는 표기 장군 곽거병을 파견하여 서역 지대에서 수만 명의 흉노군을 격파하고 기련산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혼야왕이 부족민을 거느리고 한으로 하옥해 왔기 때문에 금성과 하서의 서쪽으로 남산을 따라 염택에 이르는 일대에서는 흉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흉노측은 이따금씩 척후병을 내보냈으나 그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2년 후 한나라는 또다시 선우를 공격하여 사막의 북쪽으로 쫓아 버렸다. 무제는 그 후에도 대하 등의 외국 사정에 대해 장건에게 묻는 때가 종종 있었다.
"제가 흉노 땅에 있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손에는 현재 곤막이라고 하는 왕이 있습니다. 곤막의 아버지 때에는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그때에 흉노가 이 땅을 침략하여 그 부친을 죽이고,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곤막을 들판에다 버렸습니다. 그러자 새들이 고기를 물어 아기에게 날라 주며 늑대가 찾아와서 젖을 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선우는, '신기한 일도 다 있구나, 필경 신의 아들일 것이다'하고 아기를 주워다 길렀습니다. 성장한 곤막은 군대를 잘 다루고 번번이 공을 세웠으므로 선우는 오손의 옛 부족민을 곤막의 지휘하에 넣고 서역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곤막은 부족의 경제력 향상에 힘을 기울이며 주변 부락을 습격하고 수만의 병사를 양성해서 거의 매일 침략전을 전개했습니다. 선우가 죽은 것을 기회로 곤막은 수하 부족을 이끌고 멀리 딴 곳으로 이동하여 독립을 선포하고 흉노에 대한 조공을 거절했습니다. 흉노측에서는 유격대를 자주 내보냈으나 결국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곤막은 역시 신의 아들이라고 공격을 중단하여 명목상의 속국으로 방치하였으나 내심으로 흉노는 대대적인 공격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정세로 보건대, 선우는 한나라의 새로운 사족을 못쓰는 형편이니, 지금이야말로 오손에게 마음껏 선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오손족을 혼야왕의 옛 땅에 거주시켜 우리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오손을 이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흉노의 바른 팔을 떼어 버리는 결과가 되며, 게다가 한번 오손과의 연합이 성립된다면 오손의 서쪽에서 대하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들을 모조리 길들여 속국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무제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장건을 중랑장에 임명하고 3백의 인원을 주었다.말은 한 사람에 두 마리씩, 소와 양은 만 단위의 숫자였다. 여기에 수천만 금에 해당하는 폐백을 들려 황제의 친서를 지닌 부사를 다수 수행시켰다.
요령부득
그 뒤 장건은 드디어 오손에 닿았다. 그런데 오손왕 곤막은 한나라 사자를 거만한 태도로 맞았다. 장건은 불끈 화가 났으나 그들이 한나라 물건에 대해서는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없이 말했다.
"이것은 황공하옵게도 천자께서 보내신 물자이니 만일 왕께서 즐겁게 받아들일 수 없으시다면 도로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곤막은 일어나서 사물을 경건히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에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였다. 장건은 곤막을 설득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오손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혼야왕의 옛 영토를 소유 할 때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면 우리 한나라는 옹주(제왕의 딸)를 왕의 부인으로 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손의 내부는 이미 분열 상태에 있었고 왕도 노경에 이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나라에 대해서는 너무나 멀었기 때문에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흉노에 대해서는 너무 오랫동안 속국으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심이 발동하여 한에 접근하는 일에 대해서는 중신들이 모조리 반대했다. 그리하여 왕도 이를 반대하여 단독으로 처리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장건은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요령을 알 수 없었다.(요령부득) 당시 곤막에게는 10명 안팎의 아들이 있고 가운데 아들이 대록이었다. 그는 강건하고 통솔력이 있으며 1만여 기를 거느리고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 대록의 형이 오손의 태자였는데, 태자에게는 잠취라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으나 태자 자신은 젊어서 죽었다. 태자는 죽을 때 아버지 곤막에게 뒷일을 맡겼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잠취를 태자로 삼아 주십시오. 절대로 딴 사람을 태자로 삼지 마시옵소서."
곤막은 아들의 심정을 이해하여 잠취를 태자에 봉했다. 그러나 대록은 노했다. 그 자리는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아우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조카인 잠취와 아버지 곤막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곤막은 늙기도 했으려니와 평소부터 대록이 잠취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취에게도 1만여 기를 주어 거주지를 이동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곤막 자신도 1만여 기를 가지고 스스로 방위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국민은 세 갈래로 분열하게 되었고, 곤막은 그저 명목상으로만 통솔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곤막으로서도 이런 배경이 있었으므로 장건과의 약정을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뒤 할 수 없이 장건은 같이 온 부사를 주변의 여러 나라에 나누어 파견하고 자신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곤막은 길잡이와 통역을 딸려 장건의 귀로를 전송했다. 장건은 오손의 사자 수십 명과 답례로 받은 말 수십 두를 대동하고 돌아와서 그들에게 한나라의 국력을 과시했다. 장건은 이번의 큰 일을 완수한 공으로 9경에 끼었다. 그리고는 1년쯤 후에 장건은 죽었다. 장건을 따라 한나라에 왔던 오손의 사자는 한나라 인구의 풍부함과 왕성한 경제 활동을 상세히 관찰하고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다. 오손에선 그 말을 듣고 한나라를 중시하게 되었다. 다시 1년쯤 지나자 대하를 위시한 여러 나라에 사자로 갔던 장건의 부하들이 모두가 원지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로써 서북 여러 나라들과 한나라와의 교통이 열리게 되었다. 장건 이후의 사자들은 모두 박망후 장건의 이름을 인용하면서 상대국에 대한 성의를 증명했고, 상대국 또한 이로써 한의 사절을 신용했던 것이다.
명마를 좋아하는 황제
박망후 장건이 죽은 뒤, 오손이 한과 교통하기 시작했음을 안 흉노는 화를 내며 오손 공격을 계획했다. 때마침 오손에 파견된 한나라 사자 가운데는 남쪽으로 진출하여 대원, 대월지까지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 후부터는 이 통로를 왕래하는 자가 잇따르게 되었다. 그 때문에 흉노의 보복을 두려워한 오손은 사자를 한나라에 파견해서 말을 헌상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옹주를 부인으로 삼고 동맹국의 우의를 맺겠다고 청원했다. 무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니 신하들은 말했다.
"우선 약혼 예물을 받으신 다음에 옹주를 보내시도록 하시는 게 좋은 줄로 압니다."
그리하여 무제는 주역을 풀어 점을 치니, "신마가 서북방으로부터 찾아올 것이다."하는 괘를 얻었다. 그러는 중에 오손의 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었으므로 '천마'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나중에 피땀을 흘리는 대원의 말(한혈마)을 얻고 또 그것이 한층 더 좋은 말이었으므로 오손의 말은 '서극'이라 개명하고 대원 말을 '천마'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은 서쪽에 처음으로 성을 쌓고 또한 주천군을 새로이 설치하여 서북 제국과의 무역 근거지로 삼았다. 이로써 한나라는 안식, 엄채, 여헌, 조지, 신독국으로 빈번이 사자를 내보내게 되었다. 더구나 무제가 대원의 말을 좋아하여 사신을 자주 왕래시키는 바람에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이 좁혀져 도중에서 서로 만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외국으로 향하는 여러 가지 사자는 큰 부대는 수백 명, 작은 부대라도 백여 명이며, 휴대하는 물자는 박망후가 갈 때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 후 행사가 관례화함에 따라 인원은 줄어 갔다. 한나라가 1년간에 내보내는 사자는 대강 10여 차례, 적을 때에도 5, 6차례는 되었으며 그들은 먼 나라인 경우는 7, 8년씩 걸렸고 가까운 경우에는 수년 만에 귀국했다.
견물생심의 건달들
장건이 외국과의 통로를 개발한 공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자 그를 수행했던 관리들은 서로 다투어 외국의 진귀한 산물이나 무역 통상의 이익을 들먹이며 사자로 갈 것을 지원하고 나섰다. 무제는 이런 나라들이 보통 사람들이 가고자 원하는 곳이 아니므로 그들의 청원을 적극적으로 허락하고 이들에게 부절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관리와 민간인 가운데서 강력을 불문하고 지원자를 모집했다. 사절의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사자의 자격 기준을 넓힌 것이다. 그 결과 원래의 사명을 완수하기는커녕 도중에서 답례품을 착복하고 사라지는 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무제는 이 무리들이 외국 사정에 정통해 있다는 점을 평가해 행적을 상세히 조사하고는 중죄에 처한 후, 속죄할 기회를 준다는 이유로 다시 사자를 지원하도록 했다. 주변국과의 교통이 활발해질수록 사자가 해야 할 일은 점점 더 늘고, 한편 태연히 위법 행위를 행하는 자도 늘었다. 수행하던 하급 관리들도 타국의 산물과 풍습을 자꾸 선전했다. 이에 대해서 조정은 허풍을 떠는 자는 정사로 임명하고 소극적인 자는 부사로 발탁했으니, 허풍 떠는 자나 건달들이 모두 사자를 지원하였다. 이렇게 사자가 된 자들은 예의 없이 빈곤한 계층이었다. 그들은 정부의 물건을 횡령하고 이것을 싸게 팔아서 외국 무역의 이익을 얻는 것밖에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대국들도 한나라의 사자들이 하는 말이 각각 다른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여기까지 군대가 오지는 못하리라 판단하여, 식량의 공급을 하지 않아 사자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심지어 한나라 사신끼리 식량에 궁한 나머지 서로 공격하는 추대를 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