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7. 군인은 군인의 임무에 따른 뿐이다(위청, 곽거병)
1) 흉노 토벌의 명자(위청)
어두웠던 소년 시절
위청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기구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계라는 사람인데 한무제의 동생이던 평양공주의 집사로 지내다가 그 집의 첩인 위오와 눈이 맞아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청이었다.(그의 동복 누이는 후에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던 위자부였다) 청은 그 집에서 자랐는데,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나이가 들어서야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 양치는 소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청이 다른 사람을 따라 감천궁의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죄수 중에 한 사람이 청의 관상을 보더니, "너는 귀인의 상을 가지고 있다. 벼슬은 제후에 이르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청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종놈으로 태어나 매나 맞지 않고 욕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제후가 되다니 말도 안됩니다."
청은 장년이 되자 자기가 태어났던 평양공주의 집에 호위병으로 들어갔다. 당시 무제는 장모나 부인 등 주위에 온통 드센 여자들만 있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은 오직 누이 평양공주밖에 없었다. 평양공주는 무제를 자기 집에 불러 자주 잔치를 벌여주었는데, 어느 날 위자부로 하여금 술시중을 들게 했다. 무제는 그녀를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이를 눈치챈 평양공주는 그녀를 궁으로 보내 후궁으로 삼게 하였다. 이때부터 청도 위자부의 성을 따라 위청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그때 황후는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위자부가 무제의 사랑을 받고 그 뒤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황후가 그 사실을 알고 매우 질투하였다. 화가 몹시 난 황후는 보복하기 위해 위청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위청이 잡혀 들어가 목숨이 위태로울 때 위청의 친구인 공손오가 청년들을 이끌고 달려와 그를 구원해줬다.
대장군 위청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위청을 보호해주기 위해 그를 불러들여 벼슬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위씨의 동복 형제 모두에게 벼슬과 상금을 내렸다. 공손오도 위청을 도와준 공로로 벼슬을 얻었다. 몇 년 후 위청은 드디어 장군이 되어 흉노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위청은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장군이었다. 그 이듬해에 위청의 누이 위자부는 아들을 낳고 정식으로 황후가 되었다. 이후에도 위청은 흉노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에 황제는 위청에게 엄청난 땅을 주고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한무제 5년 봄, 무제는 다시 대규모의 흉노 토벌을 결심하고 거기장군 위청에게 기병 3만을 이끌고 출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청의 목표는 흉노의 우현황이었다. 그런데 우현왕은 한나라 군사가 어차피 여기까지는 오지 못하리라 업신여기고 본영에서 술에 만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는 전격적으로 야습하여 우현왕을 일거에 포위했다. 그러자 우현왕은 당황하여 애첩 하나와 수백의 정예만을 데리고 야음을 틈타 포위망을 돌파하여 간신히 북방으로 도주했다. 한나라 병사들은 수백 리나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한군은 우현왕의 부왕 10여 명, 흉노의 남녀 1만 5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가축 수십만 두를 포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위청이 국경의 요새까지 철거해 버리자 무제는 즉각 위청을 대장군으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하여 모든 장군의 군대는 위청의 지휘하에 들어오게 되어 그는 대장군의 격식을 갖추고 늠름하게 장안으로 개선했다. 실로 오랜만에 흉노를 대파한 것이었다. 이때 무제는 친밀하게 말을 건넸다.
"대장군 위청, 그대는 스스로 병사의 선두에 서서 크게 승리하고, 흉노의 왕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그대에게 6천 호를 더 하사함과 아울러 그대의 아들 모두에게 제후의 직위를 주겠노라."
그러나 위청은 굳이 사양했다.
"신은 황송스럽게도 장군으로 등용되어 폐하의 위광에 힘입어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오나 이는 오로지 장수들의 분전의 결과이옵니다. 지금 폐하께오서는 저에게 영지를 늘려주시온 데다가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아무런 공도 없는 변변찮은 자식놈들에게까지 황송하게도 제후로 봉하시겠다 하시었습니다. 하오나 이는 저를 장군으로 임용하시어 장병의 사기를 돋구시려는 의도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니시옵니까. 어찌 이러한 은혜를 받자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제가 대답했다.
"아니, 나도 장수들의 전공을 잊은 것은 아니오. 당장이라도 조처할 작정이오."하고는 바로 다음과 같은 조서를 어사에게 내렸다.
"호도군위 공손오는 세 차례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쳤고, 본대를 잘 원호하여 부대장과 함께 적을 생포했다. 이로써 1천 5백 호의 영지를 주고 합기후에 임명한다. 도위 한열은 대장군을 따라 흉노 우현황의 본영을 습격하여 백병전을 결행했다. 이로써 1천 3백 호위 영지를 주고, 용액후에 임명한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적의 부왕을 잡았다. 이로써 1천 3백 호의 여지를 주고 남교후에 임명한다. 경거장군 이채는 두 번 대장군을 따라 적의 부왕을 잡았다. 이로써 1천 6백 호의 영지를 주고, 낙안후에 임명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장수에게도 영지와 제후의 직위가 내려졌다.
부하를 아끼는 마음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은 또다시 흉노 토벌에 출격하여 수천 명을 목베었다. 또다시 한 달 후, 토벌에 나선 위청은 수급과 포로를 합해 1만여의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 무렵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의 군사 3천여 기가 단독으로 선우의 주력군을 만나 하루 동안의 격전 끝에 전멸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조신은 원래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 귀순해서 부장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고전의 틈바구니에서 흉노로부터 끈질긴 투항 권유를 받은 끝에 드디어 나머지 병사 8백을 데리고 선우에게 항복했다. 또한 우장군 소건은 전 병사를 잃고 제 몸 하나만 도망쳐 대장군에게 돌아왔다. 당연히 소건은 책임이 문제되었다. 위청은 부하들을 모아 놓고 그 처리에 대해 의논했다. 한 부하가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는 출진한 이래 부장을 벤 적이 없습니다. 지금 소건은 군을 버린 것입니다. 이 기회에 그를 베어서 장군의 위광을 보이셔야 합니다."그러나 다른 부하들은 반대했다.
"그것은 안됩니다. 소군이 아무리 견고해도 대군에게는 대적하지 않는다는 것이 병법의 상식입니다. 소건은 겨우 수천의 병력으로 선우의 수만 대군과 대적하여 분전하기를 하루 남짓, 병사를 모조리 잃으면서도 항복치 않고 스스로 귀대한 것입니다. 만일 이를 문제삼아 처형시킨다면 금후 이같은 경우에 돌아오지 말라는 것을 뜻합니다. 절대 베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위청이 결단을 내렸다.
"나는 폐하의 친척이기 때문에 장군직을 명령받고 있는 자이다. 내 위엄 따위를 문제삼지 말라. 위엄을 보이라는 의견은 말도 안된다. 그야 부장을 베는 것도 내 직권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폐하의 은총을 받들고 있을수록 요새 밖의 땅에서 멋대로 주벌을 행하기는 싫다. 폐하께 이러한 사정을 상세히 보고 드린 연후에 재가를 받도록 해야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하로서 권한을 조심하는 것이 될 줄 아는데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그러자 모두 찬성했다. 그리하여 소건은 목숨을 건지게 되어 황제에게 보내어졌고, 전투를 중단한 채 국경 안으로 철수했다. 서울로 송환된 우장군 소건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었다.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위청은 흉노 토벌에서 귀환하여 천금을 하사 받았다. 그리고 당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있던 평양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옛날 위청은 평양공주의 집에 노예의 신세나, 혹은 기껏 호위병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이제 주인 마님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그 무렵, 무제의 마음은 위청의 누이인 위황후를 떠나 왕부인을 총애하고 있었다. 이때 영승이라는 자가 위청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은 뛰어난 공훈도 없이 1만 호의 녹을 먹고 자제들은 셋이 모두 제후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만 한 가지, 귀공이 황후의 집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하는 지금 왕부인을 총애하시지만 왕부인의 일족은 아직 불우한 채로 있습니다. 하사금 천금으로 왕부인의 부모를 위해 장수를 축수하는 잔치를 베푸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위청은 그 말을 따라 5백 금을 들여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 소문을 들은 무제는 기뻐하면서 위청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위청은 영승의 진언을 그대로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무제는 영승을 동해군의 도위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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