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부록 管仲 略史(2/2)
중국 재상열전 중에서
현신(賢臣)이 없다고 근심하기 전에 먼저 신하를 잘 다루고 있는가 어떤가를 반성하라! 물자가 적다고 걱정하기 전에 먼저 물자가 적절히 배분되고 있나 없나를 고려하라. 시기에 적절한 대책을 세우는 일이 지도자 될 요건인 것이며 공평 무사는 위정자 된 사람의 덕인 것이다. 군주된 자는 항상 시의(時宜)에 적절한 정책을 수립하여 군신을 통솔하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위정자가 우유 부단하다면 그 정책은 항상 뒷짐을 지우고 바라보게 된다. 물욕만 왕성해 가지고는 인심을 파악할 수 없다. 무능한 도배를 믿고 있는 것으로는 마음 있는 신하로 부터 희망이 없다 하여 떨어져 나간다.
이것이 관중이 목표로 삼고, 경계할 요점을 파악한 여론 정치였다. 사마천(司馬遷)도 그 시정(施政)을 가리켜 높이 평가했다.
"원래가 제나라는 바다에 면한 약소국이었으나 관중은 경제 진흥과 부국 강병에 힘써 서민의 의향에 따른 정책을 실행했다. 정책을 논의할 경우 실행면에 주안(主眼)을 두었고 끊임없이 백성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었고 그것을 정책면에 반영했다."
제나라의 대두는 이와 같은 관중의 시정에 의한 것이다. 취하고 싶거든 먼저 주라! 이와같은 평형(平衡) 감각에 뛰어난 유연한 태도는 그의 외교 자세에도 잘 나타나 있다.
환공이 패자로서 천하에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적절한 관중의 시정(施政)을 얻어 제나라의 국력이 갑자기 증대한 결과였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러한 실력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관중은 결코 힘으로 상대국을 굴복시키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자칫하면 오만한 빛을 보이면서도 환공의 고삐를 필사적으로 죄면서 신의에 의한 외교 수완을 발휘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일이 있었다. 환공 5년의 일이다. 국력이 충실해진 제나라는 이 해에, 숙적 노나라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길 수 없다고 본 노나라의 장공(莊公)은 수읍(遂邑)의 할양(割讓)을 자청하며 화의를 구했다. 환공은 이것을 받아들여 노나라 가(柯)의 땅에서 회맹(會盟)하기로 했다. 회맹이란 곧 강화(講和) 회의인 것이다. 그런데 그 석상에서 노나라 장공이 바로 서약하려고 할 때 노나라의 장군 조말(曺沫)이 단상에 달려올라가 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협박하는 사건이 야기됐다.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시오. 그렇지 못하면 저와 함께 목숨을 바치셔야겠습니다."
"오냐 알았다. 돌려주마."
그 말을 듣자 조말은 비수를 던지고 입술에 피를 바른 후 서약했다. 환공은 협박으로 일단은 승낙을 한 일이지만 뒤에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분했다. 그래서 조말을 없애 버리고 그 약속은 없었던 것으로 해보려고 꾀했다. 그것을 알고 관중이 간했다.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약속, 그것을 무시하여 상대를 죽이는 것은 신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결국은 일시의 화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결과는 제후(諸侯)의 신뢰를 실추시켜 천하에서 버림받게 됩니다. 백해(百害)만 있고, 전혀 득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환공은 조말과의 약속을 지키고 이 때까지 빼앗은 땅을 그대로 노나라에 반환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천하에 알려져 제후들 사이에서는 굉장한 평판이 되었다. '환공은 신의가 두터운 인물이다. 제나라와 손을 잡으면 손해는 없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 년 후, 제후들은 환공을 맹주로 추대해 마침내 춘추 시대 처음으로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조말의 일건으로 훌륭하게 신의를 지켰다는 것이 크게 영향되었던 것이다. 관중의 깊은 통찰력이 환공을 지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패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역시 힘이 아닌 신의에 의하여 제후를 심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환공 23년의 일이었다. 북방의 만족(彎族) 산융(山戎)이 연나라에 쳐들어가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해 왔다. 중원의 평화 유지는 패자(覇者)된 자의 책임인 것이다. 그래서 환공은 재빨리 연나라에 출병하여 산융을 북쪽 멀리까지 격퇴했다. 그런데 구원을 완수한 환공이 귀국했을 때의 일인데, 연나라 장공이 전송을 나왔다. 전송하다 보니 어느덧 제나라 내에 들어와 있었다. 당시의 관례로서는 제후끼리의 전송은 국경을 넘지 않는 것이 예(禮)가 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환공이 말했다.
"천자도 아닌데 국경을 넘어서 전송케 한 것은 예에 벗어난다."
그리고는 장공이 전송해 왔던 지점까지의 제나라 영토를 연나라에 내줬다. 이 일과 함께 장공에 대하여 주왕실에의 공물(貢物)을 끊지 않도록 간곡하게 타일렀다. 이 일로써 제후간에 환공의 명성을 한층 더 높였던 것이다. 이것 역시 재상 관중의 조언이 있었을 것임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 일을 가리켜 공자는 관중을 이렇게 평했다.
환공, 제후를 규합함에 병거(兵車)로써 하지 않음은 관중의 힘이다. 그 인(仁)은 이와 같았다."
환공은 범용한 군주였다. 거기 관해서는 예를 들면 이러한 얘기가 있다.
어느 날의 일이었는데 환공은 부인인 채희(蔡姬)를 데리고 뱃놀이를 했다. 남쪽 채나라 출신이므로 물에 익숙한 채희 장난으로 배를 뒤흔들었던 바 환공은 매우 무서워했다. 진정으로 그만두라고 하는데도 채희는 좀처럼 그만두려고 하지 않았다. 환공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배에서 내림과 동시에 채희를 친정인 채(蔡)로 돌려보냈다. 환공으로서는 인연을 끊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나, 채 쪽에서는 불쾌한 감정을 누를 길이 없어 채희를 초나라로 시집보내고 말았다. 이 얘기는 「사기」에 환공 29년의 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지만, 자기의 개인적 감정에 사로잡혀 부인을 내쫓고 나중에는 군대를 움직였다는 것 등은 패자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관중은 그 뒤처리에 부심했다. 다른 일은 차치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일만 보아도 환공이 어느 정도의 인물이었던가는 명백해진다. 이러한 범용의 군주를 섬기므로, 그를 받듦에는 이만저만이 아닌 고심을 쏟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환공은 처음에는 제나라 군위에 오른 것으로 만족했고 패자가 된다는 것 등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환공에 대하여 관중은 먼저 큰 목표를 제시했다. 관중이 포숙아의 추천에 의해 처음으로 환공을 뵈었을 때의 일이다.
"나라를 안태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함이 좋은가."
"주공께서 천하의 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 외에 국가 안태의 길은 없습니다."
"천하의 패자라고! 그런 엄청난 일은 바라지도 않네. 제나라 일국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그것을 듣고 싶을 뿐이다."
관중은 얘기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리를 일어섰다. 그렇지만 이런 얘기는 환공으로서도 흥미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패자라는 것이 되어 보고 싶었다. 아차하는 순간 마음을 달리 먹은 환공은 당황하면서 관중을 붙잡아 앉혔다.
"알았네. 달리 국가 안태의 길이 없는 것이라면 패자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네."
이리하여 관중은 재상에 임명되어 국정 재건의 진두 지휘를 맡아 보게 되었다. 관중은 환공과 콤비가 되는 데에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환공의 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패자라는 웅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제시하여 환공 스스로 언동에 조심하도록 해두었다. 다음에 관중이 행한 것은 환공과의 사이에 신뢰 관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관중은 재상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이전의 적대 진영에서 등용된 타향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환공으로서도 관중의 정치 수완을 인정한 다음에 재상으로 등용하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아직껏 전폭적인 신뢰를 두고 있지 않았다. 경대부(卿大夫) 등의 중신들도 관중의 기용을 기분좋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회만 있으면 실각(失脚)을 꾀하려고 관중의 태도를 엿보고 있었다. 관중으로서는 국정 개혁을 무리하지 않게 진행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환공의 신뢰를 일신에 갖추어 그것을 내외에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관중이 재상에 임명되고 얼마 후의 일이다. 환공이 물었다.
"국정을 맡아 보니 어떠한가?" 관중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에게는 천한 신분이 따르고 있으니, 고귀한 분들에게는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환공은 즉석에서 경(卿)이라는 최고의 신분을 내렸다. 그런데 얼마 후, 국정은 여전히 혼미 상태가 계속되었다. 환공은 관중을 불러들였다.
"그대의 청대로 승격을 시켜 주었는데 국정은 좀체 호전되고 있는 것 같지 않소.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관중이 대답했다.
"가난한 저로서는 돈 많은 기득권층을 맘대로 부릴 수가 없습니다."
환공은 국세 일 년분을 관중에게 내렸다. 이리하여 또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국정 개혁의 실적은 오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환공은 또다시 관중을 불러들였다.
"두 가지나 청을 들어 주었는데도 국정 쪽은 구태 의연하지 않은가. 이유를 알려 주게." 관중이 대답했다.
"저는 아직 충분히 임금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측근에 대한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환공은 관중에 대한 신뢰의 두터움을 나타내기 위해 중부(仲父)라는 칭호를 주었다. 임금이 중부로 부르겠다니 대단한 신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리하여 신분, 재산, 칭호의 세 가지를 얻은 관중은 근심없이 만전의 태세로 국정에 임할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대개가 나중에 관중을 크게 보이기 위해 꾸민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관중의 시정은 적절함을 얻어 부국 강병의 실은 오르고 제나라의 국력은 갑자기 증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환공의 웅비심은 쉴새 없이 꿈틀거려 실지로 그 군사력을 행사해 보고 싶어했다. 이번에는 관중이 필사적으로 환공의 고삐를 잡아당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환공은 관중에게 말을 꺼냈다.
"이제 우리 나라 백성도 훌륭하게 전쟁을 치를 만큼 되었다. 바야흐로 극악 무도한 대국을 치고 싶은데 어떤가."
"아닙니다. 아직 안 됩니다. 무기가 부족합니다. 죄인들의 형벌을 늦추어 주어 전력 증강에 한 역할을 맡도록 함이 좋을 것입니다."
환공은 관중의 의견을 채택하여 죄인의 처형을 중지시키고 속죄로서 무기를 공출시키기로 했다. 사죄(死罪)를 범한 자에게는 소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창(戟) 한 자루씩을, 그 밖의 중죄를 범한 자에게는 가슴에 대는 갑옷과 창 한 자루씩을 공출시켰다. 과실에 의해 죄를 범한 자에게는 황금 한 돈 중, 이유없이 소송을 제기한 자에게는 화살 오십 대를 공출 시 켰다.
"이것이면 되겠지. 무기도 갖추어졌으니......."
그런데도 관중은 수긍하지 않았다.
"아직은 안 됩니다. 나라 밖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첫째 국내의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국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왕실의 울타리인 경대부의 생활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횡포스러운 대군(大軍)을 치기 위해서는, 우선 소국에 땅을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법을 어지럽히는 불량 분자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자를 발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의 명군(名軍)들도 해를 입힐 자를 제거시키고자 할 때에는 우선 내실(內實)을 굳건히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식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간하는 것이었지만 분기(奮起)하는 환공을 제지한다는 것은 관중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먼저 소개한 채희의 사건처럼 사사롭게 행동하는 환공을 위하여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어 주는 일을 생각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관중의 일이었다.
되풀이되지만 환공은 범용한 군주인 것이다. 고삐를 늦추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관중은 기회 있을 때마다 환공에게 간했다. 그리고 같은 간언을 하더라도 정면에서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풍간(諷諫)이라고 해서 넌지시 우회하여 간하는 일도 있 었다. 어느 날 환공이 관중에게 물었다.
"국정을 다스리는데 가장 근심됨은 무엇이오?"
"사서(社鼠)이옵니다."
사서란 사람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사직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사는 쥐를 말한 것으로, 임금 옆에서 알랑거리는 간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환공은 사서라 해도 머리에 명확히 들어오지 않았다.
"모르겠는데, 뜻을 말해 보오."
"사(社)는 목재를 맞추고 여기에다 벽을 바른 것이므로 쥐에게는 안성맞춤의 서식처입니다. 이 쥐를 퇴치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요. 연기를 뿜어 없애려 하다 자칫 소중한 사를 태워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물을 끼얹으면 사의 벽을 침수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사(社)에 집을 짓고 사는 쥐를 퇴치 못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런데 나라에도 또 사서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닙니다. 군주의 측근이 그것입니다. 이 작자들은 군주에 대해서는 선악의 구분을 잊어버리게 하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총애를 믿고 뻐기며 건방지게 굽니다. 참으로 맹랑한 존재입니다. 또 사서와 비견할 존재로는 맹견(猛犬) 또한 걱정의 씨앗입니다. 이러한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술집이 있었습니다. 깨끗한 술부대에 술을 담아 밖에 늘어놓았지만 좀처럼 팔리지 않았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술집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댁에서 기르고 있는 저 맹견 때문이요. 아무튼 우리들이 그릇을 들고 술을 사러 가면 저 개가 곧장 이를 드러내며 물려고 하므로 술이 안 팔리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어요?' 하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나라에도 이러한 맹견이 있습니다.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그것입니다. 유능한 인재가 군주를 보좌하겠다고 원해도 그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묵살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군주의 측근이 사서가 되고 실권자가 맹견이 된다면 유능한 인재라 할지라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국정을 다스리는데 가장 근심할 점입니다."
여기에 관중은 구체적으로 누가 사서이며 누가 맹견이라고는 지적하지 않았다. <사서(史書)>에서도 또 그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다. 일반론의 형식으로 넌지시 환공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해설해야만 할 것이다. 신하에게 있어서 군주란 생살 여탈권을 쥐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에 가깝다. 자칫 잘못하여 심기만 불편하게 해도 주살(誅殺)의 쓰라림에 봉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환공은 범군(凡君), 관중은 현상(賢相)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군주께 진언할 때는 불편한 심기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렇게 말한 사람은 후일의 한비(韓非)인데 관중도 그 방면의 기미를 잘 납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환공에 대해서 언제나 간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리에 닿지 않는다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상대의 주장에 삼할의 이(理)를 인정하며 애써 상대방의 얼굴을 세워 그 의향에 따르는 일도 있었다.
어느 해의 일이다. 관중이 국비에 대한 회계 감사를 해보았더니, 전지출의 삼분의 이가 빈객의 접대비였고 경상 지출은 나머지 삼분의 일로 조달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관중은 아무래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환공에게 시정을 구했다. 그러자 환공은 화를 내며 반론했다.
"그대까지 그런 말을 하오? 생각 좀 해보오. 접대에 힘을 쓰면 빈객들은 기분이 좋아서 자기 나라에 돌아간 뒤에도 우리 나라의 일을 칭찬할 것임에 틀림이 없소. 그러면 우리 나라의 명성이 천하에 떨칠 것이다. 이런 말이오. 접대를 소홀히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소. 빈객들은 기분이 상해 귀국하자 욕을 퍼뜨릴 것임에 틀림없소.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는 천하 오명을 드러내고 말 것이오. 땅만 있으면 곡식은 열리고, 재목만 있으면 물건은 만들 수 있소. 그러니 곡물은 다 먹어치우더라도 또 수확할 수 있으며, 물건은 낡더라도 또 손에 넣을 수가 있소. 하등 물건을 아낄 것은 없소. 군주된 자가 무엇보다도 중시할 일은 천하의 명성인 것이오."
"지당한 말씀입니다."
관중은 쉽게 물러났다. 만일 강직한 신하였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읍소했거나 혹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간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관점을 바꾸어 보면 군주의 거친 심기를 교묘하게 피한, 어디까지나 현실 정치가다운 노련미가 엿보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중은 환공 41년,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재상위에 있은지 실로 사십 년의 긴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런데 관중의 재기 불능이 전해졌을 때의 일이다. 환공은 일부러 문병을 간 김에 금후의 국정 문제에 관해 관중의 의중을 물었다.
"그런데 중부(仲夫)는 병으로 누워 계시니 한 말씀 묻겠소. 중부께서 만약 불행히 다시 일어서지 못할 때에는 나라의 정사를 대체 누구에게 부탁함이 좋겠소?"
"신은 늙어서 이미 쓸모가 없으므로 신에게 하문하셔도 별 것이 아니옵니다만, 그러나 신이 들은 바를 말씀드린다면 신하를 아는 것은 군주를 앞설 수 없고 자식을 아는 것은 아비를 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군주께서 몸소 그 결정을 시도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신의 소견을 말씀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포숙아는 어떠하겠소?"
"안 됩니다. 포숙아는 위인이 강직하고 선악이 분명하여 남과 다투는 성질이 있습니다. 대개는 강(剛)하면 백성을 다스림에 지나치게 따져 민심을 얻을 수가 없으며, 오만하게 버티면 아랫사람은 그 사람에게 쓰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저히 패자를 보좌할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관중과 포숙아는 둘도 없는 친구다. 또 포숙아는 관중의 목숨을 살린 은인이요, 게다가 환공에게 천거하여 사십 년 재상의 길을 열어 준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관중은 포숙아를 자기 후임으로 천거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관중이 얼마나 공사 구별이 엄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수작은 어떠하겠소?"
"안 되옵니다. 대체로 사람의 정이란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주군(主君)께서 질투가 심하시고 게다가 여색을 좋아하시므로 수작은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여자와는 관계치 않는다는 것을 밝힌 연후에 내정(內定)에 들어왔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몸조차 아낄 수 없는 자가 어떻게 능히 군주를 사랑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위(衛)나라 공자(公子)인 개방(開方)은 어떻겠소?"
"불가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 사이는 십 일의 왕래에 지나지 않는데도 개방은 우리 군주를 섬기기 위해 그것도 군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15년 간이나 그 부모를 만나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정에 어긋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부모조차 섬기지 못한 자가 어찌 군주를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역아(易牙)는 어떠하겠소?"
"안 되옵니다. 역아는 군주를 위한 요리사의 우두머리로서 군주를 위한 요리를 주관해 왔습니다. 군주가 이제껏 먹지 못한 것은 단지 인육(人肉)뿐이라는 데서 역아가 그 장자를 삶아 바친 일은 군주께서 잘 아시는 바입니다. 사람된 정으로써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자식을 삶아서까지 군주의 진지상에 올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 자식도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어찌 능히 군주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적당하겠소?"
"습붕(濕朋)이 가합니다. 그의 사람됨은 심중이 견고하고 밖으로도 또한 청렴결백합니다. 욕심이 적고 신의가 있으며 마음이 곧아서 세상의 사표가 될 자격이 있으며, 외모가 방정하므로 대사를 맡기는데 족하고, 욕심이 적으니 능히 대중을 상대로 이것을 다스리며, 신의가 깊으므로 능히 이웃나라와 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패자된 분의 보좌로 가장 적당한 인물입니다. 주공께서는 습붕을 쓰도록 하십시오."
"좋소. 그렇게 하리다."
군신간에 이런 문답이 있은 얼마 후에 관중은 죽었다. 환공이 관중의 장사를 성대히 지내 준 것은 말할 것이 없다. 그것보다도 그런 다음의 환공 처사가 더욱 중요한 일이었음은 말할 것이 없다. 환공은 관중의 뜻을 십분 반영하여 습붕을 기용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죽었다. 그래서 후임으로 포숙아를 정승으로 삼고 수작, 개방, 역아를 국외로 추방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그들을 불러들였다. 역아가 없어지자 그 때부터 궁중 요리가 마음에 들지 않게 된 것이다. 역아는 다른 것은 몰라도 요리 솜씨에 있어서는 고금을 통하여 뛰어난 요리사였던 모양이다. 또 수작을 쫓아낸 뒤에는 후궁의 풍기가 어지러웠고, 개방을 추방하고서부터는 조정의 정무가 침체해졌던 것이다. 환공은 세 사람을 다시 불러 측근에 등용했다. 그 결과 이 세 사람은 자기들 뜻대로 권력을 조종하게 되어, 때문에 제나라의 정치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환공은 대단한 호색가로 3명의 정부인(正夫人) 외에 6명의 애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3명의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6명의 애첩은 모두가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환공은 일찍이 관중과 상의한 끝에 애첩의 한 사람인 정희(鄭姬) 가 낳은 소(昭)를 세자로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관중이 세상을 떠나자 다른 애첩이 낳은 공자들이 저마다 세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 허점을 이용한 것이 수작, 역아였다. 그들은 환공을 움직여, 애첩의 한 사람인 장위희(長衛姬)가 낳은 무휴를 세자로 세우려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환공은 비명(非命)으로 죽었다. 수작 등이 정치를 시작한지 3년이 지났을 때 환공은 남쪽인 제나라, 노나라와의 경계인 당부(堂阜)라는 곳에서 놀았다. 그 틈을 탄 수작은 역아와 개방과 대신들을 이끌고 난을 일으켰다. 환공은 갇혀 목이 탔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배가 고팠으나 먹을 것을 주지 않아 남문(南門)의 문지기 숙직실에 갇혀 굶어 죽었다. 반란군이 지키고 있었기에 유해조차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송장에서는 구더기가 문밖에까지 기어나왔다는 것이다.
환공이 죽자 제나라의 궁중은 삽시간에 무력 투쟁의 소용돌이로 화하여 수습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수작과 역아 는 공자인 무휴를 군위에 모시고자 했다. 세자인 소(昭)는 송나라로 달아났다. 무휴가 즉위하자 겨우 환공의 썩은 시체는 납관을 마쳤다. 실로 사후 67일 만의 일이었다. 전일의 환공의 군사는 천하를 종횡으로 치닫던 형세였고 그 몸은 5패의 제1인자에까지 올랐지만 끝내는 그 신하의 손에 시역되어 그 서글픈 최후는 패자의 명성을 깎아 버렸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관중의 헌책을 끝까지 듣지 않은 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곧 관중 있고서의 환공이었으며, 관중 있고서의 제나라였음을 실증한 외의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은 이른다.
"실수로 충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으로 그 의지를 세움은 곧 그 고명(高名)을 없애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는 시작이다.''
이렇게 그 일을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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