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종장 : 한 시대의 별은 떨어지고
1. 권력 무상
정나라 편작 선생
이 때 정나라에 유명한 의원 한사람이 있었다. 그의 성은 진이요, 이름은 완, 자(字)는 월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정나라를 떠나 제나라 노촌이란 곳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노의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장상군이란 의인이 그 곳을 지나다가 우연히 노의의 집에 들르게 되었다. 진완은 첫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이란 걸 알고 정성껏 대접했다. 몹시 괴팍하게 생긴 장상군도 진완의 극진한 정성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장상군이 신약 한 봉지를 내주며 진완에게 말했다.
"이 약을 못물에 타서 먹으라. 그러면 자연 징험하는 바가 있으리라."
진완은 시키는 대로 못물을 떠와 그 약을 타서 먹었다. 그런 뒤로 진완의 눈은 거울처럼 밝아졌다. 어둠 속에서도 능히 귀신을 볼 수 있었다 담장 밖에 서서도 능히 남의 집 장농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알아맞힐 수 있었다. 환자를 대할 때는 그 환자의 오장 육부를 샅샅이 볼 수 있었으므로 그는 특히 진맥을 잘하기로 유명해졌다. 고대에 편작(扁鵲)이란 명의가 있었다. 그는 황제 원헌씨와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편작은 의약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역사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진완의 높은 의술을 드디어 고대의 명의 편작과 비교해서 말하곤 했다. 마침내 사람들은 진완을 별명으로 편작 선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완, 즉 편작 선생은 지난날에 괵나라에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괵나라 태자가 급살병으로 죽었다. 편작 선생은 궁으로 가서 자기가 의술에 능하다는 걸 말했다. 내시가 대답했다.
"세자는 이미 죽었소. 선생의 의술이 아무리 고명하기로서니 죽은 사람을 어떻게 다시 살릴 수 있습니까?"
"바라노니 시체나 한 번 봅시다."
편작 선생은 거듭 청했다. 내시는 궁 안으로 들어가서 괵공에게 편작 선생의 말을 전했다. 괵공은 눈물을 흘리며 편작 선생을 영접했다. 편작 선생은 데리고 다니는 제자 양부를 시켜 시체 몇몇 곳에다 침을 놓게 했다. 한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죽은 세자가 돌아누우면서 가늘게 신음했다. 편작 선생은 세자의 입을 벌리고 약을 숟갈로 떠 넣었다. 20여 일이 지나자 세자는 완전히 회생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편작 선생이 회생 기사하는 술법을 아는 분이라고 했다. 편작 선생은 두루 천하를 유람하며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줬다. 어느 날 편작 선생은 제나라 도읍 임치에 가서 제환공을 뵈었다. 편작 선생이 제환공에게 아뢰었다.
"상감의 병이 살 속에 있습니다. 속히 치료하지 않으시면 악화되겠습니다."
제환공이 미소하며 대답했다.
"과인은 아직 아무 병도 없소."
편작 선생은 더 말하지 않고 물러갔다. 닷새가 지난 뒤 편작 선생은 다시 궁으로 들어가서 제환공을 뵈었다.
"상감의 병이 혈맥에 있습니다. 이젠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환공은 역시 웃으며 듣질 않았다. 또 닷새가 지났을 때 편작 선생은 다시 가서 제환공을 뵈었다.
"상감의 병이 이미 창자와 위에 있습니다. 속히 치료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제환공은 역시 듣질 않았다. 편작 선생이 물러간 뒤 제환공이 푸념했다.
"의원이란 우스운 것들이어서 자기만이 잘 아는 듯, 자기가 제일인 것처럼 뽐내지. 그래서 멀쩡한 사람을 보아도 병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닷새가 지났다. 편작 선생은 다시 궁에 가서 제환공을 뵙겠다고 청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편작 선생이 제환공을 보고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편작 선생은 종종걸음으로 달아나듯 궁문을 나와 돌아가 버렸다. 제환공은 편작 선생이 보통 때와 달리 아무 말없이 가버리는 것이 더욱 이상했다. 제환공이 분부했다.
"편작 선생을 뒤쫓아가서 왜 아무 말없이 그냥 가느냐고 그 까닭을 물어보아라."
밑에 사람이 뒤쫓아가서 시정 앞을 지나가는 편작 선생을 붙들고 그 까닭을 물었다. 편작 선생이 대답했다.
"귀후의 병이 피부에 있었을 땐 탕약으로 고칠 수 있었고, 혈맥에 있었을 땐 침으로 고칠 수 있었고, 창자와 위에 있었을 땐 약술로 고칠 수 있었으나, 이젠 병이 골수에 박혔으니 내 의술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소. 그러니 어찌하리오. 그래서 아무 말 않고 물러나왔소."
다시 닷새가 지났다. 제환공은 마침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궁성에서 사람이 편작 선생을 부르러 갔다. 역관 주인이 나라에서 나온 사람에게 말했다.
"편작 선생은 닷새 전에 떠나셨습니다."
제환공의 부인들
제환공은 편작 선생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이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환공에겐 전에 정실 부인만 세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왕희(王姬)며, 둘째는 서희 (西姬)며, 셋째는 채희 (蔡姬)인데, 다 자식이 없었다. 왕희, 서희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채희는 친정인 채나라로 쫓겨가고 없었다. 제환공은 그들 세 부인 아래로 또 여섯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 여섯 부인은 다 제환공의 총애를 받고 각기 아들 하나씩을 낳았다. 첫째 장위희는 공자 무휴를 낳았고, 둘째 소위희는 공자 원을 낳았고, 셋째 정희는 공자 소를 낳았고, 넷째 갈영은 공자 반을 낳았고, 다섯째 밀희는 공자 상인을 낳았고, 여섯째 송화자는 공자 옹을 낳았다. 여섯 부인 이외에도 제환공의 잉첩으로서 아들을 둔 여자가 많았다. 그들 여섯 부인 중에서 제환공을 가장 오래 모시기는 장위희였고, 여섯 공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공자는 장위희의 소생 무휴였다. 소인 역아와 수작은 장위희의 심복이었다. 그래서 역아, 수작이 제환공에게 간청해서 한때는 공자 무휴를 세자처럼 대우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제환공은 공자 소의 어진 심덕을 사랑하게 되어 지난 날 관중과 상의하고 규구 땅에서 모든 나라 제후와 대회가 열렸을 때, 송양공에게 공자 소를 세자로 삼을 생각이니 그의 앞날을 잘 봐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나라 공자로 제나라에 와서 사는 공자 개방은 공자 반과 친했기 때문에 반을 세자로 세우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공자 상인은 천성이 남에게 희사하는 걸 좋아해서 자못 민심을 얻었고, 또 그의 친어머니 밀희가 제환공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 역시 다음 군후를 생각하면서 은근히 세자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다만 공자 옹만은 워낙 미천한 몸에서 낳았으므로 그저 자기 분수나 지킬 생각이어서 딴 뜻이 없었다. 이리하여 옹을 제외한 다섯 공자들은 각기 당을 세우고 서로 시기하고 미워했다. 이는 마치 다섯 마리의 큰 벌레처럼 각기 어금니와 손톱에 독을 감추고 때만 오면 서로 물고 뜯을 태세였다. 제환공은 본래 영특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칼도 오래되면 날이 무디고 사람도 늙으면 기력이 줄어드는 법이다. 더구나 그는 평생 소원이던 패업을 성취하고 천하 모든 나라 제후의 장이 되었으므로, 항상 만족이 있을 뿐 불만이라고는 아예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다가 그는 몹시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맑게 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늙을수록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더구나 역아, 수작, 개방 등 소인들을 등용하고 그들 말만 들었기 때문에, 언제나 흥겹고 즐거운 것만 알았지 걱정이나 근심을 몰랐다. 제환공은 충간(忠諫)하는 말을 듣지 못한 지도 오래됐다. 다만 아첨하는 소인들의 말만 들어왔다. 다섯 공자는 각기 자기 어머니를 졸라 세자 자리를 얻으려고 벌써부터 야단이었다. 그래서 다섯 부인이 저마다 제환공에게 자기 아들을 세자로 세워달라고 청을 했다. 제환공은 그저 미소하고 머리만 끄덕거릴 뿐, 도무지 무엇이든 뚜렷한 처분을 내리지 못했다. 사람은 앞날을 근심하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는 법이다. 제환공은 바로 그 말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이제 제환공은 확실한 정리를 해두지 못하고 갑자기 병이 나서 침실에 눕고 만 것이다. 역아는 편작이 제환공을 보고서 그냥 가 버린 걸 보고 제환공의 앞날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역아는 수작과 함께 밀실(密室)에서 하룻밤 동안 상의하고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이튿날 역아는 패(牌)를 써서 궁문에 내다 걸었다. 그 패엔 다음과 같은 제환공의 전지가 적혀 있었다.
- 과인이 이제 심한 병으로 자리에 누웠으니 일체 모든 일을 듣고자 하지 않노라. 모든 신하는 백성이나 간에 아무도 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하노라. 수작은 굳게 공문을 지켜 모든 출입을 금하고, 역아는 궁중 병사들을 거느리고 위반하는 자가 없도록 순시하여라. 일체 나라 정사에 관한 것은 과인의 병이 완쾌될 때를 기다려서 그 때 아뢰어라.
그 패의 글은 물론 역아와 수작이 조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공자 무휴만을 장위희의 내궁에 머물게 하고, 다른 공자들은 일체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사흘이 지났다. 제환공은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뿐 죽질 않았다. 역아와 수작은 제환공의 좌우에서 시중들고 보좌하는 사람들까지 남녀 할 것 없이 다 궁문 밖으로 내쫓았다. 궁문은 철통처럼 막히고 인적이 끊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제환공의 침실 주위에다 높이 3장(丈)이나 되는 담을 둘러 쌌다. 그러니, 바람도 통하지 못할 만큼 담 안과 담 밖은 완전히 딴 세상이 됐다. 다만 담 밑에 개구멍 같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어린 내시가 그 구멍으로 들어가서 제환공이 죽었는지 아직 살았는지를 보고 나왔다. 역아와 수작은 궁중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다른 공자들이 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삼엄한 경계를 폈다. 침상에 누워 있는 제환공은 어떻게 하든 일어나려 해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좌우 시위들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제환공의 눈은 얼빠진 사람처럼 빛이 없었다. 바깥에서 털썩 하고 무슨 소리가 났다. 무엇이 높은 데서 떨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창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제환공은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쳐다봤다. 앞에 서 있는 것은 그의 첩 안아아였다. 제환공이 입을 다시며 말했다.
"몹시 시장하다. 죽이 먹고 싶구나. 좀 갖다 다오." 안아아가 대답했다.
"어디 가서 죽을 가져오란 말씀입니까. 죽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더운 물 한 모금만 다오. 목이 탄다."
"더운 물도 구할 수 없습니다."
"왜 없다고만 하느냐?"
"역아와 수작이 변란을 일으켜 누구에게나 일체 궁문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 침실 주변엔 높이 3장이나 되는 담이 둘러 있습니다. 이 곳과 바깥은 아무도 드나들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음식을 가져오겠습니까?"
"그럼, 너는 어떻게 이 곳에 들어왔느냐?"
"첩은 지난날 주공께서 한번 사랑해 주신 은혜를 입었으므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담을 넘어왔습니다. 주공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거나 뵙고자 왔습니다."
"세자 소는 어디 있느냐?"
"소인놈들이 막고 있어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환공이 흐느껴 울면서 소리쳤다.
"중부는 진정 성인이었구나! 성인이 본 바가 어찌 한 치인들 틀리리오. 과인이 총명치 못했음이라. 이 꼴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지, 마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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