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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1/2)
다섯 마리 양과 바꿔온 오고대부 백리해
기원전 654년 진나라 헌공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의 대부인 백리해를 사로잡았다. 진나라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어리석게도 진나라 군대가 자기 나라 땅을 통과하도록 해준 결과 그만 나라를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또다른 진나라의 왕 목공에게 시집 보낸 공주의 하인으로 삼아 진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백리해는 도중에서 도망하여 초나라의 완이라는 마을에 은신했으나 그곳에서 그만 억류당하고 말았다. 한편 진의 군주인 목공은 공주의 일행 중에 오기로 한 백리해가 빠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전부터 백리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인물을 되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돈을 써서라도 찾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완 지방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의 하인 백리해가 당신들 땅에 억류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섯 마리의 검은 양가죽과 그를 바꿔, 돌려보내 줄 것을 바라는 바이오."
그러자 완 지방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백리해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때부터 검은 양 다섯 마리와 교환해서 그를 차지했기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오고대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리해가 오자 목공은 그를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킨 다음. 국사를 논의하는 데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백리해는 거듭 사양했다.
"저는 망국의 신하로서, 결코 그러한 막중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목공은,
"우나라가 망한 것은 군주가 그대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대의 책임은 아니오."
하고 끝내 마다하는 그를 끈덕지게 설득하며 서로 이야기 나누기를 사흘이나 했다. 그러자 점점 더 그의 사람됨과 능력에 완전히 빠져서 어떻게 하든지 국정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백리해는 그래도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정 그러하시다면 저의 친구 중에 건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감히 따르지도 못할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마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저는 매우 궁핍하여 걸식하는 몸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제나라 군주를 받들려고 했더니 그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덕분에 저는 제나라의 내란에 휘말려 들지 않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주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공자인 퇴가 소를 좋아했으므로 소 치는 품을 팔며 그에게 봉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가 저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때 건숙이 또다시 반대했습니다. 그 때도 그 덕분에 저는 주나라를 떠나 퇴의 죄에 휘말려 죽는 것을 면했습니다. 우나라 군주를 받들 때에도 그는 말렸습니다. 하지만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저는 벼슬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까지는 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화를 면했습니다만, 마지막에 가서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탓으로 지금 이렇듯 말려들어 수모를 겪고 만 것이옵니다. 이상 말씀 올린 것으로도 그의 사람됨이 어떤지 잘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
이에 목공은 당장 사자를 보내, 후한 선물을 주고 건숙을 불러들여 상대부에 임명했다. 며칠 후 목공이 백리해에게 물었다.
"공의 나이가 몇이신지요?"
"벌써 일흔이 되었습니다."
이에 목공은 탄식했다.
"내가 진작에 공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자 백리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분명히 너무 늙었지요. 더구나 새를 잡거나 맹수와 싸운다면 쓸모가 없을 정도로 늙었지요. 하지만 지혜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이라면 아직 젊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그 해 가을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침공하였다. 그 즈음 이웃 진나라는 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음모에 의해서 목공의 처남이 되는 태자 신생이 자살했고,(앞에서 보듯이 헌공의 딸이 목공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 또한 공자 중이와 이오 두 사람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그 후 먼저 탈출해 있던 공자 이오의 사자가 진나라로 목공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이오가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목공은 그 청을 받아들여 백리해에게 군사를 주어 이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오는 감사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성공하는 날에는, 하서의 여덟 성을 바치겠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이오는 성공하였고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영지를 떼어 주겠다던 약속은 완전히 무시했고, 국내에서는 오히려 여희 일파를 쓰러뜨린 공로자인 이극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한편 이극을 죽였다고 하는 소식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아직 진나라에 머물던 사자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에 내일이면 나도 어찌될지 모른다고 겁을 먹은 사자는 목공에게 다음과 같은 방책을 올렸다.
"이오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쁩니다. 인망이 있는 것은 오히려 중이 공자쪽입니다. 군주께 약속을 어긴 것도, 이극을 살해한 것도 두 이오의 심복인 여생과 극예가 획책한 짓입니다. 청컨대 감언이설로써 두 사람을 곧 불러다가 여기에 붙잡아 두고 그 동안에 중이 공자를 군주로 세운다면 만사는 잘 될 것입니다."
목공은 끄덕이면서 귀국하는 사자에게 사람을 딸려 보내 여생과 극예 두 사람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조심성이 대단했다. 무엇인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자 왕 이오에게 귀엣말을 하고는 오히려 그 사자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사자의 아들인 비표가 진나라로 피신하여 목공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오는 무법자이며 백성들에게 인망이 없습니다. 무찌르셔야 합니다."
그러자 목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군주라면 어떻게 충신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인심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목공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앞날에 대비해서 비표룰 신하로 등용하였다. 목공 12년, 진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서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고 진나라에 양식을 도와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자 비표가 목공에게 말했다.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서 쳐부숴야 할 때라고 봅니다. "
이에 목공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기근과 풍작이란 번갈아 돌아오는 일이니 지금 여유가 있는 우리가 곡식을 보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백리해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이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고약한 놈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결국 목공은 백리해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좇아 식량을 주기로 했다. 그 날부터 진나라 도읍인 옹으로부터 진나라 도읍 강에 이르기까지 곡식을 운반하느라고 강에는 배들이, 그리고 육지에는 수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목공 14년에 이르자 이번에는 거꾸로 진나라에 기근이 심해서 이오에게 식량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오가 신하들과 논의하고 있었는데 어떤 신하가 이렇게 말하고 나섰다.
"지금이야말로 목공을 쳐부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승리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이오는 이 의견을 따라 이듬해인 목공 15년에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 갔다. 목공은 이에 맞서 비표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목공 자신도 출전했다.
명마를 잡아 먹은 용사들
9월 임술날에, 한원 땅에서 목공은 이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오 또한 단숨에 승부를 가리겠노라 마음먹고 몸소 나섰다. 그러나 싸움터를 달리며 순찰하고 있던 중 그만 진흙땅에 말의 발이 빠져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목공은 부하들을 이끌고 육박해 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오를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오의 군대에 포위당함으로써 목공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때 목공을 구원하기 위해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든 용사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목공은 위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여 이오를 생포했다. 그 전투가 있기 수년 전에 목공의 명마가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산 기슭에 살던 건달 패거리 3백여 명이 그 말을 잡아 먹고 있었다. 명마를 수색하고 있던 관리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공은, "군자는 짐승을 죽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헤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고 하지 않나?" 하고는 도리어 그들에게 술을 잔뜩 주었다. 이 3백여 명의 사나이들이 궁지에 빠진 목공을 구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목공이 이오를 친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목공을 돕기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목공이 궁지에 빠진 것을 보자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자기들이 목공의 명마를 잡아 먹었을 때의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었다.
우는 아내와 천자
결국 목공은 전쟁에서 이겨 이오를 생포하고 자랑스럽게 개선한 후 이렇게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온 백성은 몸을 깨끗이 하라. 과인은 이오를 제물로 바쳐 상제께 제사를 올릴 것이다."
주나라 천자가 그 소식을 듣자,
"진나라의 근본을 따진다면 우리 주나라와 한 핏줄이다. 그러니 죽이지 말라."
하고 목숨을 살려 주라고 청했다. 또한 목공의 부인은 바로 이오의 누나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상복에다 산발하고 목공에게 호소했다.
"제가 동생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 동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번만 용서해 주소서."
목공은 곰곰이 생각했다. '모처럼 이오를 사로잡아 기뻐하고 있었는데 천자께선 구명을 청하시고, 아내는 애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목공은 할 수 없이 이오를 방면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숙소와 식사도 군주로서 대우하도록 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이오를 자기 나라로 귀국시켜 다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래서 이오는 하서 땅을 목공에게 바치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이에 목공은 자기 집안의 처녀 하나를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세력은 크게 강성해져 동쪽으로는 용문강까지 뻗쳐 나갔다.
두 진나라의 경쟁
목공 22년에 인질이 되어 있던 태자에게 그의 아버지 이오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러자 태자는, '목공은 내 아버님이 돌아가시더라도 나를 고국에 보내 줄 리가 없다. 내게는 형제가 많다. 나는 이대로 무시당한 채 있게 될테고 그러면 진나라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 나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듬 해인 목공 23년에 진나라에서는 이오가 죽고, 도망쳤던 태자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런데 목공은 태자가 몰래 도망친 사건 때문에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 이오의 형인 중이를 망명지인 초나라에서 불러다가 태자의 아내였던 여자와 결혼시켰다. 중이는 일단 결혼하기를 거절했으나, 목공이 거듭 간청하기 때문에 마침내 승낙하였다. 중이가 진나라로 오자 목공은 그를 더욱 더 우대했다. 이듬해 봄에는 진나라 중신들에게 몰래 사자를 보내, 중이를 맞이하여 군주로 세우라고 통고했다. 이에 중신들이 그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목공은 군대를 수행시켜 중이를 고국으로 보냈다. 그 해 2월에 중이는 드디어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문공이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한편 그 해 가을 주나라에서는 양왕의 아우인 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때움에 양왕은 피신해서 망명했다. 그리고는 이듬 해에 진과 진, 두 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문공과 협력하여 양왕을 입국시켰고, 양왕의 아우 대를 없앴다. 목공 28년, 목공은 성복에서 초나라를 격파시키고 드디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2년 뒤에는 목공과 문공이 협력해서 정나라를 포위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몰래 사자를 목공에게 보냈다.
"우리 정나라를 치면 득을 보는 것은 진의 문공이며, 귀국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습니다. 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진나라에 있어서는 화가 미치는 근원이 될 뿐입니다."
이 말을 그럴 듯하게 여긴 목공은 군사를 거두어 귀국해 버렸기 때문에, 문공도 어쩔 수 없이 작전을 중지하고 말았다.
공지 | isGranted() && $use_category_update" class="cate"> | ∥…………………………………………………… 목록 | 바람의종 | 2007.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