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12장 슬프도다, 관중이여
3. 공적은 남고 몸은 떠나고
친히 주왕실을 돕다
주양왕 3년, 그 해에 주(周)나라 왕자 대는 이락 땅 오랑캐에게 비밀히 뇌물을 보내어 부추겼다. 즉 오랑캐들로 하여금 왕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성 안에서 서로 내응하기로 했다. 이에 오랑캐들은 물밀듯 쳐들어가 낙양의 왕성을 포위했다. 주공 옹과 소백 요는 전력을 기울여 오랑캐를 막고 철저히 성을 지켰다. 그래서 왕자 대는 약속한 대로 오랑캐 군대와 호응하질 못했다. 그 사이에 지체 않고 주양왕은 사자를 제환공에게 보내는 한편 다른 모든 나라 제후에게 보내어 왕실의 위기를 알리는 동시에 구원을 청했다. 진목공(秦穆公)과 진혜공(晋惠公)은 주양왕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왕성으로 달려와서 오랑캐를 쳤다. 이에 오랑캐들은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낙양성 동문을 불사르고 달아났다. 한편 진혜공은 싸움터에서 진목공과 서로 만났을 때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진목공은 아내인 목희(穆姬)의 편지를 진혜공에게 전했다. 그 내용은 가군(賈君)을 간통한 진후(晋侯)의 짐승 같은 행위를 무수히 꾸짖고, 또 모든 나라에 망명하고 있는 여러 공자를 본국으로 소환하지 않는 데 대한 책망이었다. 편지 끝은 속히 지금까지의 잘못을 고치고 진(秦)과 진(晋) 간에 지난날의 우호를 회복하라는 부탁이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진혜공은 이 곳에서 진목공이 혹 자기에게 앙갚음을 하려 들지나 않을까 하고 겁이 났다. 그래서 진혜공은 떠난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급급히 군사를 휘몰아 본국으로 달아났다. 과연 비표가 진목공(秦穆公)에게 권했다.
"진군(晋君)은 달아나듯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밤에 진군(晋君)을 추격하여 무찔러 버리십시오."
진목공이 비표를 돌아보았다.
"서로가 다 천자를 도우려고 이 곳에 왔으니 비록 사사로운 원한이 있을지라도 여기서는 경솔히 군대를 움직여선 안 된다."
진목공은 비표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나라로 돌아갔다. 한편 연락을 받은 제환공도 관중에게 속히 주왕실에 가서 오랑캐를 무찌르고 천자를 돕도록 분부했다. 관중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에 이르렀을 때는 오랑캐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관중은 즉시 사람을 오랑캐 나라로 보내어 융주를 크게 꾸짖었다. 융주는 제나라 위세에 겁이 나서, 곧 사람을 보내어 주왕실과 관중에게 사과했다. 오랑캐 사자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우리 오랑캐들이 어찌 감히 왕성을 자의로 범할 리 있겠습니까. 왕자 대가 여러 가지로 왕성을 치라고 권하기에 그만 그런 짓을 저질렀을 뿐입니다."
주양왕은 그제야 이번 사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다 왕자 대의 짓임을 알고 놀랐다. 주양왕은 즉시 왕자 대를 국외로 추방했다. 왕자 대는 쫓겨나자 제나라에 몸을 의탁했다. 관중은 이를 허락했다. 다만 오랑캐와 손잡는 일은 결코 안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였다. 그리고 오랑캐에게도 주왕실에 충성하라고 전하니, 다시 오랑캐 나라 융주는 제나라 위세에 질려, 사람과 뇌물을 왕성에 보내 용서를 빌고 주양왕에게 조례하고 지난 죄를 다시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주왕실은 거듭 오랑캐를 용서하고 그들의 청을 승낙했다. 주양왕은 관중이 오랑캐를 꾸짖고 또 오랑캐로 하여금 다시는 반심을 품지 못하게 조례하고 사죄케 한 그 공로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주양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관중을 청했다. 그리고 상경 벼슬에 대하는 예의로써 관중을 우대했다. 관중이 굳이 겸양했다.
"신보다 고귀한 분이 많은데 어찌 신이 과도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끝내 관중은 하경의 자리에 앉아 천자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서 돌아갔다.
관중, 병으로 쓰러지다
이 해 겨울에 관중은 병으로 눕게 되었다. 제환공은 친히 관중의 집에 가서 문병했다. 관중은 병으로 너무나 수척해 있었다. 제환공이 관중의 손을 잡고서 물었다.
"중부의 병이 이렇듯 심한 줄은 몰랐소. 불행히 중부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과인은 장차 이 나라 정사를 누구에게 맡겨야겠소?"
이 땐 영척, 빈수무도 전후하여 다 세상을 떠난 뒤였다. 관중이 길이 탄식했다.
"아깝고 아까운 것은 영척입니다."
제환공이 말했다.
"죽은 영척만한 인물도 지금은 없단 말이오. 포숙아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떻겠소?"
관중이 대답했다.
"포숙아는 군자이기 때문에 정치를 못합니다. 그는 선악을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분명합니다. 물론 선을 좋아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악을 미워한다는 것이 탈입니다. 그러한 포숙아에게 누가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포숙아는 그 사람을 평생 미워합니다. 이것이 포숙아가 정치를 할 수 없는 결점입니다."
제환공이 초조히 물었다.
"그럼 습붕은 어떻소?"
"습붕이면 무던하리이다. 습붕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에도 공사를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관중이 다시 한 번 탄식하고 말을 계속했다.
"하늘이 습붕을 세상에 내보내어 신의 혓바닥 노릇을 하게 했습니다. 이제 신이 죽으면 어찌 혀만 홀로 남아서 살 수 있겠습니까. 주공은 나랏일을 습붕에게 맡길지라도 오래 부리지는 못하시리이다."
"그럼, 역아에게 맡기면 어떻겠소?"
관중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했다.
"주공은 더 묻지 마소서. 신이 다 말하겠습니다. 역아, 수작, 개방 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마소서."
제환공이 의아해서 말했다.
"지난날 내가 구미를 잃었을 때 역아는 제 자식을 삶아서 나를 먹인 사람이오. 그는 자기 자식보다도 과인을 사랑한 사람인데 그래도 의심해야겠소?"
관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하거늘 그는 제 자식을 죽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제환공이 다시 말했다.
"수작은 처음부터 과인을 섬긴 사람인데, 나는 그가 자기 몸보다도 과인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래도 그를 의심해야 되겠소?"
관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람은 자기 몸보다 귀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거늘 그는 거세하는 것으로 자기 몸을 천하게 취급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제환공이 다시 물었다.
"위나라 공자 개방은 세자의 몸으로써 천승의 나라까지 버리고 과인에게 와서 신하로 있는 사람이오. 그는 과인 밑에 있는 것을 무엇보다도 영광으로 생각하오. 그러기에 그는 부모가 죽어도 본국에 돌아가질 않았소. 그가 친부모보다도 과인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관중이 대답했다.
"사람은 자기 부모보다 더 친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하거늘 그는 자기 부모에겐 불효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임금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천승의 임금이 되고 싶다는 것은 욕심 중에서도 큰 욕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임금이 될 수 있는 천승의 나라를 버리고 주공 밑에 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천승보다 더 큰 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공은 반드시 그를 멀리하고 가까이하지 마소서. 가까이 하시면 반드시 이 나라가 어지러울 것입니다."
제환공이 마침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상 말한 세 사람은 과인을 섬긴 지 오래되었는데 중부는 어째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야 그런 말을 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신이 지금까지 말하지 아니한 것은 주공의 뜻을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비유컨대 물과 같습니다. 신은 그 흐르는 물에 둑이 되어 넘치지 않게 한 것 뿐입니다. 이제 그 둑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장차 물이 넘는 재앙이 없도록 주공은 그들을 멀리하소서."
제환공은 말없이 관중의 집을 나와 궁으로 돌아갔다. 필경 관중의 목숨이 어찌 될 것인가. 제환공을 따라갔던 사람들은 관중이 병상에서 위문 온 주공과의 문답을 통해 역아, 수작, 개방, 세 사람을 혹평하고 포숙아의 한계를 지적한 후, 습붕을 차기 정승으로 추천하는 걸 곁에서 들었다. 그 중 한사람이 그날 들은 걸 역아에게 살을 붙여 모조리 고자질했다. 역아가 포숙아에게 전해 말했다.
"관중이 이 나라 승상이 된 것은 누구의 덕입니까. 그를 우리 주공께 천거한 것은 바로 포숙아 당신이 아닙니까. 이번에 주공이 관중을 문병가셨을 때 그는 주공에게 말하길 '포숙아는 정치를 못합니다' 하고 습붕을 천거했답니다. 참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도 그런 소릴 들으니 너무나 분하군요."
이 말을 듣고 포숙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 말이 일리는 있소. 관중을 승상으로 주공께 천거한 것은 바로 나였소. 그러나 관중은 나라에 대한 충성만이 있을 뿐, 친구나 자기 개인을 위해서 나랏일을 잘못 판단할 사람은 아니오. 만일 관중이 나에게 사구 벼슬만 시켰더라면 내가 벌써 이 나라 간신들을 다 내쫓아 버렸을 것이오. 당신 뜻엔 어떠하오? 나도 이걸 생각하면 참 분하구려."
역아는 포숙아의 말에 얼굴이 화끈했다. 역아는 슬며시 포숙아에게서 물러갔다. 하루 걸러서 제환공은 다시 관중의 집으로 갔다. 이미 병상의 관중은 말을 못했다. 포숙아와 습붕은 관중의 손을 잡은 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이날 밤에 관중은 세상을 떠났다. 제환공이 방성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애닮구나, 중부여! 하늘이 과인의 팔다리를 빼앗아 가는구나!"
그러고는 서둘러 상경 벼슬에 있는 고호를 장례 도감으로 지명하여 장례 준비를 하게 했다. 제환공은 관중의 장례를 상대부의 예로써 극진히 모시니 백성들도 모두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했다. 그리고 제환공은 관중이 살아 생전에 녹으로 받던 땅과 전답을 다 그 아들에게 줬다. 뿐만 아니라 관중의 자손에게는 대대로 대부 벼슬을 주도록 조치했다. 역아가 대부 벼슬에 있는 백씨에게 말했다.
"지난날에 주공께서 대부가 받았던 땅 3백 평을 도로 빼앗아 관중에게 준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이제 관중이 죽었는데 대부는 왜 주공께 말해서 지난날의 그 3백 평 땅을 도로 찾지 않습니까. 정 말하기 곤란하다면 내가 주공께 직접 말씀해 드릴까요?"
백씨가 울면서 대답했다.
"나는 원래 공이 없는 사람이오. 그래서 땅을 잃었을 뿐이오. 중부는 비록 죽었으나 그의 공로는 백성들이 살아있는 한 제나라보다도 더 영원히 남을 것이오. 그러하거늘 내 무슨 면목으로 주공께 중부의 공을 훼손하면서 옛땅을 도로 찾겠다고 청할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역아가 길이 탄식했다.
"관중은 죽었건만 살아 있는 백씨가 저렇듯 심복하고 있구나. 참으로 우리 같은 사람은 소인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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