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4. 북방 원정에 나서다
속매의 계교
한편 대패한 오랑캐 진영에서는 작전 회의가 열렸는데 속매가 밀로에게 계책을 말했다.
"제군이 전진하려면 반드시 황대산(黃臺山) 골로 들어올 것입니다. 우린 즉시 나무와 돌로 길을 막고 함정을 파서 병사들이 지키게 하면 비록 백만 명일지라도 살아서 넘진 못할 것 입니다. 더구나 복룡산 20여 리엔 물이 없어 적은 유수(濡水)를 마셔야만 하니 그 유수를 막아 버리면 적은 물도 없어 큰 혼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틈을 타서 그들을 무찌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죽국(孤竹國)에 구원을 청하여 그들에게 싸움을 하게 하면 이는 만전지책(萬全之策)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속매의 말을 들은 밀로는 그제서야 크게 기뻐하고 즉각 그 계책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한편 관중은 산융군이 물러간 후 3일 동안 아무 기척이 없어서 의심한 나머지 세작(細作)을 보내 적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 이튿날 세작이 돌아와 황대산의 큰길이 막혔음을 전하니 관중은 호아반을 불렀다.
"적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가?"
"이 길로 가면 불과 사오 리 밖에 황대산이 있어 그 곳을 지나면 적국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다른 길로는 서남쪽으로 돌아 지마령(芝痲嶺)을 경유하여 청산(靑山) 입구로 빠져 몇 리를 돌아가야 영지 소굴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그 쪽은 산이 높고 길이 험해 군마와 병차가 통행하긴 매우 불편합니다."
이 때 아장(牙將) 연지름이 황급히 들어와 아뢰었다.
"융주가 물줄기를 막아 군중에 물이 부족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지마령 일대는 하루이틀엔 갈 수 없는 산길이니 물을 싣고 가야합니다."
호아반이 연지름 말을 듣고 이같이 전하니 제환공이 군중에 선포하였다.
"산을 파서 물을 먼저 얻는 자에겐 후한 상을 주리라."
공손 습붕이 앞에 나서며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개미 구멍이 있는 곳을 파면 반드시 물이 있다 하옵니다."
그래서 군사들은 개미 구멍을 찾아헤맸지만 허탕이었다. 습붕이 다시 군사에게 명했다.
"원래 개미는 겨울이면 따뜻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볕 잘 드는 곳에 살고, 여름이면 시원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산 그늘에서 산다. 이런 겨울엔 반드시 양지 쪽에 있을 것인즉, 함부로 땅을 파지 말고 주의해서 살펴보아라."
군사들은 다시 양지 쪽만 더듬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에서 환호성이 일어났다. 과연 그들이 양지 바른 땅을 파자 샘물은 솟았다. 더구나 그 물맛은 시원하고 달았다. 제환공이 찬탄했다.
"습붕은 성인이로다."
그래서 그 샘을 성천(聖泉)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복룡산을 용천산(龍泉山)이라고 개명했다. 군사들은 물을 마시며 서로 경축했다. 한편 밀로는 제군이 조금도 식수에 곤란을 받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하였다.
"천지 신명이 중원 사람을 돕는가?"
곁에서 속매가 아뢰었다.
"제군에게 비록 물은 있을지라도 멀리 오느라고 군량만은 넉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굳게 지키며 세월을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버티지 못하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밀로는 머리를 끄덕였다. 한편 관중은 빈수무에게 비밀히 한 계책을 일러 주고나서 큰소리로 명령했다.
"장군은 규자(葵玆)로 돌아가서 군량을 운반해 오라."
빈수무는 군량을 가지러 규자로 가는 척하면서 호아반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론지 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군량을 가지러 규자로 간 것이 아니었다. 호아반은 길을 안내하고 빈수무와 군사는 그 뒤를 따라 지마령(芝痲嶺)으로 향했다. 빈수무가 말했다.
"중부(仲父)께서 오늘부터 6일째 되는 날에 적을 공격한다고 하셨소. 우리는 이 길로 돌아가서 우군과 호응하도록 기일 안에 영지국 근처까지 가야 하오."
호아반이 대답했다.
"비록 지마령을 지나고 청산 입구를 빠져나가 빙 돌아서 가지만 기일 안에 영지에 당도할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한편 관중은 밀로의 군사에게 이런 계책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않기 위해 아장(牙將) 연지름으로 하여금 날마나 황대산에 가서 싸움을 걸게 했다. 아장 연지름은 날마다 황대산에 가서 밀로를 욕하고 자극하여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6일이 되도록 산융은 꿈쩍도 않고 싸움에 응하질 않았다. 관중이 말했다.
"이제 6일이 지났으니 빈수무는 서로(西路)로 돌아서 적국 가까이까지 갔을 것이다. 이젠 적이 싸움에 응하지 않는다 하여 우리가 가만히 있을 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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