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8장 북방 토벌
2. 밤은 길어 언제 아침이 될까
세자 신생과 미녀 여희
이야기는 북쪽의 진(晋)나라로 돌아가 진무공(晋武公) 시절이다. 원래 진나라는 한나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나라가 두동강이 나서 익(翼)과 곡옥(曲沃)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익의 임금이 진소자후, 곡옥의 임금이 무공이었다.마침내 곡옥의 무공이 임금으로 있을 때 진소자후를 유인해서 죽이고 나라를 통일하자 강(降) 땅에다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진(晋)으로 바꿨다. 진무공은 곧 부고에 있는 구슬과 보배를 모조리 수레에 싣고 주나라에 가서 왕에게 바쳤다. 당시 천자는 주희왕이었다. 주희왕은 뇌물이 탐났다. 그래서 1군(一軍: 1만2천5백1인의 병사)만 둘 수 있다는 조건으로 진나라를 승인했다. 이어 진무공은 제나라 제환공에게 청혼했다. 늙은 나이였지만 영웅은 어디까지나 영웅, 제환공은 장녀를 진무공에게 출가시켰다. 그녀가 제강(齊姜)이다. 젊은 제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정작 진무공은 나이가 많아 생각만 간절할 뿐 남자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를 안 세자 궤제는 은근히 서모인 제강에게 눈독을 들여 유혹했다. 둘이는 마침내 비밀리에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마침내 제강이 궤제의 아이를 낳았다. 그들은 진무공 몰래 비밀리에 궁문 밖으로 내보내 백성 집에서 아이를 기르게 했다. 그 아이가 신생(申生)이다. 사실 세자 궤제는 일찍 장가를 가서 가희(賈姬), 호희(弧姬), 융희(戎姬) 등의 부인과 호희가 낳은 중이, 융희가 낳은 이오 등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러나 원래 호색한인지라 서모까지 건드렸던 것이다. 결국 진무공이 군위에 있은 지 39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세자 궤제가 군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진헌공(晋獻公)이다. 이 때는 이미 세자 때 혼인한 정실(正室) 가희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에 진헌공은 아버지의 후취인 제강을 자기 부인(夫人)으로 세웠다. 그 때 호희 몸에서 난 중이가 21세였고, 이오도 나이가 많았으나 진헌공은 제강에게서 태어난 신생을 세자로 삼았다. 이리하여 대부 두원관이 세자의 스승인 태부가 되고, 대부 이극이 소부가 되어 세자 신생을 보좌했다. 그런데 제강은 원래가 건강 체질이 아니었다. 얼마 후 딸 하나를 더 낳고는 세상을 떠나니 진헌공은 가희의 친정 동생을 부인으로 삼아 제강이 낳은 딸을 내주고 기르도록 했다. (이 여아가 나중 泰穆公의 부인이 된다.) 그 후 군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진헌공은 군사를 일으켜 여융을 쳤다. 물밀듯 쳐들어오는 진군(晋軍)에게 여융은 속수 무책, 딸 둘을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큰딸이 여희고 작은딸이 소희였다.
여희는 태어나면서부터 절세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초문왕이 뺏은 식나라의 식부인(息夫人) 규씨와 비견할 만했고, 요염하기로는 제양공의 정부였던 노부인(魯夫人) 문강을 뺨칠 만했다. 그리고 꾀는 비상하여 관중의 애첩인 청과 겨룰 만했고, 수단과 거짓은 악독하기로 그야말로 천부적인 여인이었다. 여희는 말솜씨가 어찌나 비상했던지 방금 전에 한 말을 뒤집어 말해도 들은 사람이 그 잘못을 지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헌공은 여희에게 흠뻑 빠졌다. 잠자리는 물론이고 마시고 먹는 일까지도 반드시 함께 했다. 나중에는 정사(政事)까지도 함께 할 지경이 되었다. 이듬해 여희는 아이를 낳았다. 그의 이름이 해제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소희가 또한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이 탁자다. 진헌공은 마침내 지난날의 제강 따위는 모조리 잊었다. 그는 여희를 부인으로 세우고자 했다.
하루는 태복 곽언을 불러 점을 쳐보게 했다. 곽언이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워 열문(裂紋)을 보고서 점을 쳐 보고 항차 그 징조에 관한 글을 진헌공에게 바쳤다.
오로지 생각대로 하려 들면 변란이 생기니
마음이 변하여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못하리
제아무리 좋은 향기도 나쁜 향기를 이기지 못해
10년이 지나도 흉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으리
10년 안에 변난다
진헌공이 글을 보더니 물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곽언이 하나하나 뜻을 새겨서 아뢰는데 이는 여희에 대해 심히 좋지 않게 나타난 것임을 대뜸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진헌공은 오로지 여희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오히려 이번에는 사소(史蘇)를 불러 다시 점을 치게 했다. 괘사(卦詞)가 나왔다.
閨觀利女貞
엿보는 것은 여인의 貞에 좋다
진헌공은 괘사를 보더니 희색이 만면하여 말했다.
"여자가 안에 거처하며 바깥을 내다보는데 방문을 활짝 여는 게 아니라 살며시 내다보는 것은 여자로서 가장 바른 태도이다. 이보다 길한 괘는 다시 없을 것이다."
곽언이 말했다.
"천지 개벽 이래로 먼저 모양(象)이 있은 뒤에 수(數)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불에 태운 귀갑에 나타난 모양이 앞서는 것입니다. 수는 그 다음입니다. 주공께서는 마음에 드시지 않거나 불편하시더라도 수보다 모양을 따르십시오."
사소도 정색을 하고 아뢰었다.
"예법에 보면 적출(嫡出)로서 두 장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후(諸侯)는 정실부인(王室夫人)을 두 번 두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괘사에 나오는 엿본다는 뜻은 바깥을 살며시 내다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다시 부인을 두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결코 바르고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진헌공이 화를 냈다.
"만일에 너희들 점친 것이 맞다면 모두가 귀신 잡것들의 수작일 것이다. 허튼 소리들 그만하고 물러가거라. 과인은 내 뜻대로 할 것이다."
마침내 진헌공이 택일하여 종묘에 고하고 여희를 정실 부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정 동생 소희를 차비(次妃)로 삼았다. 사소가 한탄했다.
"장차 우리 진나라가 망하겠구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이 말을 듣고 대부 이극이 놀라서 물었다.
"누가 이 나라를 망친단 말이오?"
사소가 대답했다.
"누구긴 누구겠소? 저 여희가 아니고 누구겠소?"
이극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사소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사소가 설명했다.
"옛날 하(夏)나라 걸왕은 유시(有施) 땅을 점령했을 때 유시 사람이 말희라는 미녀를 바치었소. 그후 걸은 말희를 총애하다가 나라를 망치게 되었소이다."
사소가 계속하여 말했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유소(有蘇)를 점령했을 때 유소의 딸 달기를 얻었소. 주왕은 달기만 끼고 돌다가 마침내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되었소. 주유왕(周幽王)은 직간하는 신하를 잡아 가두었다가 포사라는 미녀를 뇌물로 받고 풀어 주었소. 그리고 포사를 정비(正妃)로 삼고 흥청거리다가 끝내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하고 서주(西周)를 망치고 말았지 않소. 이제 우리 진나라가 여융을 정벌해서 여희를 얻었소이다. 주공이 지나치게 사랑하여 정실 부인으로 삼으려 하니 이는 옛 고사가 가리키는 것처럼 나라가 망할 조짐이라 아니할 수 없소."
말을 마치자 사소는 표연히 가버렸다. 때마침 곽언이 곁을 지나다가 이극의 말을 듣게 되었다. 곽언은 사소와 의견이 달랐다.
"우리 진나라는 장차 많은 어려움이 있겠으나 결코 망하지는 않을 것이오. 옛날 우리 선대에 이 곳에다 나라를 세울 때 천하를 바로잡아 다시 왕국을 세운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익과 곡옥이 합쳐진 후 2대째인데 어찌 나라가 망할 리 있겠소이까."
이극이 의아해 하면서 다시 물었다.
"그런 점괘라면 나라가 망하지는 않겠지만 변고는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곽언이 대답했다.
"대저 선(善)과 악(惡)의 보답이란 십 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十)이란 숫자가 가득찬 숫자이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변고가 일어난다면 장차 십 년 안에 일어나게 되겠지요."
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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