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6. 초문왕의 뺨에 화살이 꽂히니
육권의 자결
주혜왕 2년 때 일이다. 전 해에 초문왕은 파(巴)나라 임금과 함께 신(申)나라를 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초문왕은 파나라 군사를 업신여기고 혹사했다. 마침내 파나라 임금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초나라를 지키던 수장 염오(閻敖)는 어찌나 급했던지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초문왕은 파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망온 염오를 즉시 잡아죽였다. 이에 염씨(閻氏) 일족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사죄하고 빌었으나 속으로는 초문왕을 몹시 저주했다. 얼마 후 파군이 초나라를 치자 초문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나루터에서 크게 싸웠다. 그러나 내부에서 원한을 품고 시기만 기다리던 염씨 일족 수백 명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염씨 일족은 초군으로 가장하고 초진 안에 들어가서 초문왕을 찾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초문왕을 보자 파군과 싸우는 척하다가 활을 잔뜩 잡아당겨 갑자기 돌아서면서 초문왕을 쏘았다. 화살은 초문왕의 뺨에 꽂혔다. 염씨 일족은 이에 기세를 올려 닥치는 대로 초군을 쳐죽였다. 이 때 파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 병력을 초문왕의 진영으로 투입했다. 마침내 초군은 대패하여 죽는 자가 열 명중 일곱 여덟이었다. 초문왕은 뺨에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났다. 파나라 임금은 크게 이기자 더 이상 초군을 추격하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염씨 일족은 초나라를 떠나 파군을 따라가 파나라 사람이 됐다. 한편 초문왕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성 안에서 수문장 육권이 물었다.
"왕은 싸움에 이기셨습니까?"
초문왕이 대답했다.
"졌노라."
"선왕이 칭왕하신 이래 우리 초군은 싸워서 패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파나라로 말하면 조그만 나라가 아니옵니까. 그런데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졌으니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간 황(黃) 나라가 우리에게 조례하지 않고 있습니다. 왕께서 황나라를 쳐서 이기고 돌아오시면 이 조소를 면할 수 있습니다."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초문왕이 분연히 모든 군사에게 말했다.
"이번에 가서 또 이기지 못하면 과인은 결코 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초문왕은 그 길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황나라를 쳤다. 초문왕이 친히 북을 쳐서 사기를 돋우니 군사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황나라 군사를 쳐부쉈다. 그날 밤이었다. 초문왕은 진중에서 꿈을 꾸었다. 식나라 군후가 산발한 머리를 흔들며 눈을 부릅뜨고 나타나서 원한 맺힌 음성으로 말했다.
"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였느냐? 그리고 내 나라를 없애고 내 영토를 빼앗았느냐? 그리고 내 아내를 뺏아갔느냐? 내 이미 상제께 너의 죄를 낱낱이 고하였다."
식나라 임금은 손을 번쩍 들어 초문왕의 뺨을 갈겼다. 초문왕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화살에 맞은 뺨이 찢어지고 피고름이 흘렀다. 초문왕은 크게 놀라 즉시 군사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영채를 뽑고 본국으로 향해 떠났다. 초군이 추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초문왕은 자다 말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겨우 아픈 몸을 반쯤 일으키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군사들이 모여 들었을 때 초문왕은 이미 흉하게 눈을 부릅뜨고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이에 초나라 군사들은 애통해 하면서 귀국했다. 한편 육권은 초문왕의 시신을 영접하고 장례를 지냈다. 그래서 초문왕의 뒤를 이어 웅간이 왕위에 올랐다. 이 웅간이 식부인의 큰아들이었다. (이후 식부인은 문 부인으로 불리었다.) 초문왕 장례를 마친 후 육권이 말했다.
"나는 두 번씩이나 왕의 명령을 거슬렀다. 그럴 때마다 왕은 나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내 뜻을 받아들여 주셨다. 이제 왕이 안 계신데 내 어찌 더 이상 이 세상을 살기 바라리오. 왕의 뒤를 따라 지하로 돌아가리라."
육권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모은 후 말했다.
"내 죽거든 반드시 나를 성문 곁에다 묻어 다오. 자손 만대에 내가 성문을 굳게 지킨다는 걸 알게 하리라."
마침내 육권은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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