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조말의 설욕
드디어 회담할 날이 왔다. 이날 제환공은 용맹한 장수와 씩씩한 군사를 단 아래 늘어 세우고 청기 . 홍기 . 흑기 . 백기를 동서남북 사방에 세우고 각기 대를 나누어 장관과 통령을 두고 중손추로 하여금 통괄하게 했다. 그리고 7층 단의 층계마다 황기를 들려 장사를 세워 파수 보게 하고 단의 맨 위에는 대황기(大黃旗)를 한쪽으로 세웠다. 그 대황기에 방백(方伯)이라는 두 글자가 뚜렷이 수 놓아져 있었다. 또 곁에는 큰 북을 걸었는데, 왕자 성부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 중간에다 향탁(香卓)을 베풀었다. 그 위에 저수반과 옥우와 희생을 담을 그릇과 삽혈(揷血)하는 기구가 놓여 있었다. 이것은 습붕이 맡았다. 계하(階下)에는 동곽아가 빈이 되어 서고, 관중은 상(相)이 되어 계상에 섰는데 그 기상이 매우 정연하고 엄숙하여 모습만으로도 일대 장관이었다. 제환공의 전령에 의해서 노장공이 당도하자 제나라 장수가 말했다.
"노후와 귀국 신하 한 사람만 단에 오르시고 그 나머지 사람은 단 아래에서 쉬십시오."
이에 조말이 갑옷을 입고, 손에는 대검을 들고 노장공 곁에 바짝 붙어 서서 단 위로 올라갔다. 노장공은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를 때마다 제환공의 위의에 압도되어 몸을 떨었다. 그러나 조말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실로 장수다운 기상으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중간에서 제나라 동곽아(東郭牙)가 앞으로 나서며 조말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양국 군후가 기분좋게 친선 우호로 회견하는 마당에 서로 예로써 대함이거늘 어찌 무기를 가지고 올라오시오. 청컨대 그 대검을 내려놓으시오."
이 말을 듣자 조말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동곽아를 노려 보는데 양쪽 두 눈꼬리가 찢어져 올라갔다. 조말의 무서운 표정에 동곽아는 기가 질려 뒤로 물러섰다. 노장공과 조말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양국 군후가 서로 대하자 각기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북소리가 세 번 울리니 제환공과 노장공은 향탁(香卓)을 향하여 절했다. 습붕(濕朋)이 검은 소와 백마의 피를 옥우(玉盂)하고 맹세하기를 청했다. 바로 이 때 조말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으로 제환공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관중이 급히 제환공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물었다.
"대부(大夫)는 어찌 그러시오?"
조말이 씩씩대며 대답했다.
"우리 노나라는 다른 나라의 침범을 받아 위기를 겪었소. 들으니 귀국은 약한 자를 돕고 쓰러지는 자를 붙들어 일으키기로 왕명을 받고 주장이 되어 제후들을 모아 회를 했다는데 왜 우리 노나라를 위해선 관대하지 않으시오?"
관중이 물었다.
"그렇다면 대부는 무엇을 원하오?"
"제나라는 스스로 강한 것만 믿고 약한 자를 속이오. 지난 날 제나라는 우리 노나라 문양(汶陽) 땅을 빼앗았으니 귀국은 우리 주공에게 그 땅을 돌려주시오. 그러면 즉시 삽혈(揷血)하는 맹세를 하겠소이다."
관중이 곧 제환공을 돌아보며 아뢰었다.
"주공께서는 노나라의 요구를 허락하소서."
제환공이 선뜻 웃으며 말했다.
"대부는 안심하라. 과인은 회합이 끝나는 즉시 문양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겠노라."
그제서야 조말은 대검을 내려놓고 습붕을 대신해서 희생의 피를 담은 옥우를 두 군후에게 올렸다. 두 군후는 함께 그 피를 입술에 바르고 맹세했다. 조말이 다시 말했다.
"관중은 제나라 정사를 맡은 정승이시니 청컨대 나와 함께 삽혈합시다."
제환공이 선뜻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필 우리 중부와 맹세할 것이 있으리오. 과인이 그대와 맹세하리다."
그리고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며 맹세했다.
"문양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지 않거든 하늘이여 이 사람을 벌하소서!"
조말은 곧 희생의 피를 입술에 바르고 제환공에게 두 번 절한 후 거듭 칭사했다. 이에 양국 군후는 술을 나누어 마시고 서로 환담하고서 동맹을 마쳤다. 회견이 끝나자 왕자 성부와 많은 대부들이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들이 제환공에게 투덜댔다.
"즉시 노후와 조말을 잡아와 크게 꾸짖고 그 따위 버르장머리를 대번에 고쳐 놓으십시오. 우리는 그런 모욕을 당하고선 그냥 있을 수 없습니다."
제환공이 정색하며 그들을 말렸다.
"과인은 이미 조말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승낙했다. 필부도 한번 약속하면 신의를 지키거늘 항차 천하를 다스리려는 과인이야 더 말할 것 있겠느냐? 그대들은 더 이상 다른 말하지 말라."
이튿날 제환공은 다시 공관에서 주연을 베풀고 노장공과 잔을 나누며 서로 기뻐한 뒤 각기 작별했다. 제환공은 노장공을 전송하고 나서 즉시 문양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도록 조치했다. 이 때 조말이 제환공과 대결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서 중국 협객(俠客)의 시조로 추앙된 것을 시로 읊은 것이 있다.
森森戈甲擁如潮
伏劍登壇意氣豪
三敗羞顔一日洗
千秋俠客首稱曹
숲처럼 무장한 군사들이 둘러 섰는데
칼 짚고 단 위에 올라선 그 의기 크도다.
세 번 패한 수치를 단 한 번에 설욕했으니
조말은 천추에 협객의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일이고 진정 두려운 것은 천하를 바라보는 제환공과 관중의 커다란 야심과 기상이라는 시(詩)도 있다.
巍巍覇氣呑東魯
尺劍如何能用武
要將信義服群雄
不吝汶陽一片土
드높은 패업의 기상이 동쪽 노나라를 삼켰으니
한 자루 칼로 어찌 항거하여 막을 수 있으리오.
신과 의로써 모든 영웅 호걸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찌 문양 땅 한 줌의 그 토지를 아끼리오.
제환공과 노장공의 가(柯) 땅 동맹은 곧 여러 나라에 전해졌다. 그들은 신의를 지킨 제환공을 칭송했다. 이에 당황한 위 . 조 두 나라는 사자를 보내어 제나라에 사죄하고 동맹을 청했다. 그러나 제환공은 그들 사자들에게 장차 송나라를 친 후에 다시 기일을 정해 동맹하는 회를 하자고 약속한 후 각기 자기 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고 나서 관중을 불러 물었다.
"중부의 말대로 모두 이루어졌소. 이번에는 송나라로 쳐 들어가 송환공의 죄를 물어야 할 텐데 좋은 계책을 준비하시었소?"
관중이 아뢰었다.
"우선 사자를 주왕실에 보내어 아뢰십시오. 송나라가 회(會) 도중에 돌아갔으니 왕명을 우습게 여긴 처사라 이를 쳐서 죄를 물어야겠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왕군(王軍)을 보내 주시면 함께 송나라를 치겠다고 하십시오."
제환공은 곧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자초지종을 고하게 했다. 그리고 몇 가지 사항을 일러 보냈다. 한편 주왕실에서는 제나라 사자의 아뢰는 말에 크게 고무되어 이번 기회에 주왕실을 우습게 아는 열국 군후들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주희왕은 이를 받아들여 곧 선멸에게 왕군을 거느리고 가서 제나라와 함께 송나라를 치라고 분부했다. 제나라 사자는 왕군과 함께 돌아오면서 이 내용을 널리 선전하고 소문을 냈다. 그러자 위 . 조 두 나라도 각기 군사를 보내어 제나라를 돕는데 저마다 선봉에 나서기를 자원하는 것이었다. 이에 제환공은 관중으로 하여금 먼저 일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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