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5장
공자의 비유:에식에 쓰이는 신성스러운 그릇
<부모를 잘 먹이기만 하는 일은> <개나 말들까지도 다 할 줄 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부모를 그저 살아 있게끔 먹이는 일보다 훨씬더 선한 어떤 것이다. 적절하게 배치된 곳에서, 적절한 경의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적절한 방식으로 음식을 건네 주고 받으며 먹는 일은, (동물도 다하는) 단순한 음식물 섭취 행위를 인간만의 고유한 만찬 의식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회초리가 (무서워 그것에) 복종한다면 그런 사람은 가축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러나 올바르게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하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바로 인간 공동체 안에서 봉사하는 일을 (말하자면 결코 폭력이 무서워서 수동적으로 이끌려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과 본성이 우러나와서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하게 될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기 공동체의 참된 성원이 되는 것이다.
(예식에 등장되는) 사물들의 존엄성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인간 개개인이 단순히 생물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예식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자기의 생물적 존재, 즉 정신적 의미가 아닌 생물적 의미의 <생명>을 만약 <예식>이 그것을 요구할 경우 희생하는 사람을 우리가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희생의식(고삭)의 기본 요소인 양을 죽이는 일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의구심에 다음과 같이 대답함으로써, 공자는 간단 명료하게 이 점을 밝혔다. <너는 양을 아까워 하느냐? 나는 예를 사랑한다>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공자는 말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변신하게 된다. 그렇게 변신하게 될 때까지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며 다만 인간으로 계발될-마치 갓 태어난 유아나 원시림의 늑대 소년 또는 <야만인>처럼-잠재성만 있는 것이다. 예식이 어떻게 야만인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사람으로 변환시키는가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예식은 정당화된다. 그리고 무엇이 인간의 가장 좋은 상태인지를 한 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 맛있는 음식이나 즐기는 단순한 동물적 생존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예식을 누리는 삶이 인강의 최선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최상의 삶(즉 예에 근거하는 삶)이 정당회되는 것이다. 어떤 입장에서 보든지간에, 우리는 인간의 뚜렷한 본성과 존엄성에 대한 우리의 비젼을 환히 밝혀 주고 심화시켜주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얻게 된다. 우리가 인간을 (원자들처럼 고립된) 개별적인 자아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쥐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 예식의 참여자로 보게 될 때, 제사 예식에 쓰이는 그릇처럼, 그 사람은 우리들 눈에 새롭고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논어>에서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신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결코 <사회>에 부역만 하는 단순한 도구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예식이 결코 참여자나 신성한 그릇, 제단, 주문들과 무관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일 수 없듯이 인간 사회 도한 하나의 자체 독립적인 단위일 수 없다. 사회란 서로를 사람답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아니,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사회란 서로의 인간 관계 유지에 요청되는 사랑과 진실과 경의의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심으로 예에 규정된 의무들이나 특권들에 따라서 서로를 인간답게 대접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다양한 인간 관계의 형태들은 물리적으로 불가피하게 인간들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배워서 익힌 뒤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예식들에 근거하고 있다. 예식들은 사람들 스스로가 옳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식에 굴종하는 여하한 존재들이나 몸짓들이나 말들도 없는 것이며, 또한 예식이 그것들에 종속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에 돌아간다>는 뜻은 동물적 욕구나 부도덕한 격정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예에의) <굴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주제는 (원자처럼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된) <개인의 발견>이나 개인의 궁극적 중요성의 발견도 아니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맺고 있는 제반연관 관계로부터 차단되고 추상화되어 버린) 단순한 개인이란 언제나 이렇게도저렇게도 쓰여질 수 있으며 또한 언제라도 깨어질 수 있는 볼품 없는 그릇, 그러나 인생의 예식에 이바지할 때 비로소 찬란하고 신성스럽게 변모되는 그릇에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이 결코 인간들이나 개개인들의 궁극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지 보다 큰 전체(즉 사회)에 봉사만 하는 개미처럼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제사 예식 자체가 신성스럽기 때문에 제사 예식에 쓰이는 그릇의 신성스러움이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성스러움에의 참여 효과 또한 실제적으로 눈에 보인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의 거룩함(또는 신성스러움)이 들어 있는 방식이 기독교의 관점괴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처럼) 인간은 신성, 즉 불멸하는 영혼의 한 <조각>을 다른 사람괴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절대로 확보하는 것만으로 결코 성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관련없는) 개인의 <완숙한 계발>이 핵심적 주제가 아니다. 그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올리는 예식 행위를 통한 인간다움의 완숙한 계발이 핵심적 주제이다 마치 사당에서 쓰이는 예기가 칼로 깎고 끌로 다듬고 옻칠로 광택을 내어서 만들어지듯이, 물론 개인도 자신을 계발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식에 쓸)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 (예식 수행의) 핵심이 아니듯이, 이러한 자기 계발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증하는) 핵심적인 일이 못 되는 것이다. 마련하거나 수련하는 일은 꼭 있어야만 할 일이다. 그러나 핵심은 예식을 올리는 일이다. 예식을 올리는 한에서 일체의 구성요소, 제반 관계들 그리고 각종 몸짓들은 비록 각각이 자기의 특성을 가질지라도 모두 신성스럽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식에 쓰이는 인공물로 개조되지 못한 자연적 대상은 버려져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거룩함의 옷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에까지도, 그리고 젊음과 노래뿐만 아니라 강물과 공기에까지도 드리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예식에 맞는 기우제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게 된다. 군자란 자아, 이기심, 고집, 자만을 거의 완벽하게 잘라 버리고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그와 같은 사람은 인간으로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는 성인이며, 신성스런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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