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4장
보수적 전통주의자인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사람인가?
공자가 다듬은 예에 대한 이상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20세기에 살고있는 우리는 <문화의 갈등>(culture conflict)을 알고 있고, 단일 문화권 내에서도 야기될 수 있는 습관과 가치관의 충돌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찍이 공자가 겪지 못했던 하나의 문제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자의 기본 전체는 하나의 예가 있고, 그것은 보다 위대한 우주의 도(천도)와 근원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전제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이 예가 그가 살고 있던 나라의 (당시 다른 나라는 아직 야만적이었다) 예이며, 그의 전통의 선조들도 바로 이 예 속에서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예와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우주의 도는 내적인 연관을 갖지며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햇다. 따라서 사회적, 도덕적으로 필요한 것은 (개개의 사람들이) 바로 이 예 안에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행위를 형성해 내는 것 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독특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다수의 문화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문화적 다원성이란 점을 고려할 때 공자의 서로 관련된 이런 기본 가정들에 대한 신중한 재검토가 요청된다.
공자가 다듬은 (예의) 이상에 (비판적인) 이런 이의들에 대한 첫번째 대응은 이런 이의들이란 시대 착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만약 누가 공자의 이상을 (서로 다른 문화들이나 관습들간의 갈등을 초월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보편 타당한 인간 이상의 가능성으로서 제시했다면, 그런 비판적 논의들은 당연히 공자의 이상에 대해서도 해당됨을 우리는 용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들이 만일 기원전 5세기 노나라 출신의 교육자인 공자를 비판하는 준거들로서 제기된 것이라면, 그런 논의들은 시대 착오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우리는 논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자는 그가 살았던 당대의 그리스 문화나 이스라엘 문화 또는 보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집트 문명 등 다른 거대한 문화가 있었음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알았던 것은 인접한 아시아권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그들 선조들 중의 몇몇을 특별히 크게 이상화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물론 분명 노나라만큼 수준높은 문화를 가지지 못한 변방의 여러 종족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오늘날 그를 비판하는 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역사 환경, 즉 기원적 5세기 중국에 살았던 공자는 그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인류학적 그리고 역사학적인 정보를 접할 수 없었고, 또한 그런 정보가 잇으리라고 가상할 만한 어떤 합당한 이유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그런 공자가 반문명 또는 순야만 민족들이 살고 있는 변방으로 둘러싸인 중앙, 즉 만물의 <중심>에 오직 하나의 위대한 문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그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그 당대에) 자기의 문화와 같은 수준의 다른 위대한 문명들이 존재하리라는 가능성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식의 번호가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공자에 대한 <면호>는 여전히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왜냐하면 이런 변호는 결국 공자의 가르침으로 더 이상 보편적, 철학적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한) 역사 시대의 그것으로 의미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제야 우리는, 비슷한 지적 한계를 가지고 활동햇던 공자 당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공자의 가르침을 생동적 선택으로 받아들였던가 하는 것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공자의 가르침은 바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의 요점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어쩌면 (인류학적, 역사학적)지식을 보다 많이 가지고 있는 20세기의 현대인들에게는 (비록 이 책에서 나의 논의는 이러한 견해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지만) 하나의 (지나간 특정 시대의)역사적 본보기 이상의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접근 방식은 아직까지 풀지 못한 몇가지 문제를 남겨두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은 (당시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라는 동일 문화권) 내부의 갈등, 즉 단일 문화권 안에서의 충돌의 문제이다. 공자와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흔히 비운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당시에 다수의 난립해 있는, 또한 수시로 전쟁까지도 불사하는 여러 제후국들의 존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민족들 사이에는 상당한 정도로 생활 관습들이 서로 다르며, 이런 관습들이란 협소한 중심부의 제후국들과 변방에 위치한 상대적으로 큰 면적의 나라들 사이에서 시대적 간격을 두고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잇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라도 옛 전통의 붕괴가 자주 일어나면서, 새로운 제도와 습속이 도입되고 있음을 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상한 이론 논쟁으로부터 마키아벨리식의 종치술, 단순 살인, 처참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문화 내적 갈등에 휩싸인 지역이 일찍이 있었다고 한다면, 분명히 노나라와 그 이웃 제후국들이 바로 그에 해당될 것이다. 그때는 실로 일대 혼란-그러한 혼란이 강하게 의식되는-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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