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5장
4. 새 임금이 누구냐
6. 관중의 구사일생
노군 철수
관중이 이를 보면서 깊이 탄식했다.
"군사들은 이미 사기를 잃었으니 여기까지 온 일이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마침내 노나라 병사들은 영채를 뽑고 회군했다. 그들이 사흘 동안 행군했을 때였다. 문득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일대의 병차가 나타났다.이는 왕자 성부와 동곽아가 이끄는 제나라 병사들이었다. 조말이 창을 비껴들고 외쳤다.
"주공은 속히 피하소서. 신은 이 곳에서 죽겠습니다."
그는 관중을 돌아보며 부탁했다.
"그대는 나를 도우라!"
이에 관중은 왕자 성부에게 달려들고 조말은 동곽아와 대결했다. 이 사이에 노장공과 공자 규는 서둘러 도망쳤다. 관중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가 달아나고, 또 싸웠다. 그러다가 큰소리로 지시했다.
"모든 군사는 보급품과 갑옷을 길에 버려라. 그리고 몸을 가볍게 하여 도망쳐라."
제나라 군사들은 기세 등등하여 뒤쫓아오다가 길에 즐비하게 떨어진 노나라 병사들이 버린 갑옷이나 무기를 줍는 일에 바빴다. 이 틈에 노장공과 노나라 주력군은 겨우 제나라 군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장공 일행이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살펴보니 이미 노나라 경내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제나라 군사들은 노장공을 계속 쫓아와서는 노나라 문양(汶陽) 땅 일대까지 점령하고 나서야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공자 규를 죽여라
제환공은 성으로 돌아와서 크게 잔치를 열었다. 모든 대부들이 개선을 축하하고 술잔을 들어 축원했다.
"천수 무강하소서!"
모두들 즐거워하며 웃고 마셨다. 포숙아가 제환공 앞으로 나서서 아뢰었다.
"지금 공자 규가 노나라에 있고, 관중과 소홀이 전심 전력을 다해 그를 돕고 있으며, 또한 노나라가 우리에게 복수하고자 그를 후원하고 있으니 이는 제나라에 더할 나위 없는 근심거리입니다. 그러니 신(臣)은 조금도 축하할 것이 없습니다."
제환공이 물었다.
"경의 말이 옳소. 그럼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포숙아가 대답했다.
"이번 싸움에서 노장공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노나라 경계에까지 가서 그들을 위압해 보이겠습니다. 즉 노나라가 규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노나라를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후가 두려워하고 우리 말을 따르겠다고 할 것입니다."
제환공이 말했다.
"과인은 모든 백성과 함께 그대의 말을 따를 것이오."
이미 포숙아는 병차와 군마를 정돈해 놓고 노나라로 떠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튿날 그는 문양 땅으로 가서 우선 습붕을 시켜 서찰을 지참케 하고 노나라로 보냈다. 습붕이 지참한 서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외신(外臣) 포숙아는 노현후(魯賢侯) 전하께 절하며 아뢰나이다. 집안에는 가장이 둘일 수 없으며 나라에 임금이 둘일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늘에 태양이 하나 있는 것처럼 명백한 법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 종묘를 받들고 계시건만 공자 규가 이를 다투려는 것은 서로가 갖춰야 할 예(禮)도 법(法)도 아닙니다. 우리 임금께서는 형제간 우애로서 차마 그를 죽이고자 않으시니 원컨대 귀국은 공자 규를 처치하여 이웃 나라 사이에 우호를 더욱 단단히 다지십시오.
그리고 관중과 소홀은 우리 임금의 원수인지라 우리에게 돌려 주어 우리 제나라 태묘 앞에서 그들의 목숨을 처치할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깊은 양찰을 바랍니다. 포숙아가 습붕을 배웅하며 단단히 일렀다.
"관중은 개인적으로 내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장차 우리 제나라를 위해 유용한 인재다. 반드시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서 데리고 와라. 큰 상을 내리겠노라."
습붕이 물었다.
"만일에 노장공이 꼭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우겨대면 어떻게 하지요?"
포숙아가 대답했다.
"그럴 때면 관중이 독화살로 우리 주공을 쏘았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하라. 그래서 우리 주공이 손수 관중을 참하려 하신다고 하여라."
습붕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노나라로 갔다.
한편 노장공은 제나라에서 돌아와 겨우 한숨을 돌릴까 하는데 이번에는 습붕이 포숙아의 서찰을 가지고 왔다. 노장공은 서찰을 읽어 보고 즉시 시백을 불러 앞날을 상의했다. 시백이 대답했다.
"소백이 군위에 오르자 능히 사람을 모으고 적재 적소에 쓸 줄 알았기에 우리가 곤욕을 치른 것입니다. 옹름만 보아도 소백의 사람 쓰는 법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제나라 군위는 단단하게 안정되었습니다. 공자 규에게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제나라의 요구대로 공자 규를 죽여 제나라와 강화하고 소백을 안심시켜 다시 예전의 우호를 되찾는 것이 우리 노나라를 위해서 상책입니다."
노장공은 공자 언을 불러, 생두 땅에 가서 제나라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과 소홀은 잡아오라고 분부했다. 노장공은 일단 관중과 소홀을 죄수용 함거에 넣어 제나라로 압송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옥에서 사고가 생겼다. 소홀이 크게 통곡하고는 탄식하며 관중에게 말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해 죽으면 효도라 하고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으면 충신이라 한다. 이는 모두 그 사람의 분수인 것이다. 나는 죽어서 공자 규를 따라 저승에 가겠네. 그대는 살아서 이 원한을 갚아 주게나."
그리고는 감옥 벽에다 머리를 짓찧고 두개골이 깨어져 쓰러지니 그대로 죽고 말았다. 관중이 이 모습을 보고서 두 눈을 내리뜨고 처연히 앉아 있는데 부양이 곁에서 위로했다.
"자고로 임금을 위해 죽는 신하도 있고, 살아야 할 신하도 있다 하지 않습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관중이 대꾸했다.
"어쩌다 이렇듯 궁한 신세가 되었는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으로 딱해서 그러네."
관중은 옥에서 나와 함거 속으로 들어가 갇혔다. 그때 시백이 관중의 기색을 살펴보고 조그만 목소리로 노장공에게 귀뜸하듯 아뢰었다.
"신이 알기로 관중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관상을 보면 그야말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범접키 어려운 상입니다. 아마 그의 재주가 저보다 열 배는 더 많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제나라에 이야기하여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노나라에서 큰 벼슬을 내리어 이 곳에 살게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공(功)을 잊지 않고 노나라에 충성할 것입니다. 장차 관중의 공로로 우리 노나라가 크게 빛날 것입니다. 신이 확신합니다."
노장공이 고개를 갸웃했다.
"제후는 관중을 죽이고자 했다. 그런데 우리가 벼슬을 주고 살린다면 그의 화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공자 규도 죽였는데...... 관중을 살려 둘 필요가 있을까."
시백이 다시 말했다.
"주공께서 관중을 우리 노나라 신하로 만들 의향이 없으시다면 아예 그를 죽이십시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제나라로 보내면 될 것 아닙니까."
노장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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