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철학 - H.핑가레트
제2장
공자에게서 도덕 교육이란 예의 규정들을 몸으로 익히고 문학이나 음악 그리고 일반적인 교양 과목들을 배우는 일이다.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미는 힘>은 마련할 수 있지만, <당기는 힘>은 목표가 본래 지니고 있는 고매성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다. 스승-혹은 군자-이 다른 이들을 도에로 이끄는 것은 그가 정신적으로 고매한 사람에 의해서다. 힘을 가진 것은 바로 그 도이다. 그 힘은 (인위적인) 노력이 없는 것이요, 보이지 않고, 신묘한 것이다. 명백하게 <법가>의 영향으로 나중에 삽입된 문장으로 보여지는 오직 하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모두에서, 덕성, 인간다움, 예식, 그리고 그와 연관된 행위 지침인 <양보>의 사용과는 명백하게 대조를 이루는 제재 조치나 형벌의 사용이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이라는 것이 <논어>의 특징이다.
<논어>는 문제를 간명하게 제시한다. 즉 우리는 예와 <양보>를 써서 통치할 수 있거나 그렇게 할 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스스로 기만하여 보았자 소용이 없으며 <벌>, 즉 제재 조치들과 포상(이라는 강제적 수단)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것들은 폭압적인 방식으로든 혹은 상급을 주어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진실로 인간적인 '즉 도덕적인' 방식이 아니기에, 진실로 인간적인 삶을 확립시키지 못한다. (서양적 세게관에 따른) 도덕적인 죄책감 혹은 죄가 되는 근거로서의 도덕적책임이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도덕적 응징으로서의 벌이라는 개념을 갖지 못한 공자는 제재 조치들의 사용에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어떠한 잠재적 가능성도 볼 수 없었다.
이런 (공자의 입장과) 반대되는 즉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공리주의> 편향적인 관점이 당시의 중국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고 상정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들의 관점을 거부함으로써 공자는 그 자신의 관점을 매우 유별나게 만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의 견해는 당시 매우 강력한 경쟁 세력으로 커 나갔던 법가의 견해와는 명백하게 대조된다. 법가는 전형적으로 채찍이나 사탕 이외의 것에 대한 호소는 감상적인 자기 기만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도덕적인 접근이란 속임수이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쓰는 사람이 스스로 얽어 묶이게 되는 덫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개를 제압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진 발톱과 이빨 때문이다. 호랑이가 자신의 발톱과 이빨을 포기하고 그것들을 개가 사용하게 된다면, 호랑이는 개에게 제압 당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는 그의 신하들을 형과 덕 '즉 <칭찬과 포상>의 <이득>'으로 통제한다.
법가의 이러한 생각은 공자의 가르침과는 선명하게 대조된다.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규정들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고 형벌로 질서를 잡는다면 백성들은 수치심 없이 법망을 빠져 나갈 것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힘으로 그들을 다스리고 예로 질서를 잡는다면 백성들은 수치심을 가질 뿐 아니라 바르게 될 것이다. (이런 중국적인 관념에서) 하여간, 벌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실제적으로 (범죄 발생)억제라는 순전히 공리주의적인 역할이지, 결코 도덕적인 응징의 역할이 아니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고 하겠다. 좀더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도덕적 응징으로서의 벌이라는 관념은 <논어>나 법가의 사유 그 어느 쪽에서도 생겨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의 그 말(벌)에서 도덕적인 의미를 읽어 내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논어>에서는 죄책감과 회개를 어떤 개인의 못된 행위에 대한 도덕적 대응으로 보는 관념이 전혀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제 좀더 자세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논어>의 관점에 따른다면) 사람이란 실제적인 여러 이유들로 인해 자신의 과거 행위를 후회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가던 길을 바꾸고 이제부터라도 도를 따라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죄책감이라고 하는 <내심의> 얼룩(오점의 관념)이 부재한다. 우리의 이런 주장을 밑받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각을 <논어> 원문에서 (당장 곧바로) 읽어 내기보다는 차라리 <논어> 원문을 보다 잘 독해하기 위하여, 이런 우리의 주장에 대한 예외적 사례로 보이는 것들을 통례적으로 우리는 좀더 상세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논어>의 어떤 구절들은 <수치심>을, 또 다른 구절들은 내심의 결함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볼 마지막 구절은 내심의 자기-견책을 요구하는 갓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도덕적 책임 그리고 죄책감과 연관된 관념들에 대해서 적어도 거의 명백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수치심에 대한 언급은 위에서 이미 인용된 적이 있다. 즉 형벌 '곧 위협'로 다스리면 수치심이 사라지고, 덕으로 다스리면 수치심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덕은 미덕의 힘, 또는 인하고 예를 따르는 사람의 덕성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도에 내재하는 힘 혹은 미덕이다. 그것은 물리적, 강제적 힘과는 대조된다. 그래서 다른 구절들과 마찬가지로, 인용된 이 구절은 수치심을 공자가 하나의 도덕적인 대응으로 생각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치라는 말이 과연 <수치심> 이라기보다는 <죄책감>에 해당하는 것인지 어떤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치는 확실히 공자가 언급한 말들 중에는 가장 죄책감의 관념에 가까운 말이다. 따라서 그 말을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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