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요록
제5장
피 튀기는 옥좌
1. 민심을 잃은 제양공
관중, 공자 규의 스승이 되다
"공자 규란 분이 찾아 뵙고자 문 앞에 와 계십니다."
문지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관중은 곧 일어나 밖으로 나가 대문 앞에서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공자 규는 장배를 대하듯 깍듯했다.
"어서 오십시오."
관중은 예의를 갖춰 공자 규를 안채로 영접했다. 주장왕 9년 정초, 그러니까 제양공이 위나라 원정을 떠나고 나서 해가 바뀐 그 해 정월이었다. 서로 마주 앉자, 공자 규가 말했다.
"지난번 선강 누님의 일로 신세를 진 후 처음이지요. 이렇게 뵙는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참, 거나라에서는 소백 공자의 안부를 전하는 서찰이라도 오고 있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가 끝난 후였다. 갑자기 공자 규가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 정초부터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말씀하시지요."
"관공께서 내 스승이 되어 주시지 않겠소?"
공자 규는 단도 직입으로 청했다.
"예? 스승이라뇨?"
"사양하지 마십시오. 내 일국의 공자로 태어나서 부러울 것이 없소만 폐구( 苟)니 재구(載苟)니 하는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정말 죽기보다 괴롭소. 그리고 이번 위나라와의 싸움에서 왕군 자돌(王軍 子突)의 의거를 듣고 참으로 부끄러웠소이다. 내 이제 제양공을 군위에서 내치고 새 임금을 맞이하는 일에 온 몸을 바칠까 하오. 그래서 관공의 이끄심을 지도받고자 이렇듯 온 것이오."
공자 규가 토로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절절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관중이 그에게 물었다.
"제가 폐구는 들어본 적이 있지만 재구란 또 어떤 노래입니까? 혹시 아시고 계십니까?"
공자 규가 노래를 불렀다.
말발굽 소리도 가벼이 달리는 붉은 빛 아름다운 수레가
노나라 가는 길은 탄탄한데 제후가 서둘러 떠나네
수레 끄는 말은 미끈하고 드리워진 주렴은 곱기도 하네
노나라 가는 길은 탄탄한데 제후는 문강을 보러 달리네
흐르는 강물은 유유하고 행인들 많이도 지나가네
노나라 가는 길은 탄탄한데 제후는 태연히 함께 즐기네
"음탕 무도한 임금을 비난하는 백성의 노래입니다."
노래를 마친 공자 규가 덧붙였다. 관중이 응답했다.
"참으로 어리석은 듯한 백성이지만 이렇듯 사물을 보는 눈이 날카롭고 현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옛부터 민심이 천심이라 했지만 정말 민심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디 한 구절마다 날카로운 비수가 담겨 있는 듯 제 가슴을 찌릅니다. 오래 전에 포숙아 대인에게서 들은 바 있습니다만 관공께서는 좋은 계책을 세워 두신 것으로 압니다. 제게 그 뜻을 하교(下敎)해 주소서."
"계책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관중이 천천히 말했다.
"제양공이 음탕 무도하지만 쉽게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아직, 민심이 그를 떠났다고 하지만 제나라를 떠난 것은 아 닙니다. 그러나 무르익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지금 제양공이 위나라 원정으로 떠나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 자신이 여동생 문강과 옳지 못한 사연(邪戀)관계나 매부 노환공을 살해한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즉 민심이 자신을 비웃는 걸 알기에 다른 핑계를 대서 군사를 움직이고 외국을 침공하여 백성들을 위압하려는 것이지요. 현재 제양공의 심사는 괴롭겠지요. 또 허세를 부리다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기고만장하는 경향도 있겠지요. 이럴 때는 더욱 더 민심을 통해 압박을 가 하고 동시에 기고 만장하도록 부추겨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내분이 생기고 파탄이 벌어집니다. 그 때를 대비하면 됩니다."
"좋습니다. 역시 스승다운 계책이옵니다."
공자 규는 거듭 감탄했다. 관중이 공자 규에게 물었다.
"이번 위나라 싸움에서 왕군 자돌이 의거를 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자 규가 그 전말을 이야기했다.
자돌은 원래 직위가 낮은 벼슬을 살았으나 의로운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 자돌이 주왕실에 갔을 때가 마침 위나라에서 구원을 청하는 사신이 당도했을 때였다. 위나라 사자는 주왕에게 다섯 나라 제후들의 침공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다. 이에 대소 신하들은 모여서 이러한 상황에 과연 위나라로 구원병을 보낼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상당수의 신하들은 구원병을 보내는 것이 명분으로는 좋겠으나 지금 다섯 나라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으니 자칫 구원병을 보냈다가 실패하게 되면 왕군의 위엄만 손상당하기 십상이라고 여겨 극구 반대하고 있었다. 중론이 그렇게 돌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자돌이 분연히 일어서서 말했다.
"천하의 모든 일은 이치가 힘을 이겨야 합니다. 힘이 이치를 이긴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힘이 강하냐 약하냐는 문제도 있겠고 차이도 있겠으나 천고(千古)의 승부가 모두 이치에 있고 이치가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치를 업신여기고 뜻을 얻고자 할 때에 한 사람이라도 일어 나 그 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면 세상의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될 것입니다."
반대하던 신하들이 자돌의 열변에 대답을 못했다. 이 때 대부 부신이 일어섰다.
"참으로 장하도다. 의로운 자돌이여. 천자께옵서는 자돌을 보내십시오. 그리하여 주왕실에도 사람이 있음을 다섯 나라 제후에게 똑똑히 알려 주십시오."
이리하여 자돌은 천자의 허락을 얻어 병차 2백 승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구원하러 갔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리오. 5로 연합군의 병차가 그 10배도 넘는데서야. 자돌의 의기가 하늘을 찌른 듯 어찌 성취가 있겠는가. 마침내 왕군은 모두 전멸하고 자돌은 적군 수십 명을 죽인 후 스스로 목을 찌르고 자결하니 마치 하늘도 부끄러운 듯이 일시에 어둠이 내렸다가 걷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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